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좌치나루에서
나루터 안내 표지판은 낡아 있었다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가드레일 타고 오른
칡넝쿨 이파리들 흔들리고 있었다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7-1
거기, 길가, 갯골만 훤히 보이는 곳, 말뚝처럼
민간인 학살 원혼비冤魂碑 표식 하나 있었다
심원면과 동호리 바닷가로 도망하던 해리면 주민들
만돌리 바닷가로 도망치던 심원면 두어리 주민들
박격포와 기관총 소리에 놀라 무작정 바닷가로 피난 갔다
만돌리 바닷가, 용기리 좌치나루는 지상의 마지막 땅이 되었다
"한 놈당 세 방씩 쏘아라"
"산 사람은 일어나라. 천운을 타고났으니 살려 주겠다"
고함 위로 기관총을 난사하고 떡메로 내려치며 확인 살해했다
동짓날 긴긴밤 중천의 열나흘 달은 휘영청 밝았으나
주민들은 어둠 속, 죽음 속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지천의 비명이 성호를 그었다
80년대 질마재 넘어와 좌치나루 주막에 묵기도 했다는
시인 묵객들, 그들이 따라 놓은 술 한 잔으로
위로라 할 수 없는 곳,
수백 명의 원혼은 어디에서 쉬는지,
갯고랑에 장어잡이 그물만 가로질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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