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결국, 이겼습니다."
김용민 씨가 선언하듯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김용민, 소성욱, 부부로서 끝까지 행복해라!" 21일 오전, 법원 앞에 선 결혼 5년차 동성 부부 김용민, 소성욱 씨가 '사랑'이라 적힌 피켓을 들고 밝게 웃었다. 이날 그들은 법원으로부터 부부 간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받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낸 지 2년 만이다.
서울고등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이승한 심준보 김종호)는 이날 김 씨의 동성 배우자 소성욱 씨가 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승소로 판결했다. 지난 1심 재판부는 "동성결합과 남녀결합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2심 재판부는 해당 1심을 뒤집었다.
판결은 간단명료했다. 재판부는 별도의 설명 없이 "1심 판결이 취소돼야 한다"고 선고했다. 이어 공단에게는 앞서 공단이 소 씨에게 청구한 지역가입자 보험료 소급분을 청구취소하고 소송비용 일체를 부담하게 했다.
소송 대리인단의 박한희 변호사는 이날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승소 기념 기자회견에서 "대리인단은 2심 재판부 측에 '동성부부와 이성부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에도 동성부부만 (건보 피부양자 자격에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로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해왔다"라며 "재판부가 이를 인정한 것"이라고 이번 판결의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로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항소심 1회 변론기일에서 이미 "행정법상 평등의 원칙"을 강조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동성 부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률 용어가 명시돼 있지 않은 사실혼 관계자들은 건보 피부양자 자격을 부여받고 있는데, 동성 부부의 경우만 해당 자격을 얻을 수 없다면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가'라는 취지로 공단 측에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1심 재판부가 지난 판례 및 사회적 인식 등을 근거로 "동성 간 생활공동체를 사실혼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2심 판결에선 법원이 동성 부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선도적으로 제시한 셈이다.
"건강보험은 '혼인'의 천 가지 권리 중 하나일 뿐 … 동성혼 법제화해야"
소성욱 씨와 배우자 김용민 씨의 '건보 소송'은 지난 2021년부터 시작됐다. 소 씨는 2020년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인 본인을 직장가입자인 김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느냐고 공단 측에 문의했고, 당시 공단은 '(피부양자 자격이) 인정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후 '건강보험공단이 동성 부부를 부부로 인정했다'는 요지의 언론보도가 이어지자 공단은 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취소했고, 김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된 소 씨의 건강보험을 지역가입자로 전환해 그간의 보험료를 소급 청구했다.
이에 소 씨 부부는 2021년 2월 "(동성부부는) 실질적 혼인관계임에도 동성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투쟁이었다. 언론에 얼굴과 이름을 밝히고 '동성부부의 권리'를 말하자, 악플과 협박 등 사이버불링이 이어졌다. 소 씨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가진 마음을 저주 당하거나, 외면당하거나 욕을 들어야만 했다. 1심과 항소심, 모든 재판이 진행될 때의 여러 언론보도에도 비난과 저주의 댓글이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고 회상했다.
2년 간의 소송 끝에 결국 승리한 소 씨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법부의 판단은 제가 남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저주나 외면을 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욕을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라며 "욕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마음은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길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다"고 이날의 소희를 밝혔다.
소 씨의 남편 김용민 씨도 "오늘 우리는 사법체계 안에서 우리의 지위(가족관계)를 인정받게 됐다. 참으로 오래 걸렸다"라면서도 "이 소송이 저희 둘만의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송은 모든 동성부부들의 평등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이날 판결의 의미를 되새겼다.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은 동성부부 등 '이성애 가족규범'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마주치는 대표적인 '차별지대'로 꼽혀왔다. 기존 판례를 중요시하는 재판부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이 '차별지대'를 인정한 이번 판결은 획기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동성혼 법제화, 우리의 갈 길"
앞으로의 과제는 남아있다. 김 씨는 "오늘 이 소송으로 얻어낸 권리는 '혼인'이 얻어낼 수 있는 천 가지의 권리 중에 단 한 가지일 뿐"이라며 "천 가지나 되는 권리 중 하나가 필요할 때마다 싸울 순 없지 않나. 그래서 우리에겐 동성혼(법제화)이 필요하고 그게 우리 갈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국내 인권단체들은 동성혼의 법제화 뿐만 아니라 '내가 지정한 1인 제도' 등 돌봄·가족관계의 혁신을 통해 혼인에 따른 각종 혜택을 더 다양한 가족관계 구성원들에게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프레시안>과의 지난 인터뷰에서 "주거 혜택, 보험금 납부 등 조세 관계, 장례 및 응급 수술에 있어서의 자격 등이 모두 '폐쇄적인 가족주의' 속에서만 주어지고 있다"라며 "시민들은 새로운 가족 형태를 만들고 있는데 국가만 낡은 모델을 고집하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관련기사 ☞ 나경원 부위원장님,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하면 안 되나요?)
이에 이날 현장에 모인 이들은 동성부부 권리투쟁의 '1호 승리 소식'을 자축하면서도 "앞으론 더 큰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이호림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활동가는 "오늘 판결로 사법부는 성소수자 가족들이 처해있는 차별적 상황을 인정한 것"이라며 "올해부터 더욱 본격적이고 대중적인 동성혼 법제화 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박한희 변호사 또한 이날 판결을 두고 "단지 두 개인의 보험료 문제가 아니"라며 "오늘 판결이 계속해서 권리관계에서 배제되고,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배우자를 국가가 배제해선 안 된다는 선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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