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 제안한 크림 자치 공화국 및 세바스토폴 내 인권 상황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했다. 불과 한 달 전 결의안에 정치‧군사적 내용이 많아 인권결의안으로서의 성격에 논란이 있다며 기권했던 입장을 스스로 뒤집은 셈이다.
16일(이하 현지 시각)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해당 결의안은 찬성 82개국, 반대 14개국, 기권 80개국으로 채택됐다. 한국은 여기에 찬성표를 던졌다.
정부는 한 달 전인 11월 16일 제77차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해당 결의안이 올라왔을 때 기권을 택했다. 당시와 달리 이번에 찬성표를 던진 배경에 대해 정부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선 "보편적 가치와 인권을 존중하는 우리 윤석열 정부의 입장을 좀 더 선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러시아가 한겨울에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의 인프라 시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혹한을 무기 삼아 민간인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우리 입장을 좀 더 명확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우크라이나 상황 변동을 꼽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국제사회, 특히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유사입중 입장국들과의 조율을 조금 더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입장 변경에 대한 정부의 설명에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정부가 지난달 3위원회 때 해당 결의안에 기권한 이유로 "결의안이 정치·군사적 내용을 폭넓게 담고 있어 인권 결의안으로서 성격에 논란이 있다"는 점을 밝혔는데 해당 결의안과 지금 결의안이 내용적 측면에서 달라진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번 결의안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상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 악화를 입장 변경 이유로 제시하기는 직접적 상관 관계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결국 정부가 입장을 변경한 결정적 이유는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겠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로부터 결의안에 찬성하라는 요청이 있었냐는 질문에 외교부 당국자는 "'압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미국 등 우방국과 협의는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유엔에서는 각급 레벨로 접촉이 있으니 (유사입장국으로부터) 기권한 배경이 뭐냐는 질문이 있었을 수 있고 의외였다는 코멘트가 있었을 수도 있다"며 "그런데 우리가 유사입장국들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입장을 바꿨다기보다는 표결 결과를 놓고 보니 유사 입장국과 동떨어져 있는 상황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자체적인 입장 변경임을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자체적으로 입장을 변경한 것이라고 해도 외교적 문제는 남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가뜩이나 대결의 한복판에 있는 남한이 특정 국가의 입장만을 옹호할 경우 자칫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가 더 높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이 미국 또는 중국의 어느 한 편에 지나치게 경도될 경우 외교적 입지가 좁아서 이후 활동 반경이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국익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소위 '가치 외교'에 한 발짝 더 발을 내딛은 것이라고 평가하며 향후에도 이같은 기조를 이어갈 것임을 분명히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인권 자체가 정치적인 현상이고 특히 이렇게 정치‧군사적 내용이 많이 포함된 인권결의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결의안은 회색 지대가 있어서 어디서 선을 그을지가 쉬운 일은 아니라고 (3위원회 관련 브리핑에서) 답변 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이번에는 우리가 재검토를 통해 회색지대에서 한 걸음 더 내딛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번 (3위원회) 결의 때는 결의안의 내용과 형식, 인권 결의로서의 타당성과 그간의 관행 등을 감안해서 어떻게 보면 기술적인 측면을 감안해서 입장을 정한 것"이라며 "그런데 이런 표결 입장이 정부의 정책 기조에 대해 오해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가 지키려던 것보다 오히려 잃는 게 더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에 입각한 외교를 향후에도 이어갈 것이라는 기조를 내비쳤다.
정부는 이번 표결 전 러시아와 별다른 협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에 표결 전 관련 입장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없다"고 답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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