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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무명 용사들의 '억울한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신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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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무명 용사들의 '억울한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신원하다"

[탈춤과 나] 1980년대 제주지역 마당극운동과 그 생성미학적 배경 ①

민족미학연구소와 한국민족미학회가 주최하는 '2023 춘계 학술발표회'가 '1970, 80년대 민속극 부흥운동의 전개 양상과 그 사회문화사적 배경, 그리고 생성미학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지난 6월 29일 부산대학교 인덕관에서 열렸다.

학술발표회 자료집 가운데 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의 발제문을 세 편으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Ⅰ. 굿놀이와 제주지역 문화운동

1. 심방굿놀이란?

큰굿 속의 놀이굿을 심방굿놀이라 한다. 

심방굿놀이는 굿에서 분리되기 이전의 

제주의 민속극이다.

굿은 신화(본풀이)를 근거로 하여 집행되는 의례(ritual)이며,

신화(본풀이)를 극으로 보여주는 제의적 연극으로

심방이 굿판에서 연행하는 놀이라 하여, '심방굿놀이'라 한다.

그러한 굿의 내용은 배고픔, 가난,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

현실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싸움이며,

마당에서 하는 마당굿놀이, 심방이 하는 심방굿놀이로 전승되어 왔으므로

굿중 놀이인 '심방굿놀이'는 가장 고대로부터 존속되어온 한류 최고, 최대의 연행예술,

'살아 움직이는' 민중형식의 민족예술이다.

그러므로 심방굿놀이는 민중의 축적된 역사적 경험으로 만들어진

신화(=본풀이)를 굿본(굿의 대본)으로 하여 신앙 공동체인 동시에 생산 공동체 집단이 만들어 낸

가장 소중한 민중의 연행예술(=연극)이라 하겠다.

생각 1. 무당굿놀이가 아니라 심방굿놀이

심방은 '신의 아이' 또는 '신의 형방'

심방은 제사장 홍포관대=文官, 심방=신의 형방=武官

생각 2. 탈춤의 인간탈은 심방굿놀이의 종이탈(신탈)이 발전한 것

=조동일, 채희완, 문무병

생각 3. 심방의 시조 유정승 따님을 전승한 고 옛선생들

제주 심방은 세습무, 심방은 죽으면 신이 된다. 삼시왕에 간다.

생각 4. 제주 탈굿의 전승과 대중화

신의 탈=종이탈, 몸탈

조상굿의 동의풀이의 몸탈

삶은 닭을 이용한 고전적의 몸탈

동이처럼 사려앉아 죽은 양씨아미의 죽음을 살려내는

동이 물고 추는 춤

2. 80년대 극단 <수눌음> 시절의 제주지역 마당굿 운동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 8월에

나는 김상철, 고임순, 김창후, 김후배, 김수열, 부정희, 부숙희, 김도훈, 정공철 등과

극단 <수눌음>을 창립하고, 수눌음 지역문화운동 선언문을 작성하여

문화운동의 출발을 알리고, 제남신문사 공개홀에서

문무병 연출의 최초의 마당굿 <땅풀이>를 공연하였다.

마당굿은 제주의 전통굿 <영감놀이> <세경놀이> <전상놀이> 등을 응용하고,

아이들의 민속놀이 <기러기놀이>를 더하여 모두 4마당으로 구성하였다.

굿의 내용은 제주의 땅 85%가 모두 육지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땅풀이>는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살벌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현실을 고발한 공연이었고, 공연은 원자폭탄의 폭발처럼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충격파였다.

<땅풀이>는 작품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출발부터

제주에 내려와 있던 황석영 형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형은 후배인 나와 같이 작품을 만들고 연출하였으며,

작품을 연습하고 공연할 때까지 전 과정에서 마당극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이론과 실기 양면의 튼실한 힘을 보태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황석영 형과 손잡고

제주에서 처음으로 지역문화운동에 불을 놓고,

마당굿 <땅풀이>를 연출하여 초연하면서,

제주 촌놈 문무병과 육지의 고수 딴따라들과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황석영 형님 다음으로 제주를 밟은 딴따라는 당시 청주사대 무용과 교수로

모든 딴따라(광대)들의 우상이었던 '호모 딴따라스'의 창시자 채희완 교주였다.

마당굿을 빙자하여 술판을 벌이러 온 천하의 교주 채희완은

당당하게 "벗으라면 벗겠"다며 거침없이 많이 벗었고, 우리 역시 하나씩 벗어가면서

말이 앞선 문화운동이 아닌 몸으로 하는 운동,

굿판에서 하는 놀이의 신명을 배워나갔다.

그때 동지였던 백수 김상철 전 민예총 사무총장도

제주대학교 3학년짜리 새끼광대 김수열 제주민예총 지회장도

늘 옆에 있고 늘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렇게 80년 8월부터 우린 개같이 살겠다며, 술판에서 내공을 쌓으며,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김영동의 대금 산조를 들으며,

제주지역 문화판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그해 가을. <항파두리놀이> 공연 때,

제주에서 민속경연대회가 있었고,

광주 광대의 친구들이 찾아와 싫컷 울면서 광주를 알렸고,

우린 그때야 광주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81년 우린 광주에 가서 극단 『광대』의 후신인

극단 『신명』의 <호랑이놀이>를 보았고,

제주 마당굿 세 번째 작품 <돌풀이>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내가 쓴 첫 마당굿 작품이기도 했다.

그것은 제주의 역사를 담은 마당굿-싸움굿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세화리 해녀항쟁을 담은 82년의 <녀풀이>는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하게 돼 제주마당굿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굉장한 사건이었다.

83년은 <장사의 꿈> 김명곤, 임명구 출연 제주초연이 있었고,

그 시절 잘 나가는 문화계간지 <마당> 지에는

80년대 문화운동을 주도해 나갈 중요 인물로

채희완, 이애주, 박인배, 문무병, 김봉준을 소개하는

문화운동에 대한 토론이 좌담 특집으로 실렸다.

그리고 채희완 임진택 공저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라는

선언적 의미의 마당굿 이론서가 등장했다.

(내가 정면에 등장하는 80년대 이야기를 잠깐 적어 본다.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2023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생각하며,

30대 중반의 팔팔했던 내가 70대의 마지막까지 왔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 오늘의 광대, 나를 있게 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때 나는 마당극과 문화운동 1세대에 편입되었다.

2세대는 유해정(유인렬)을 비롯, 그 무렵 민극협 회장이 된 박인배,

정희섭 등의 날카로은 지성과 젊은 마당극 평론가 이영미의 예리한 평론담론이

그 당시를 회자하였다.

(예술과 사랑을 노래하며, 역사 앞에 부끄럼 없이 서기 위하여,

광주항쟁의 해 8월 마당굿 <땅풀이>를 시작으로

<극단 수눌음>을 창립했던 때부터

27년, 수눌음의 후신으로 싸움굿-4.3마당굿으로 시작된 <한라산>과 함께한

20년을 회상해본다.

80년 광주에서 온 광대들이 관덕정 앞 <수눌음> 소극장에서 흘린 눈물과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며 비새[悲鳥]처럼 우는 나의 눈물은

그게 최후의 낭만주의자로 분류되는 늙은 광대 <영등바람>의 역사였단 말인가.)

▲ 마당굿 <세경놀이>의 한 장면. ⓒ놀이패 한라산

3. <이제사 말햄수다>를 출판하고, 해원상생의 굿판을 열다

89년 4.3연구소 개원했고, <이제사 말햄수다> 1, 2권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나 문무병이었다.

그 당시 서울에는 현기영 형님을 중심으로 <제사협>이 있었고, 제사협은 나름대로 제주의 역사, 4.3연구를 위한 물밑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에 있는 현기영 형님을 소장으로 모시고,

제주에 민예총지회장으로 있는 내가 사무국장을 맡기로 하고

내가 여러 번 서울 나들이를 하며, 4.3연구소가 탄생하였다.

연구소의 출생은 그렇지만 제주 4.3항쟁의 증언 채록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현기영 소설 <순이 삼촌>이나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

김봉현의 <4.3 피의 역사> 와 같은 기존의 자료연구가 아니라

감히 조사를 시작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상황에서

4.3 증언조사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 당시 학위 논문 준비로 5촌 당숙의 지원을 받아

마을의 신당 조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사 갈 때마다 4.3연구소 후배들을 함께 데리고 가

곁다리로 현대사(4.3증언)의 흐름을 물어보면서 조심스럽게

조사의 중심을 4.3으로 옮겨갔었다.

4.3연구소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서 게릴라처럼

현장에 뛰어들어 증언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 현장조사를 앞장서서 실행한 사람이

문무병, 김창후, 양성자, 홍만기, 김기삼 들이었다.

채록 비용은 신당조사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니까 신당조사를 갔다가 4.3 채록까지 했던 셈이다.

그 결과로 <이제사 말행수다> 1․2권이 한울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이것이 4.3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중요한 사업은 90년대 말,

1998년 4.3 50주년 되는 해에 현대적 의미의 '역사맞이굿'으로

'4.3 해원상생굿'을 완성했다는 것이 4.3과 나의 연결고리다.

90년대는 그렇게 4.3의 싸움굿으로 문화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굿에서 신의 '내력담(來歷談)' 또는 '생애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본풀이'를 노래할 때, 심방은 본풀이에 들어가는 굿 사설에서

'귀신의 본을 풀면 신나락 만나락 한다'고 한다.

이 사설의 의미는 '풀이' 즉 역사적 해원을 통한 '신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망자가 왜 죽었고, 어째서 억울한 죽음인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망자는 억울함을 풀고, 맺힌 한 때문에 이승을 떠날 수 없었던 '부정'을 털어버리고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역사를 역사화한다는 것은 과거 속에 파묻히지 않고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4.3에서 죽은 평민 무명의 용사들의 죽음은 '난리에 죽은 억울한 죽음'이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는 일, 이것은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며,

'억울한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신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원의 의미는 바람을 잠재우 듯이 억울한 죽음을 정당화 해주고,

'의로운 죽음'으로 자리매김하여 위령하고

영혼을 저승 상마을로 보내는 의식이다.

이러한 굿을 역사적 해원․상생굿이라 한다.

상생이란 저승으로 가는 죽은 자와 이승에 남은 산 자가 더불어 산다는 의미이다.

이승에 미련을 남기면 저승으로 갈 수 없다.

망자의 부정은 이승에 남겨 둔 한(恨)이다.

한을 풀어 주는 자는 이승에 남아있는 산 자의 몫이다.

산 자가 망자의 한을 풀어 주고 저승으로 보내는 해원(解寃)은

상생(相生)을 위한 것이므로 해원과 상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로 다르면서 궁극적으로는 불이(不二)이다.

죽어서 억울한 조상과 살아서 부끄러운 자손이

죽어서 억울한 죽음을 '의로운 죽음'이 되게 하고,

자손은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역사 앞에 떳떳하고

산 자는 산 자끼리 더불어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상생굿'이다.

'시왕맞이'에서 신과 인간, 망자와 산자의 대화를 '영개울림'이라 한다.

'영개울림'은 '죽은 영혼의 울음'이며,

죽은 자에게 죽어서 억울한 심정을 이야기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망자는 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생전, 또는 죽는 순간의 못다한 말들을 다 풀어놓음으로써

맺힌 것을 풀고, 미련을 버리고 가볍게 저승으로 떠난다.

우리는 마당굿 형식을 통하여 4.3에 죽은 억울한 원혼들의 울음을 통하여

버려진 역사, 버림받은 역사의 현장을 고발해 왔다.

그것은 역사의 역사화였다.

'영개울림'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하는 한풀이 다시 말하면 역사적 해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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