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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들'이 남긴 감정으로 '광장 이후'를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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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광장들'이 남긴 감정으로 '광장 이후'를 다시 읽기  

[프레시안books]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

신촌역 출구에서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올 때면 전단지를 건네주는 누군가의 주름진 손을 제일 먼저 볼 때가 많다. 중년 여성의 손은 너무 친숙해서 거절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지나가는 날이면 그 친절함은 내게 무시할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었던가 다시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오래전 학생운동이 폭력적으로 진압되던 연세대학교 정문을 지나 교내에 펼쳐진 청소노동자 처우 개선 시위 현수막을 스치고 건물 입구에서 비정규직 강사 임금 문제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볼 때까지 이어지는 날이면 '한국에는 그래도 되는 것들이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이는 감정이 머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감정, 그것은 느껴야 할 것을 온전히 느끼지 않고 그저 함께 앞으로 걸어가는 무리에 속해 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자, 부끄러움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지 못하고 하루를 흘려보내는 데에서 오는 부끄러움과도 닮아있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이 개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만연한 집합감정이자 이름 붙이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잉여 감정이라면 이것의 정체로부터 우리는 '그저' 살아가는 한국이라는 세계를 다시 감각할 수 있을까?

감정이라는 방법론

저자는 질문한다. 일상에 만연한 감정을 읽는 것이 미래를 상상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감정은 동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감정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하지만, 감정이 행위라고 바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행위 직전의 에너지이자 방향성을 갖는 힘이기에 과거가 재편되고 미래가 앞당겨지며 현실 직전의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11)을 보게 하는 것에 가깝다.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우리'가 경험한 '광장들'의 해석되지 않은 감정들을 분석하며, 하나의 방향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집합감정이 앞으로 어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유의미한 (대답이 아닌) 질문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광장 이후, 근대 이후에 대한 상상과 전망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책에서 분석의 범주로 삼고 있는 시공간은 강용준, 이문구, 이청준, 박완서, 장강명, 황정은, 윤이형, 최은영 등이 남긴 문학 작품들과 한국전쟁, 나꼼수, 세월호, 헬조선, 소수자 혐오 등의 문화 현상으로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를 재현해온 서사들이다.

"그럼에도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철학, 역사학, 문화학, 그리고 문학 연구가 감정으로 우회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의 '중간-매개'적 성격 때문이다. 주체의 것으로 표출되지만 감정은 (누군가의 것으로) 표출될 때에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감정으로 포착될 수 있으며, 인간과 인간 혹은 사물이나 세계 '사이'에서만 온전하게 ‘감정’이 될 수 있다."(10)

부정적 집합감정의 흐름

광장의 통치술, 즉 한국 사회 통치술의 계보를 추적하며 저자는 1940년대 전후 식민 통치의 일상부터 한국전쟁, 급격한 근대화와 외환위기, 87년 체제와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그리고 2010년대 이후 광장과 거리의 시간을 분석한다. 이것은 차별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해방, 전쟁, 분단을 거치며 폭력적으로 재편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 속에서 인종적, 젠더적, 계급적 위계구조가 어떻게 한국인에게 체화되었는지를 분석하며 저자는 속물 사회, 속물성이라는 용어를 되짚는다. 이것은 사회적 감정으로서의 죄의식과 수치심이 상실된 모습으로 한국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요약하는 감정의 이름이기도 하다.

2부 '패턴'과 3부 '연결'에서 문학과 문화를 넘나들며 저자는 어떻게 한국전쟁을 애도하고 기억하고 역사화했는지가 이후 한국 사회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대규모 인구 이동과 함께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한국전쟁은 사회 이슈와 타인에 무관심한 개인의 등장을 촉진했고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의 최대치는 가족 단위를 넘지 않게 되었다"(118).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 그저 생존과 보존으로 쏠렸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것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죄의식과 타인에게 폐가 된다는 수치심이라는 사회감정이 상실되는 과정이 이어져 왔다. 그 속에서 속물성은 정상성의 모델이 되고 중산층 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오히려 그러한 속물성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이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병리화되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속물성은 중심과 주변의 격차를 사회의 일원들 각자가 내면화하고 그 격차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견고해져갔다. 그렇기에 "1960~70년대에 두드러진 한국사회의 속물성(의 팽창)을 폐기되어야 할 부정적 속성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는 어렵다"(151). 한국 사회의 속물성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이 가능할 수단으로서의 부정부패를 포괄하며 "사회변동의 긍정적, 부정적 동력을 동시에 지칭하는 말"(151)이었기 때문이다. "'시민과 속물'이 한 존재의 겉과 속을 채우며 일체를 이루는 위선적 존재론의 전면화"(114) 속에서 시대 감정으로서의 속물성, 성찰 없는 개인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지배적인 표상이 되어왔다.

저자는 "한국사회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무딘 편이며 사적 영역 혹은 개별자로서의 인권을 침해당하는 일에 무심한 편인데, 무딘 감각의 저편에서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희생 의식이 내면화"(208)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개인의 정체를 재질문하기를 요청한다. 개인의 등장은 근대로 이행하며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국면적 맥락과 사회 구조 속에서 매번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동체적 가치의 선험적 우선성 속에서 선 규정된 개인을 지적하며 저자는 식민지 경험, 한국전쟁, 외환위기라는 크게 세 번의 계기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음을 언급한다. 한국적 맥락의 개인은 독립된 사회적 정치적 실체로서의 개인으로 존재하기 전에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재가능성"(213)을 재 질문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1990년대 한국문학은 "여성, 어린이, 이방인 등에 이르는 계급적⋅젠더적⋅인종적 타자"(213)의 이름으로 개인을 복원하며 조각난 파편들로서의 개인적인 존재들을 재발견했다는 의의를 품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이나 지역은 민족, 국가, 집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 사회에 지배적이기에 저자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공동체의 기원이 갖는 폭력성에 대한 폭로로서 이루어져야 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하는 방향은 "개인의 내적 차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차이'들' 속의 보편적 지층을 마련"(216)하려는 난제를 고민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으로

2010년대를 지나며 혁명을 꿈꿨던 광장의 기대와 열망은 무기력과 체념으로 바뀌었고, 모욕, 차별, 증오,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지배적인 사회감정이 되었다. 저자는 그럼에도 "무시와 모욕을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323)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지금 이곳의 문학과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며 헬조선론 속의 청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혐오를 마주하는 젠더, 디아스포라, 연대 없는 광장 속의 개인을 되짚는다. 그곳에는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음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감정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되새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명명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작은 마음들을 다시 살피고 기록하는 문학과 문화를 오가며 방대한 시공간적 범주를 읽는 것은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것이기라기보다, 잉여의 감정, 틈새의 감각들로 아직 읽지 못한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에 가깝다. 

이때 문학과 문화로 현실을 구체적으로 읽는 일은 이대로 살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이렇게 살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상상력의 가능성으로서 지금 이곳에 여전히 요청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무시와 모욕의 연대나 (수치의 사회적 양태에 가까울) 죄의식의 긍정적 발현을 지속적으로 기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곳을 가득 채운 문제들을 시시비비도 제대로 따지지 못한 채로 흘러가 버리게 놔두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323) 이 책은 당대의 유의미한 문화적 현상과 문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통해, 그렇게 말하기까지의 마음을 읽어내는 우회의 길, 어쩌면 유일한 길을 걸어간다. 수많은 과거의 단편들을 감정이라는 방법론으로 재구성한 이 책을 또 다른 우회로 삼아 누군가는 조금 다른 미래를 쓸 수 있는 길을 찾아갈 것이다.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소영현 지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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