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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교사를 꿈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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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교사를 꿈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한국어 교원 투쟁이야기 ③] "엄마처럼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요"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번진 2020년 3월 이후, 하늘길이 막히고 거리두기가 강화되었습니다.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교육은 위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교원 조합원들은 계약직 38명 전원을 무기직으로 전환했고(서울대), 학교와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체결했습니다(연세대). 10년도 넘게 묵은 계약서를 새로 썼고(경희대), 부당해고에 맞서 대법원까지 갔다 복직했습니다(강원대). 엔데믹이 가까워진 2022년 10월, 한글날을 맞이하여 팬데믹 기간 한국어교원의 투쟁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꿈을 꾸다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 우연히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떤 외국 사람이 한국어로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와~ 나도 저런 일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방법도 몰랐고 그것을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 대학교 3학년 때 지도 교수님께서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을 추천해 주셨다. 그때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며 '아! 이거다! 이게 바로 내가 간절하게 원하던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때 느낀 전율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2011년 6월 여름 학기부터 현재까지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다

국제교육원에 들어온 후에는 정규 한국어 수업부터 특별 프로그램 수업까지 다양한 수업을 했다. 수업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수업을 하는 것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힐링(healing)이 된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수업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업 이외에도 행정실 직원의 업무, 새벽에 공항 가서 외국 학생 픽업하기, 학생이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서 가기, 아픈 학생 입원·퇴원 시키기 등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나는 주말에도 이런 일 때문에 학교에 나가야 했으며 때로는 업무량이 많아 새벽까지 일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느라 수업 준비를 제대로 못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행사에 동원되어 원치 않는 결강을 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수업료 이외에 업무 수당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기본적인 4대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수업료 이외의 업무 수당은 받아 본 적 없으면서도 그저 묵묵히 수업을 하고 '일'을 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어 교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심지어 근로 계약서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좋아지겠지'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인 한국어 수업을 하고 '일'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진심과 달랐다. 나는 결혼을 하고 2018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입소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에 경희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너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동안 주변에서 듣기만 했던 일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급여를 받고 있지만 정작 학교는 한국어 교사를 경희대학교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유령' 같은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후 마이크를 들다

경희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사람들! 나는 이런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나의 존재를, 한국어 교사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후 여러 가지 새로운 일을 했다. 2019년 3월에는 처음으로 마이크를 들고 조합원들 앞에서 투쟁사를 발표했다. 투쟁사를 발표할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긴장도 많이 했고 투쟁사를 읽으며 눈물도 흘렸다. 그러한 나를 보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응원해 주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끝까지 해 낼 수 있었다. 나는 광화문에 가서도 마이크를 들었다. 기자 회견 장소에서 마이크를 들고 한국어 교원의 '고용 안정 및 신분 보장'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동료들과 함께 계속 투쟁했고 그 결과 몇 번의 노사 협의를 거쳐 2020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4대 보험에 가입됐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학교는 누구에게는 4대 보험, 누구에게는 3대 보험, 누구에게는 2대 보험을 적용하는 정말 어이없는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경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지만 건강이나 출산 문제로 휴직 중인 사람은 현재 강의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시켜 버렸다. 또 우리의 신분을 '교원 기타'로 규정해서 현재까지도 경희대학교의 한국어 교사는 교원도 아니고 직원도 아니다. 그저 '기타'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한국어 교사의 근무 시작일은 4대 보험 가입 날짜와 같은 2020년 5월 1일이 되었다.

4대 보험에 가입된 후에도 우리의 투쟁은 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우리는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약서 작성을 위해 계속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총장은 그것을 계속 반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전히 고용과 신분이 불안했던 우리는 계속 투쟁을 했고 결국 2021년 12월이 되어서야 근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누구는 경희대학교의 한국어 교사가 된 지 10년 만이었고 누구는 20년 만이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지는 3년 만이었다.

근로 계약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계약서에는 여러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중 하나가 강사료 지급에 대한 것인데 우리의 계약서에는 '등급에 따라 정해진 개별 강사료'를 지급한다는 문구가 있다. 사실 이 계약서 문구는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원래도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은 한국어 교사의 수업 연차와 담당 시수에 따라 개별 강사료를 지급해 왔다. 그러나 2014년 즈음부터는 학교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며 제대로 된 강사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수업한 시수만큼 온전한 강사료를 지급하는 대신 상한선을 두고 삭감하는 일을 자행한 것이다. 또한 규정에도 없던 '기본 수업 시수'를 사실상 정해 놓고 추가 수업을 배정받으려면 여러 가지 행정 업무를 수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연히 이 모든 일에는 한국어 교사들의 동의나 양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다행히 삭감된 개별 강사료는 원상회복할 수 있었지만 행정 업무를 조건으로 하는 추가 수업 배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균등한 수업 배분과 정당한 업무 수당 지급을 요구했으나 한 번 굳어진 것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대신 우리는 '기본급'이라는 것을 책정했다. 이는 한국어 교사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우리는 수업이 없는 방학에는 급여가 전혀 없었는데 이뿐 아니라 학기 중에도 교사의 귀책 사유가 아님에도 여러 이유로 갑자기 수업이 없어져서 강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또 불행히도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전세계를 덮쳐 한국어 교사들의 상황도 더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우리에겐 기본적인 보호 장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경희대학교가 한국어 교사에게 매월 보장해야 하는 기본 급여'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2021년 12월에 근로 계약서를 쓰고 나서도 나는 기본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해 겨울 학기에 나는 정규 학기 수업이 아닌 특별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기간 중에 프로그램을 의뢰한 외부 기관의 요청으로 몇 번 한국어 수업이 휴강된 적 있었다. 그때 나는 개인 사정상 추가 수업은 받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기본 강의 시수조차 채우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기본급 중 상당 부분이 지급되지 않았다. 분명 노사 협의로 기본급 체계를 정했던 당시에는 앞서 언급한 '기본급'의 의미에 학교도 동의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로 인한 휴강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피해는 내가, 우리가 입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로 노사 회의가 다시 열렸고 우리는 협의 내용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의 협의 내용과 의미를 상기시켜도 학교는 계속해서 모르쇠로 일관하며 근로 계약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결국 추가 수업을 배정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었다. 학교는 끝내 노사 협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또 다른 한국어 교사들은 그마저도 제외됐다.

노사 협의를 하고, 4대 보험에 가입되고, 근로 계약서를 쓰면 한국어 교사의 존재를 인정받아 고용이 안정되고 신분이 보장될 거라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협의한 내용은 지켜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었고 끝이 아니었다. 학교는 여전히 우리를 대화 상대로도 여기지 않고 있고 변함없이 우리는 유령이다. 내가 느끼는 상실감, 비참함, 허무함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한글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내 아이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경희대학교에서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와~ 정말 멋진 일을 하시네요. 대단한 일을 하시네요. 보람된 일을 하시네요."

"요즘 K-POP, 한류 등으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외국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 핫한 일을 하시는군요."

모두 맞는 말이다. 한국어 교사인 나는 정말 멋진 일을 하고 있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고,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핫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저는 커서 엄마처럼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요."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꿈이었기에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어 교사가 됐고 수업을 하면 힐링이 될 정도로 이 직업을, 일을 사랑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도저히 한국어 교사를 꿈꾸라고 말할 수가 없다. 최소한의 생활과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어 교사를 꿈꾸라고 말할 수가 없다.

투쟁은, 노동 운동은 정말 힘들다. 어떨 때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잠 한숨 못 자고 끙끙 앓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발언을 잘못해서 혹여나 우리의 요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긴장돼서 마이크를 들기 전에 몇 번이고 연습해야 했다. 그래서 투쟁사를 한 번 읽고 나면 목이 너무 아파서 침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고 결국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어 교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당연하게 보장받고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에게 한국어 교사를 꿈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오늘도 투쟁하고 앞으로도 계속 투쟁할 것이다. 투쟁! 투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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