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쿠르드족 3명을 살해한 용의자가 인종차별적 동기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주말 항의 시위를 벌인 쿠르드인들은 사건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쿠르드족에 대한 "테러"로 규정했다.
<AP>, <로이터> 통신과 프랑스 일간 <르몽드>, 영국 BBC 방송 등 외신을 종합하면 25일(현지시각) 프랑스 검찰은 지난 23일 파리 10구에 위치한 쿠르드 문화센터와 쿠르드족 운영 미용실 등에서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된 69살 백인 남성 용의자가 "외국인을 향한 병적인 혐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용의자가 2016년 집에 도둑이 든 것을 계기로 외국인 혐오를 키웠으며 "모든 비유럽인 외국인"을 적으로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사건 당시 용의자는 피해자들을 모르는 상태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용의자의 컴퓨터와 휴대전화 조사 결과 극단주의 사상과의 접점이 발견되진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현장에서 체포된 용의자는 24일 정신과로 이송된 뒤 25일 퇴원해 다시 경찰에 구금된 상태로 26일 법정에 출두할 예정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이미 24일 용의자의 범죄 혐의에 인종차별 동기가 추가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은퇴한 열차 기관사인 용의자는 지난해에도 파리 동부의 이민자 거주지에서 흉기 공격을 벌여 인종차별적 폭력 혐의를 받고 구금된 뒤 이달 초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2016년에도 무장 폭력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용의자는 사건에 사용한 총기를 4년 전 사격 동호회 회원으로부터 입수해 부모님댁에 숨겼으며 이전엔 사용한 적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에 따르면 용의자는 23일 범행 당일 아침 무기를 챙겨 나와 이민자가 많은 파리 교외 센생드니에서 외국인을 살해하려 했지만 그곳에 사람이 적고 입고 있던 옷이 총알 장전에 불편해 일단 함께 살던 부모님댁으로 다시 돌아온 뒤 범행 목표를 인근 쿠르드족이 많이 사는 파리 10구로 바꿨다. 이후 용의자는 정오 무렵 파리 10구에 위치한 아흐메트 카야 쿠르드 문화센터에 총격을 가했다. 이 센터는 프랑스 내 쿠르드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거점 중 하나다. 센터에서 용의자는 한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에게 총격을 가했고 이후 인근 쿠르드족이 운영하는 미용실로 이동해 세 명의 남성을 향해 총을 쐈다.
검찰은 용의자가 조사 과정에서 우울함을 호소하고 공격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했다. BBC는 용의자가 쿠르드족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를 쿠르드 군사조직이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에서 이들을 죽이는 대신 포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이 공격으로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으며 부상자 중 1명은 퇴원했지만 2명은 다리에 상처를 입고 여전히 입원 중이다. 당시 미용실에 있던 부상자 중 한 명이 용의자를 진압해 추가 피해를 막았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르몽드>는 희생자 중 한 명인 에미네 카라는 프랑스 내 쿠르드 여성 운동의 수장이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쿠르드 민주위원회(CDK-F)에 따르면 그는 30년 이상 튀르키예·이라크·시리아·이란에 걸쳐 있는 쿠르드족 거주지에서 활동했고 IS와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쿠르드민주위는 이 공격이 2013년 1월9일 파리에서 쿠르드노동자당(PKK) 공동창립자인 사키네 칸시즈를 포함한 3명의 쿠르드 여성 활동가들이 살해당한지 10년이 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당시 용의자로 튀르키예(터키)인 한 명이 체포됐지만 재판 전에 사망하며 사건의 진상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쿠르드 쪽은 이 사건 배후에 튀르키예 정부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사건에 항의하며 쿠르드족 공동체 구성원들과 반인종주의 활동가들은 23~24일 파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레퓌블리크 광장을 중심으로 희생자들의 초상을 들고 행진을 벌인 이들은 총격을 방지하기 위한 프랑스 보안기관 쪽의 조치가 불충분했다고 주장했다. 시위는 대체로 평화로웠지만 일부 참여자들이 자동차와 쓰레기통에 불을 붙이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대응하기도 했다. <AP>는 쿠르드족 단체 쪽이 일부 운전자들이 튀르키예 국기를 흔든 뒤 폭력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시위대는 튀르키예에서 테러 단체로 간주하는 PKK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르몽드>는 시위 참여자들이 이 공격을 단순히 인종차별적 동기를 가진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쿠르드족 공동체는 이전에 극우 인종주의의 목표물이 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쿠르드민주위는 이 공격을 "테러"로 규정하고 개인의 일탈이 아닌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로 봤다. 매체에 따르면 25일 시리아 북부 쿠르드 거주지에서도 이번 파리 공격을 규탄하는 수백 명 규모의 시위가 일었다.
25일 이브라힘 칼린 튀르키예 대통령실 대변인은 소셜미디어(SNS)에 파리 쿠르드 시위 도중 자동차가 불타고 있는 영상을 게재하며 "이것이 프랑스의 PKK다. 당신들(프랑스인)이 지원하고 있는 시리아의 테러 조직과 같은 조직"이라며 "이제 그들이 파리의 거리를 불태우고 있다. 왜 침묵하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PKK는 테러단체로 보면서 IS와의 전투에 협력한 시리아의 쿠르드민병대(YPG)에 대해서는 별개로 간주하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훌루시 아카르 튀르키예 국방장관도 이번 파리 쿠르드 시위에서 일어난 폭력 행위는 PKK에 대한 관용의 대가라며 "프랑스가 먹이를 줘 키운 뱀이 이제 그들을 물고 있다. 이제 모두가 이 테러 조직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AP>가 보도했다. 튀르키예는 유럽 일부 국가가 쿠르드 무장조직에 너무 관대하다고 규탄해 왔으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신청에 어깃장을 놓은 주된 구실이기도 하다. 쿠르드족은 시리아·터키· 이라크·이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민족 집단으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각 국 정부와 대립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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