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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살구쟁이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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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살구쟁이의 절규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충남 공주 왕촌 살구쟁이 학살 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공주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21번국도변 건너편 금강의 나지막한 뒤척임 소리 귀에 걸어두고 좁다란 숲길 따라 들어서면 바람결 더없이 잔잔해지고 햇발이 그윽하게 내리는 야트막한 골짜기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긴 무덤 여섯 기(其)가 있다네.

공주형무소 철문이 열리고 정치범 재소자들 예비검속으로 수감된 보도연맹원들 죄수번호가 불리는 대로 끌려 나와 삼사십여 명씩 짐짝처럼 트럭에 던져졌다네 고개를 쑤셔 박은 채 실려 오는 동안 두세 명은 군인이 휘두른 개머리판에 머리가 달걀처럼 부서졌다고도 하고 공주 읍내 지나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 접어들어 머잖아 트럭은 멈추었다네 트럭에서 내린 이들은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일렬로 늘어선 채 산으로 향했다네 엄습해오는 공포감에 온몸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오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죽음을 직감한 몇몇의 재소자들은 울부짖기 시작했다네.

눈앞에 펼쳐진 깊이 1미터, 가로 14미터, 세로 2.5미터의 긴 무덤자리 공주 청년방위대 38연대 대원들이 파놓은 구덩이 앞에 의족을 한 재소자는 맨 바깥 줄에 자리를 잡고 칠팔십 명은 두 줄로 늘어서 등을 맞댄 채 무릎 꿇리었다네 이내 특경대원 군 헌병 경찰이 겨눈 M1 소총과 카빈총이 일제히 불을 뿜어대었고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재소자들은 구덩이 속으로 하나둘 굴러 떨어졌다네 머리뼈를 관통한 총알들, 화약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골짜기 전체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사이,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유림이 부르는 진혼곡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설움 보듬는 것도 잠시 무자비한 총소리가 노랫가락을 끊어버렸다네 그녀의 아비도 오라비도 함께 구덩이에 처박혔다네 곧바로 숨진 이들의 몸 위로 채워지는 돌덩이들,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재소자들의 뒷머리 위로도 등 위로도 쉴 새 없이 큼직한 돌덩이가 날아들었다네 흙 대신 돌덩이로 시신들 대충 덮어버리고는 총을 챙겨 다음 구덩이로 향해갔다네 트럭에 실려 온 어떤 이들은 위협에 못 이겨 자신의 무덤자리 직접 파야만도 하였다네 저녁이 되어서야 육백여 명의 희생자들로 여섯 개의 긴 무덤이 채워지고 살구쟁이의 총성이 그칠 수 있었다네.

전쟁은 광기를 불러들이고 국군과 경찰 권력은 폭정을 휘둘러 정식 재판도 선고도 없이 학살을 저질렀지 희생자들은 이름도 없이 긴 무덤의 주인이 되어 칠십여 해 침묵해야만 했다네 유유히 금강은 흐르고 세월도 흘러서 참상을 덮고 기억조차 묻힌다한들 국가의 폭력과 야만적 몰살의 진실은 자명한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다네 아직 그 누구도 용서를 구하지도 처벌 받지도 않았는데 이 통한의 역사를 누가 증거할 것인가? 뼛골에 사무친 영혼의 한을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여기, 왕촌 작은 살구쟁이의 한 맺힌 절규를 들어라 고요한 외침을 들어 보아라

▲ 충남 공주시 상왕동 산 29-19번지(작은 살구쟁이) 민간인학살현장. ⓒ김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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