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이 3.1절에 일장기를 달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서 묘사되기는 단순히 '민족 감정'을 건드린 한 시민의 일탈처럼 되어 있었지만, 이건 우리 사회에 대한 어떤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를테면 깃발의 의미. 그는 대한민국의 영토 위에서 합의된 주류 의견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미로 깃발을 내걸었다. '깃발을 든다'는 행위에 대한 유구한 해석의 전통에 근거하면 이건 어떤 '자주 독립 선언'와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깃발'이 아니고, 영토 밖에서 이미 존재하는 타국의 깃발을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가 일본인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쉽게 말해 그는 자신의 '의지'를 내비치는 데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영토 안에서 타국의 '깃발'을 전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괴한 행위 예술을 보면서, '그렇다면 일장기를 자신의 정체성 삼는 사람들(일본인)의 입장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마침 한 일본인이 "그런 식으로 도발 목적으로 국기를 쓰는 것도 그 나라 국기에 대해 일체 리스펙트(존중)가 없는 행위라고 느껴진다"고 촌평한 SNS 상의 글을 보았다.
이런 행위는 3.1운동에 대해 모르는 일본인들에게도, 3.1운동을 존중하는 일본인들에게도, 그리고 이 땅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모두 대체적으로 무례한 일에 해당하는 것 같다.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상징물이 타국 사회의 맥락에서 특정 정치적 의도를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자는 안타깝게도 이런 사유에까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타인의 정체성의 상징을 제멋대로 자신만의 의미의 감옥에 가둬버린 행위. 우린 그런 것을 '공감 능력의 부재'라 부른다. 일장기에 대한 존중도, 피해자에 대한 공감도 찾아 볼 수 없는.
왜 이런 행위가 발생했는지 원인을 따져 올라가면,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의 비극을 제거한 채 '미래를 향해 가자'고 했던 3.1절 연설문에 가 닿는다. 그리고 사실상 후속 조치로 발표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을 발표해 당초 '일본 기업과 한국 자유시민의 분쟁'으로 규정돼 있던 사건을, 결과적으로 한국 자유시민과 한국 정부의 분쟁, 나아가 한국 정치판의 내전으로 치환시켜버린 마법과 같은 정부의 정무능력으로 가 닿는다. 강제동원 문제를 함께 고민해 온 일본 시민사회 입장에서도 맥이 빠지게 하는 일이란 건 두말할 것 없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그렇지 않은 한국인으로 살 수 있을까?
일본의 지성 오에 겐자부로가 <오키나와 노트>에서 일관되게 던지는 질문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그렇지 않은 일본인으로 나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된 오키나와에서, 나가사키 어뢰공장에 파병 갔다 피폭돼 오키나와에 돌아온 원폭 피해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오키나와 땅 위에, 미군의 핵기지가 공존하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을 목격한 작가는, 그 모든 모순 자체보다 그 모순을 바라보는 자신(본토인)의 생래에 가까운 무의식적 기만을 떨쳐내려 몸부림친다. 그는 오키나와를 타자화 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본토인'인 자신의 한계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하며, 겉보기엔 작은 마음의 균열이 치명적일 수 있음을 힘겹게 인식해 나가려 하는 본인 스스로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공감도의 한계치를 시험하며. 이런 태도는 타자의 아픔을 대하는 첫 발걸음이며, 인권은 그런 발자국을 내 온 사람들로 인해 아주 조금씩 진전해 왔다.
한국의 대법원은 "구 일본제철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원고들)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강제동원 피해자들(원고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피해자는 우리 국민임이 명백한데, 그에 따른 정부의 '해법'을 두고 상당수 피해 당사자가 반대하는데도 누군가는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거나 '일본에 배상하라고 악을 쓰는 것은 한국 뿐'이라고 되레 악을 쓴다. 그리고 이걸 '냉철한 이성적 판단'으로 포장해 낸다.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찬성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은데, 갑자기 일본인들의 상징과 같은 일장기를 끌어들여 제멋대로 사용해버리는 행위처럼.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 정부는 스스로 이 해법을 발표하면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의 수출 규제가 발표됐고, 한국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통보했으며, 이어 코로나19 발생 이후 인적 교류 단절 등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가 사실상 방치되어 왔다고 배경 설명을 했다. 한일관계 방치가 피해자의 탓도 아닌데, 그들은 피해자들에게 공감한다고 기만하면서, 노골적으로 피해자들의 심적, 물질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정부의 이 행위에 호응하고 나선 자들은 멋대로 일본 정부와 일본인을 전용해, 우리 안에서 내적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정부간 비정한 거래에 피해자가 희생되는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친일파가 어때서'라고 대꾸하고 '죽창가는 그만 부르라'고 윽박지르는 것을 추동하고 있는 정부 인사들의 행태를 보면 서글퍼진다.
그리고 여기에 풍경 하나가 더해졌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가족을 잃은 베트남인에게 손해 배상을 하라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고 한다. 1968년 2월 한국군 청룡부대 제1대대 제1중대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74명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한국 법원은 "한국 군인들이 작전 수행 중 응우옌티탄씨의 집으로 가 수류탄과 총으로 위협하면서 가족을 밖으로 나오게 해 차례대로 총격을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학살된 건 전혀 없고 이번 판결에 대해 국방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의 가해에 충분한 사과도 받지 않고 손을 내미는 정부, 그리고 한국의 가해에 대해 충분히 사과도 하지 않고 있는 정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정부는 피해자의 심정에 대해서도, 가해자의 도리에 대해서도 공감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 두가지 일은 일맥상통한 것인가. 피해자로서도, 가해자로서도 '공감'을 잃어버린 '일관성' 있는 궁핍한 한국 정부를 바라본다. 어쩌면 새로운 가해를 자신도 모르게 창조하고 있는지도 모를.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우린 그렇지 않은 한국인으로 살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밀실같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내적 강제동원 해법'이 한국의 모든 자유시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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