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파주(坡州)
파종*
억세게 내린 비에
뿌리가 드러났다
밭 가장자리 구덩이 파고
사람들 일렬로 세운 뒤
죽인 흔적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에는 ‘6·25 반공투사 위령비’가 서 있다. 1985년 6월 25일 한국방송공사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2008년 파주 시장은 계단 아래 안내판을 두고 “여기는 1950년 10월 1일, 북한 인민군이 포로가 된 반공인사와 마을 주민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백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곳입니다”라고 새겼다.
밤의 중얼거림
도시는 고독할까
옥상에서 내려다본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다 뒤따르는 그림자
길어졌다 짧아지는
짧아졌다 길어지는
끝과 시작 나는
혁명할 수 있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적신호가 켜졌다
열차가 플랫폼을 지나치고
눈앞에 있는 것들
할아버지가 살았던 1937년부터 1947년까지의 동아시아, 친구들과 병원에서 헤어지고 독한 술을 들이켰다 열차에 몸을 싣고
길게 뻗은 내 손가락이
십 년 동안의 고독을 한 장씩 넘기고 있다
적에게 총을 겨눈
명령에 복종한
살아서
살아서
남겨진 유산
채무에 시달렸다 거의 평생 우리 가족은 달마다 갚아야 할 돈을 헤아린다 내가 너를 미워하듯이 네가 나를 미워하면
잘못된 사람이 된 것 같다
한밤중에 깬 네가 깊이 가라앉은 적막을 잡아당긴다 맑고 또렷한 문명이여
매복해 있는 게릴라
수풀에서
뛰어나온 개 한 마리
입에 뼈를 물고
죽은 이가 만개한 산딸나무 아래
손짓한다 느리게 끝없는 꿈속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너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밤의 중얼거림
멈추지 않는 열차
지나간 기회와
고요한 날씨
거리에서
소리가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
죽음으로 드러나는
빈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우리에게
더 많은 죽음이 남아 있다
내 영혼의 절반은 망자에게서
왔다
툭 하고
추락하는
밤
나는 오래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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