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낮 12시부터 한 시간 오십분에 걸쳐 화상회의를 통하여 서울에 와 있는 제니퍼 권 돕스(Jennifer Kwon Dobbs) 교수와 경주에 사는 채희완 사이에 탈춤에 관한 대담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고 원만한 소통을 이끌어 낸 이는 국제입양아문제에 가장 정통한 김도현 목사이다.
김도현 목사는 해외입양인과 함께하는 <뿌리의 집> 대표이며, 대학 시절에는 맹렬하게 탈춤 부흥운동(서울대 사대 민속가면극연구회, 73학번)을 벌인 바 있다. 그는 차분하게 정성들여 우리말과 영어로 두 사람 사이의 통역을 맡아주었다. 이 글은 지난 10월 31일자 대담 '길놀이와 뒤풀이가 지닌 넓고 깊은 연행적 기획 마인드'에 이은 세 번째(마지막) 글이다.
김도현: 제니퍼 권 교수의 자기 생각에 혹시 그 무당들이 박정희 독재 시대에 억압을 많이 당하고 그랬을 때에 이 사람들이 그런 억압에 관련해서 탈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요소들에 대한 배움이 있고 그래서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해보거나 그런 적이 있냐고 물었어요.
채희완: 그런 사례는 없지 않지만 드물다고 봅니다.
김도현: 근데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 한 번 필름을 구했는데 제주 4.3 사건을 굿으로 재현하는 무당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채희완: 제주에, 한 20년 전쯤일 겁니다. 제주 4.3굿이라는 명칭 으로 4월 3일날 전후해서 한 4일간 굿판을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김도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누구예요?
채희완: 제주의 신방들입니다. 그래요. 제주 신방과 말하자면 1980년대에 제주에서 마당극을 시작한 극단 <수눌음>과 <한라산>의 연행자들이 처음 그런 제주 굿판을 열었습니다.
김도현: 탈춤 훈련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요?
채희완: 아니에요.
김도현: 아니에요?
채희완: 제주도는 불우하게도 탈춤의 전승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탈춤의 원초적인 것으로 입춘굿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주도의 입춘굿은 탈춤에 원형의 하나로까지 얘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1900년대에 끊겼습니다. 그야말로 육지부에서 대학생들이 탈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입춘굿은 관심의 대상이 잘 안돼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이제 90년대로, 그 2천년대로 이제 넘어와서 제주의 신생 놀이패에서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주 4 3 굿은 사태 발생 후 50여년 세월이 지나서야 올려져
그런데 제주 4 3굿인 경우조차도 정치적인 의미보다 더 먼저 얘기될 부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해방공간 이후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죽임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제주도에 사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사건과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제주도민 전체에 죽음의식이 수행되지 못 했습니다. 돌아가신 날짜도 모르는 집안이 많고, 또 집단적으로 한동네에 제삿날이 하루로 똑같은 날인 경우도 있습니다. 집단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느 마을 단위로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의 위령굿을, 위령 제의를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하는 것이 금압돼 있었던 것이고, 하더라도 극히 소규모로 또는 남몰래 할 뿐이지 하는 것 자체가 용인이 안된 그 세월을 49년 이후 근 육십 여년 이상 지냈으니까 그 비참함은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먼저이지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가 먼저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것이 정치적인 억압이 신원과 함께 조금 풀려지는 기미가 있었으니까 제주 4.3굿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 제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깊게 서리고 서린 삶의 원한 같은 것이 풀어질 길이 없었던 거죠. 물론 제주도는 어느 지역에 비해서 민요와 굿이 지천에 깔려 있는 곳이라고 얘기합니다.딴 데에 제사 지내는 것을 거기서는 굿으로 합니다. 제사 굿으로 하기도 하죠.그리고 그런 각 개인 굿, 집안 굿 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은 1년에 한 차례 이상은 꼭 마을굿을 올립니다.거기 내용 중에 4.3과 연관된 내용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직접 당한 사람들이 사이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정치적인 이슈로까지 갈 수가 없는 지경이었 어요. 사삼이라는 사건이 있었다라는 것이 문화예술적으로 알려지 게 된 첫 계기가 4 3태를 소설의 주요내용으로 잡은 <순이 삼촌>이라고 하는 소설이 나오고 나서입니다.
김도현: 예. <순이삼촌> 소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4 3을 처음 알려줘
채희완: 현기영 선생의 소설이 나온 70년대 말 78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소설을 통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80년대 초에 아까 잠깐 언급한 제주의 마당극패 <수눌음>과 <한라산>에서 4 3과 연관돼 있는 자기 얘기를 하자니까 또 동네 얘기를 하자니까 줄기차게 그 내용이 들어와서 4 3 사태가 주요 소재가 된 것입니다.
김도현: 마지막 질문하게 되는데, 교수님 괜찮으세요?어떻게 우리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그렇게 불러 모아가지고 탈춤 운동을 시작하실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하대요
채희완: 아까 이 대담 첫머리에 탈춤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가, 했는데요.
김도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학생들을 불러 모아서 같이 공연하고 그렇게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채희완: 그게 대학에서 민속탈춤반을 차려가지고서
김도현: 그 창설을 하셨죠.
채희완: 녜. 그걸 만들면서 학생들하고, 그 학생들하고가 아니라 저희 같이 동료들하고,
김도현: 예, 예
채희완: 같이 하게 되고 졸업하고서 또 이 길로 계속 삶의 방식을, 행로를 이쪽으로 정한 사람들하고도 같이 하게 돼서. 거기서 이제 놀이패라고 하는데 놀이패 내지 극단이 구성돼가지고 이런 작업을 해왔습니다.그리고 이런 쪽에 하는 남한의 곳곳에 중소도시에 이른바 놀이패 또는 극단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전국민족극운동협 의회>라는 집단을 구성을 해가지고 88년도부터 공동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들의 구성원들은 주로 대학에서 탈춤반을 했거나 아니면 연극 반을 했거나 또 풍물반을 했거나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마당극 운동단체들의 축전, <민족극한마당>이 34회째 열려
김도현: 탈춤반, 연극반, 또 하나 뭐라고 하셨어요?
채희완: 풍물반
김도현 : 사물놀이패를 말하는 것이지요?
채희완 : 아니 아니, 사물놀이는 음악이나 악기연주에 국한된 말이고 풍물, 이를테면 농악이라고 하는 Farmers’ music & dance festival, 그런 사람들의 아마추어 조직이면서도 또 어떤 경우는 직업적으로도 하는 그런 연행패지요.서울도 여러 팀이 있습니다마는 각 지역에 분산돼서 활동을 하고 있고 그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놀이패, 연행패들입니다.이들이 1988년 이후 1년에 한 번씩 “민족극한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페스티발들을 합니다.
김도현: 언제해요? 1월달에 하세요? 아니면,
채희완: 올해 같으면은 8월 4,5,6,7일 합니다. 올해는 통영에서 하는데
김도현: 8월에, 8월이면 며칠 안남았군요.
채희완: 서울도 서울이지만은 각 지역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보통 20여 개의 작품이 올라갑니다한 사나흘간 낮시간에서 밤 늦게까지 연속으로 올립니다.
김도현: 하여튼 간에 교수님이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그리고 제가 서툰 통역했다고 고맙다고 막 그러네요.
채희완: 아니, 아니올시다. 통역이 부드러워 참 편했습니다. 그리고 안된 얘기지만 어제까지 사흘간 청주에서 합숙을 이제 막 마치고 경주에 왔습니다. 그건 지금 <민족극한마당>의 한 프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만… 모처럼 여럿이 모였길래 한 잔 한 것이 오늘 아침까지 됐는데 덜 깬 검붉은 상태서 지금 얘기하느라고 듣기에 참 불편했을 겝니다. 올해들어 내게 코로나가 지나가면서 목을, 인후를 쳐가지고 아직 목이 잠겨서 소리가 잘 안 나와요. 불확실한 발음을 해가지고 했는데, 미안하면서도 참 고맙습니다.
김도현: 목소리 괜찮아요. 너무 너무 귀한 말씀 들었는데
채희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아까 탈춤의 중심 내용이 양반과 말뚝이의 관계라고 하였는데 그걸 제대로 얘기 못한 겁니다. 우리 는 그냥 흔히 말뚝이라고만 얘기하지만 그 속을 잘 살펴보면 말뚝이적인 것도 있고 반말뚝이도 있고, 녜, 엔티 말뚝이도 있고 양반도 그렇게 표현이 돼 있어서 공격의 방식이 말뚝이와 양반만으로 단선적인 것 아니라 여러 경우들이 있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그리고 그 탈춤의 주제들이 말뚝이를 중심으로 봐왔던 시선에서 요새는 많이 이동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알할미 마당 쪽으로 많이 옮겨온다는 것이지요. 물론 말뚝이마당에서 그 시선이 완전히 옮겨 돌아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중심 시선이 이제 이동돼서 여성들이 나오고 있는 그런 대목들, 이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여성적 시각이 탈춤에서 어떤 식으로 반영되고 있는가 쪽으로 지금 시선이 옮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말뚝이 마당에서 할미광대마당으로 중심 시선이 이동 중
김도현 : 네, 우리 희완 형님도 미얄 춤 추시는 분인데요
채희완: 대학 4학년 때인가 그때부터 노장춤에서 미얄할미춤으로 옮겨보았어요. 저로서는 그게 탈춤을 보는 눈을 확대하게 되었다고 할는지.
김도현: 예. 그때 경주에 내려가면 교수님을 객원 강연자로 모셔가지고 꼭 말씀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2년 후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스케줄이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채희완: 그러세요. 오늘 반가웠고요. 덕분에 이 탈춤에 대해서 요즘 조금 멀리 생각을 했었는데 다시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시간으로 생각되고요. 오늘 제가 얘기한 걸 한번 저 스스로 좀 검토를 해봐야 되겠다 싶어서 혹시 오늘 여기에 발언한 내용이 기록이 된다면 그걸 한 벌 저한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도현: 교수님, 이메일로도 연락하고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레코드를 교수님과 저에게까지 이렇게 공유를 하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다고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마칠까요?
채희완: 네. 마치죠.
김도현·제니퍼 권: 고맙습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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