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라며, "예정된 미국 핵탄도미사일잠수함(SSBNs)의 한국 기항을 통해 증명"될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됐다.
"부머(boom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미국의 핵탄도미사일잠수함(오하이오급)은 최대 20개의 '트라이던트 II D5'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미국 전략핵의 핵심이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2000-1만2000킬로미터이고, 1개의 미사일에는 8개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으며, 탄두당 파괴력은 100-475킬로톤이다.
1척의 SSBN의 최대 핵무장력이 7만6000킬로톤인데, 이는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원자탄의 5000배가 넘는다. 미국은 현재 이러한 SSBNs를 14척 보유하고 있다.
핵탄도잠수함이 품고 다니는 파괴력도 놀랍지만, 미국 정부가 이 잠수함의 한국 기항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미국은 은밀성을 갖춰 2차 공격 능력의 핵심인 핵탄도잠수함의 외국 기항이나 전개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전문가인 한스 크리스텐센 미국과학자협회(FAS) 회장이 2011년에 작성한 글에 따르면, 한국을 제외하고 미국이 외국에 핵탄도잠수함을 '공개적으로' 기항시킨 사례는 1963년 터키 항구 기항이 유일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핵미사일 철수의 상응조치로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주피터 중거리 핵미사일을 철수한 것에 대한 만회책에 해당된 것이었다.
그럼 한국은 어땠을까? 크리스텐센에 따르면,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은 한국의 진해항에 핵탄도잠수함을 총 35회나 보냈었다. 당시 미국은 왜 유독 한국에만 수시로 핵탄도잠수함을 기항시킨 것일까? 공식적인 목적인 대북 억제 강화뿐만 아니라 한미관계 및 미국 내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탓이 컸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과 베트남 전쟁 패배를 목도하고는 안보 불안을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집중하려는 취지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에 닉슨 행정부는 한국에 핵 관련 시설과 장비 판매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캐나다 및 프랑스에 협력해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 시도를 무마했다.
하지만 197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가 승리하면서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지미 카터가 한국에 배치한 미국 핵무기의 철수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감축에 이어 미국 핵무기의 철수는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핵개발의 유혹을 다시금 부채질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에 미국은 '두 가지 안심책'을 꺼내들었다. 하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팀 스피릿'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폴라리스' 핵탄도미사일을 장착한 잠수함을 한국에 자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 핵탄도잠수함의 한국 기항은 1981년 이후 중단되었다. 폴라리스 퇴역 계획도 작용했지만, 한미관계의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를 꺾고 승리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에 배치한 미국 핵무기 철수 계획을 백지화했다. 또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을 1981년 2월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이 자리에서 레이건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대신에 비핵화 확약을 받아냈다.
이러한 사례는 바이든 행정부가 핵탄도잠수함을 42년 만에 한국에 보내기로 한 결정과 닮은꼴이다. 북핵이 고도화되면서 한국 내에선 독자적인 핵무장이나 미국 핵무기의 재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왔다. 이를 들어줄 수 없는 미국으로서는 '트라이던트 2'를 장착한 핵탄도잠수함을 보내 한국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면 "정권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말폭탄과 함께.
그런데 안보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북한도 2차 공격 능력 확보를 위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개발하고 시험발사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미사일의 이름이 '북극성(폴라리스)'이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 13일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시험발사를 참관한 자리에서 "적들에게 시종 치명적이며 공세적인 대응을 가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북한과 미국의 핵정책은 싸우면서 닮아가고 있다. 이를 말리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윤석열 정부는 북미간의 두려움 주기 공방전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안보를 위해 미국에 간과 쓸개까지 내주다시피한 한미정상회담이 안보를 더욱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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