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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를 향해, 우리는 변혁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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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를 향해, 우리는 변혁을 희망한다

[프레시안 books] <빵과장미의 도전>

가부장제 자본주의. 이 시대 우리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체제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착취, 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 결함을 품은 채 다양한 사회문제를 발생시켜 왔다. 성차별과 빈곤, 노동조건 악화, 생태위기 등은 그 문제의 큰 이름들이다. 그 외에도 '이 세상 참 요상하구나' 느꼈던 지점에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본주의가 만든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저항 운동을 펼쳤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시기를 지나 여러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이 조직됐다. 그들은 거리 시위나 서명 운동, 국민 청원 등으로 목소리를 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생태운동이 두드러진다. 운동가들은 일상 속 실천을 넘어 특정 기업 불매 운동, 비닐 포장재 감축 요구 등에 나섰고 정부의 반생태적 행보를 견제한다. 모두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저항이다. 크고 작은 사회적 결과를 성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운동과 자본주의 체제가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면 크나큰 답답함을 갖게 된다.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소수자에게 유리한 법안이 통과된다 한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억압 구조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법안과 제도가 개선돼도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한다면 그 결과인 착취와 억압, 차별 구조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대 자본주의가 능력주의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민중을 철저히 개인화시켰다는 점 또한 문제다. 파편화된 개인은 이제 각자도생의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사회운동이 기득권 체제에 흡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기업의 페미니즘 상업화나 그린 워싱이 그 예다. 사회운동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지만, 운동이 체제에 흡수되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낀다. 아무리 혁신적인 요구라도 집어삼켜 끝내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야 마는 자본주의.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체제를 끝낼 방법은 정말 없나.

책 <빵과장미의 도전>은 내가 느낀 무력감을 직시하게끔 도왔다. '빵과장미'의 이야기는 나의 무력감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직면하게 하고, 돌파구를 뚫어갈 방안을 제시해주었다.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억압받는 모두와 단결하는 투쟁

이 책은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해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멕시코, 스페인 등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 빵과장미의 이야기를 다룬다. 빵과장미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 여성과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친다. 이 책은 언론에 발표된 빵과장미 회원들의 글을 번역해 엮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책 1장에선 각 지역 빵과장미 운동 사례를 되짚고, 2장은 빵과장미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을 세밀히 다룬다. 3장에선 그런 입장을 바탕으로 '99% 페미니즘 선언'과 실비아 페데리치의 반자본주의 논의 등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실제 노동 현장에서 빵과장미가 이뤄낸 성취는 인상 깊었다. 빵과장미는 각 노동 현장 내에서 여성위원회를 조직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렇게 조직된 여성위원회는 큰 변화를 불러왔다. 아르헨티나 크라프트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자 여성위원회는 파업을 조직했다. 해당 관리자를 쫓아낼 때까지 야간근무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고, 파업 5시간 만에 관리자는 쫓겨나게 된다.

여성위원회 구성원에는 여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나 어머니, 딸도 포함됐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다른 여성들도 함께 단결한 것이다. 이렇게 확장한 여성위원회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아르헨티나 인쇄 공장 도널리는 2014년부터 노동자가 통제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통제를 관철하는 데에 남성 노동자의 아내들이 조직한 여성위원회가 큰 몫을 했다. 그들은 규찰대에 참여하고, 노동자 통제를 위한 지역사회의 지지를 끌어모았다.

또 다른 예시로 성전환 여성 노동자에게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장에 대항해 파업을 조직한 경우가 책에 소개된다. 이 공장의 한 노동자는 이 경험을 통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성장했고, 곧 작업장에서의 집단적 의식도 성장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노동 현장 내에서 못 본 채 덮어놓은 사안에도 맞서 싸우기로 결단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 이 공장은 노동자가 통제하는 공장이 됐다.

이러한 예시들은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단결할 때, 노동자계급 투쟁의 동력이 강해짐을 보여준다. 기존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확실히 거부하는 빵과장미의 입장은 노동계급 투쟁이 나아갈 방향이다. 한국 노동운동계 역시 변화의 요구 앞에 서 있다. 이제는 남성중심의 배제적인 노조를 거부해야 한다. 제대로 단결하고 투쟁하려면 변화가 꼭 필요하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넓은 시각과 전략을 확보하다

빵과장미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난 2장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의 역사를 살펴볼 기회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빵과장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빵과장미는 여성의 민주적 권리와 임신중지권, 남성과의 동일임금,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등을 주장하는 데서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선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문제의식 아래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삼는다. 즉 '페미니즘이 부분적 목표에 멈추지 않고, 혁명적 정치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닦아가고자' 한다. 노동자계급이 혁명 주체가 되어 여성을 비롯한 억압받는 자들과 단결해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 3장에서 이어지는 '99퍼센트(%) 페미니즘 선언'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99% 페미니즘 선언'은 억압받는 99%를 위한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야기하는 선언으로, 2019년 낸시 프레이저, 친지아 아루짜, 티티 바타차리야에 의해 미국에서 발표됐다. 빵과장미 회원 안드레아 다트리와 셀레스테 무리쇼는 선언의 전체적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혁명을 펼쳐야 한다는 시각이 결여되어있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낼 방안은 결국 노동자계급 투쟁을 통한 새로운 체제, 즉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게 빵과장미의 입장이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이자 노동자계급을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제시했다.

빵과장미의 입장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노동운동, 사회운동이 '개량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데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개량주의란 기득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엎기보다는, 체제 속에서 법적 혹은 제도적 권리를 쟁취하는 선에서 만족하자는 생각이다. 빵과장미는 페미니즘이 '개량의 지평선을 넘어설 힘이 없는 운동으로 용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현실에 단호히 개입'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체제 너머를 보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개입을 위한 최선의 전략인 셈이다.

어떻게 체제에 맞설 것인가

빵과장미는 개량주의, 그리고 운동의 '용해'를 경계한다. 그 태도가 나로 하여금 서문에 언급한 무력감의 원인을 직면하게 했다. 이 체제를 넘어설 변혁적 전망이 없다면, 결국 기업과 기업에 결탁한 정부는 계속해서 사회운동의 요구를 흡수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페미니즘을 통해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비정상/정상 구분 등 차별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 한다. 빵과장미는 그러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얻었다면, 노동자계급의 단결로 변혁을 위한 전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상품 생산을 멈출 힘을 지닌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앞장설 수밖에 없다.

솔직해지자면 나는 사회주의가 그리는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책에 드러난 빵과장미의 세세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분명 있다. 하지만 가부장제 자본주의 체제를 끝낼 전략을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빵과장미의 문제의식은 큰 울림을 남겼다.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전략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무력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체제의 근본 변혁을 위한 전략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가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인 운동을 조직하는 것만이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빵과장미의 입장은 그 방안 모색에 나침반이 되어줄 테다.

아르헨티나 빵과장미는 2003년 40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회원 4000명을 모집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빵과장미 회원 타티아나 코차렐리는 그러한 확장에 '마법이 작동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조직을 만들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것'이었다. 부단한 조직화와 연대를 통해 단결을 이루고, 끝내 체제를 바꾸기를. 그런 의지를 품어본다.

▲<빵과장미의 도전>(오연홍 엮음, 김요한·양동민·양준석·오연홍·전해성 옮김) ⓒ숨쉬는책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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