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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협정이 '담대한 기획'의 출발점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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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협정이 '담대한 기획'의 출발점 돼야  

[논단] 평화협정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 ④

다음 글은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부산광역시 공동 주최로 26-27일 부산에서 열린 제 18회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주제 : 한반도평화, 신냉전과 패권경쟁을 넘어)에서 발표된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논문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의 마지막 부분이다. 편집자

6. 동아시아 사회들의 연결된 운명과 세 가지 선택

(1) 하나로 엮이고 수렴되는 동아시아 사회들의 운명 

어떤 지역질서에서든 그것을 구성하는 사회들은 지리적 가까움과 경제적 상호의존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속성이 제3국면을 맞으며 심화된 오늘의 동아시아 사회들은 두 가지 추가적인 의미에서 공동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을 하나의 운명으로 묶는 메커니즘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분단 기축과 소분단체제들이 상호유지적인 상호작용 패턴 속에 함께 갇혀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수천 년간 동아시아 문명과 역사의 중심이었으며 지금 다시 가장 크고 강력한 사회로 부상한 중국 대륙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다른 사회들이 미국을 정점에 둔 수직적 동맹관계에 자승자박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로써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같은 개념을 매개로 한 지점의 군사적 긴장이 쉽게 지역의 다른 사회들로 확장될 것도 보장되고 있다.

현 국면에서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와 소분단체제들의 긴장의 동시적인 심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미국이다. 그 구체적인 상징은 이른바 '칩4동맹'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중국 경제봉쇄를 의도한 동아시아 내부의 경제블럭화를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표상한다. 유럽도 중국과 반도체 부문에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참여 강요 대상에서 유럽은 면제시킨 가운데, 일본, 대만,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의 동맹국들만을 하나로 묶고, 이들로 하여금 반도체 부문에서 중국과의 무역과 협력을 차단하려 하고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고착화 기획의 완결판'이 될 수 있다.

(2) 세 가지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가깝고 먼 미래에 어떤 동아시아를 살아갈 것인가에 관해서, 동아시아 사회들과 미국 앞에는 세 가지 선택이 놓여있다.

제1의 가장 쉬운 선택은 기존의 양극적 군사동맹체제에 편승하면서 군비경쟁과 저마다의 경제적 신중상주의에 몰두하는 것이다. 미일동맹은 한국, 타이완, 필리핀, 그리고 인도네시아, 호주 등과 반중국 군사연합을 더욱 강화하고, 중국은 러시아와 유라시아대륙연합을 지속하면서,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을 적절한 수준에서 뒷받침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남한은 북한 핵무기에 대해 미국의 핵확장억제로 대응한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담대한 구상'을 말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신들이 먼저 믿지 않는다. 타이완해협의 양안 관계도 언제든 군사충돌의 위험을 안고 간다. 이 선택은 일본, 한국, 타이완이 미국과의 동맹이 제공할 군사안보의 장기지속과 경제안보 공급망의 유익을 신뢰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제2의 선택은 특히 일본과 한국이 한편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핵무장 까지를 포함하는 질적인 무장 확대를 적극 추구하는 시나리오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협상하고 바이든 행정부가 실행에 옮긴 아프가니스탄 프로젝트의 폐기, 동맹의 경제적 비용을 과도하게 동맹국들에 전가하려 했던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의 역시 과도해 보이는 신중상주의는 동아시아 사회들에서 동맹의 군사적•경제적 유익과 그 안정성에 대해 과거보다 더 큰 의문을 낳을 수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미국의 커미트먼트에 대한 의문이 증대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미국 사회 안에서 자유무역을 포함한 세계화에 거부감이 커짐에 따라 공화 민주 양당이 다 같이 아시아 국가들과의 추가적인 자유무역협정에 더 소극적으로 된 것도 그런 의문을 보태고 있다고 했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과 현저하게 대비된다는 것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최근 미국 행정부들이 중국 문제를 "과도하게 군사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 배경을 중국의 팽창하는 경제력에 대응하는 담대한 경제적 구상을 미국이 제시할 능력과 의지가 결여된 데에서 찾았다. 군사적인 차원에서도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커미트먼트는 실제는 정체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미국의 억지력의 신뢰성에 대해 지역 동맹국들이 제기하는 의문은 합리적이라고 평했다.1)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일본과 한국의 선택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되, 핵무장을 포함해 자신들의 군사력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1의 선택보다 더 나쁜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제3의 선택이 남아 있다. 일본, 한국,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에서 대안의 동아시아를 함께 꿈꾸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며 비전을 가꾸는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의 동반자나 하수인이나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위한 동아시아 공동지성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 사회들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일정하게 유지하되, 그것을 동아시아 평화라는 가장 우선하는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공동안보의 장치들을 개발하는 노력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이 동맹의 전초기지나 뒷바퀴에 머물지 않고 동맹체제의 뇌수로서, 그 앞바퀴의 하나로서 동맹의 방향과 정책을 조율하는 더 지혜롭고 능동적인 지정학적 비전을 가꿔야 함을 뜻한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축으로서 군비경쟁과 신중상주의를 앞세운 패권경쟁의 관성에 가속도를 붙일 것이다. 그로 인해 더욱 평화가 위태로워지는 곳들은 소분단체제로 존재하는 한반도와 타이완해협이다. 그럴수록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극복의 몸부림은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가장 절실하다.

이 숙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의 구성, 그리고 타이완 양안관계의 평화체제 구성이다. 타이완의 경우, 2000년 집권한 천수이벤(陳水扁) 총통 시절 타이완 푸젠성과 중국 본토 푸젠성 사이에 항공·우편·해운을 자유화한 이른바 '소삼통'(小三通)이 이루어졌고, 2008년 집권한 마잉주(馬英九) 총통 때 그것을 타이완과 중국 본토로 확대한 '대삼통'(大三通)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양안관계는 아직 이산가족 만남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와는 차원이 달라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완해협의 군사적 긴장은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긴장과 맞물려 끊임없이 재연되어왔다. 일정한 평화체제 제도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마잉주 정권 시절에 '비통일, 비독립, 비무력'을 3원칙으로 하는 평화협정 방안이 양안 사이에 일시적으로 논의되었다. 마잉주의 평화협정 구상은 집권 전인 2005년부터 제기되었다. 그 해 12월 마잉주는 “대만이 독립노선을 취하지 않고 중국대륙 역시 대만에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양안간 평화협정이 체결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외교부 자료, 2006.1.2). 마잉주 집권 후 국민당 우보슝(吳伯雄) 주석은 2009년 5월 25일 베이징을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후진타오는 양안경제협력 협상과 함께 양안간 적대상황을 종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언급했다(외교부 다자통상국 자료, 2009.6.8). 그러나 마잉주의 국민당 정권도 2012년 총통 재선을 앞두고 타이완 내부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비독립을 전제로 하는 평화협정 문제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게 되었다. 2016년 타이완 독립을 주창하는 민진당이 다시 집권했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2020년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한다. 2019년 여름부터 고조된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와 그후 강력해진 중국의 홍콩 민주파 억압이 중요한 배경이었다. 2020년 1월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은 이미 독립국가이므로 독립선언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2) 베이징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타이완 국민은 홍콩 민주주의의 소멸을 통해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운명을 목도했다. 타이완 민중은 동아시아의 양극적 군사동맹체제 강화 쪽에 편승하는 제1의 선택만 남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타이완은 더 나아가 독자 핵무장이라는 제2의 선택까지도 정중동으로, 즉 이스라엘처럼 '핵실험 없는 핵무장'의 길을 꿈꿀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게도 난감한 일일 뿐 아니라, 중국 정부의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선택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결국 타이완 정부는 국민당이든 민진당이든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일정한 평화체제 구성에 나서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양안관계에서 평화협정이 다시 거론되려면 많은 세월이 더 필요할 것이다.

(3) 동아시아 제3의 선택의 열쇠: 한반도 평화체제에서 평화협정의 의미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질곡을 풀어낼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마리는 한반도의 평화체제 모색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소분단체제 극복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에서의 변화도 이끌어내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양극적 동맹체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일정한 공동안보의 장치를 구성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타이완해협에도 영향을 미쳐서 양안관계의 평화체제 모색을 촉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극복의 첫 단추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이라는 숙제를 푸는 것이다. 현재 한반도의 현실은 평화체제는 고사하고 한미동맹의 선제타격론과 참수작전론, 핵확장억제 강화가 북한의 핵사용 문턱을 낮춘 5대 원칙을 이끌어내며 세계 어느 지역보다 핵전쟁 위험이 현실화되어 있는 상태이다.3) 우크라이나는 푸틴에 의한 전술핵 사용이 실행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서방과의 핵교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이와 달리 한반도는 어느 일방의 핵사용은 거의 반드시 쌍방의 핵교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수도권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는 문명적 삶이 불가능한 초토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진정 담대한 기획"의 열쇠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의 실마리는 문재인 정부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냈으면서도 왜 평화체제 구성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했는가를 돌이켜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그 원인은 물론 문재인 정부의 한계만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이 함께 책임이 있으므로 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들라면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갇혀 있던 평화체제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다. 평화체제 구성 과정에서 평화협정이 갖는 의미와 역할에 대한 기본 개념이 그것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협정은 평화체제의 맨 마지막 단계에 성립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른바 '평화 프로세스'의 맨 앞, 즉 입구에 종전선언을 놓고, 평화협정은 그 프로세스의 맨 마지막에 위치시켰다. 이 개념은 왜 문제가 되는가. 세계사에서 평화협정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후처리 문서이자 과거사 정리문건이다. 다른 하나는 새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공동행동의 목표와 일정을 규정하는 미래지향적 계약 문서이다. 1951년 9월 미국이 일본과 맺은 샌프란시스코조약이나 1973년 1월 미국이 북베트남과 맺은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처럼 어떤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한 평화협정은 전쟁의 결과 이미 바뀌어진 새로운 질서를 문서로 정리하는 것이므로, 전후처리 문서에 불과하다. 전후의 새로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으로, 평화과정의 출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협정은 현재에 없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자는 문서이다. 핵무기와 핵전쟁 위협으로 고통받는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새 질서의 청사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화협정은 평화과정의 입구로서의 위치가 주어져야 한다. 평화체제 구축과 평화협정의 관계는 이를테면 큰 건물을 지을 때 건축설계도에 대한 시행사와 시공사, 그리고 감리회사 간에 합의된 설계도와 실제 건축된 집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북한이 비핵화를 실질적으로 진행한 이후라면 사실상 평화구축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그 때 가서야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말하는 것은, 집을 완성한 다음에 집 설계도에 대해서 관계자들이 합의하겠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건축이 다 된 다음에 설계도를 그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도 학자도 대통령도 '평화협정은 북한 비핵화 완료 이후의 일“이라고 말해왔다.

핵무장을 이미 완성한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안심하고 진행시켜도 좋다고 느낄만한 안전보장 신뢰장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 안전보장은 북미간 외교관계 정상화를 포함한다. 그 약속을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진 장치, 즉 미 상원의 비준을 거쳐 미국 양대 정당의 초당적 동의를 받는 평화조약의 형태로 확보할 때만 북한은 그 약속을 신뢰하고 핵무장 해체를 실질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지 않는 한 북한 비핵화의 전망은 제로이다. 그 조약은 말할 것도 없이 북미 외교관계정상화 및 경제제재 해제를 북한의 비핵화 일정과 연계하여 단계적으로 진행할 것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 실행의 일정표를 법제화한 것이 평화조약 내지 평화협정이다.

그러므로 북한 비핵화를 위한 평화조약은 실질적 평화체제 구성의 말단에 위치한 출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 구성의 첫 단추이자 입구이다. 평화협정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종전선언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이다. 종전선언이 평화협정을 대신할 수 없다. 더욱이 종전선언이 평화협정을 평화과정의 맨 끝으로 밀어내는 명분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2018년 4-6월 시점에서는 평화협정 협상 본격화가 북한에게 핵무장 유지라는 기존의 생존전략을 대신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매력적 대안으로서 존재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6.12 싱가포르 선언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부터 시작하여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실패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부가 주도하고 한국정부가 뒤따르면서 전개된 '진정한 평화협정 개념'의 실종과 혼란 상태를 겪으면서, 북한이 생각한 평화협정체제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이제는 북한에게는 남측이 설령 입구로서의 평화협정 협상을 내건다 해도 한국 내부의 남남갈등 상황과 미국에서의 그 협정의 현실적 가능성을 깊이 회의하면서 계산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평화협정 제안마저도 이제는 북한에게 핵무장 강화라는 기존의 생존전략에 대한 대안으로서 갖는 현실성과 매력은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4) 2022년 가을, 우크라이나에서 전황이 러시아에 불리해지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미국과 러시아가 앞다투어 저용량 전술핵무기 개발경쟁을 벌여온 결과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핵사용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일”이 결코 아니며 그 문턱이 대폭 낮춰져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더욱 경직되어가면서 북한의 비공식적 핵보유국 지위는 갈수록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그 핵무력과 핵사용 가능성은 한미동맹의 선제타격론의 고성(鼓聲)과 함께 더욱 팽창하고 있다.

우리에게 놓인 선택은 이 상황을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방향을 전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전환을 위해 우리는 어떤 비전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새삼 돌이켜보는 일이다. 그 한 요건이 평화협정체제 전환을 위한 우리 사유의 허점을 살펴보는 일이라고 믿는다. 한국의 정부와 학계와 시민사회는 평화체제 구축의 입구로서의 평화협정을 사유하고, 그 현실성을 높이기 위한 비전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고정관념을 벗어나 평화협정의 내용과 수준에 대한 창의적인 구상들을 찾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평화협정에서 다루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평양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그 점을 공유했다고 했고, 그에 앞서 김정일이 2000년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 발언에 비추어볼 때,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평화협정과 비핵화의 절대 조건으로 삼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5)

평화협정 협상에서 큰 이슈로 떠오를 것에는 남북간 군비통제 문제가 있고, 그것은 거의 합의 불가능한 문제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창의적으로 다양한 방식의 평화협정을 모색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평화협정을 1단계 협정과 2단계 협정으로 나누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화협정을 북한 비핵화가 진행된 뒤에서나 작성할 문서 정도로 생각하고 뒤로 미루어놓으면 평화협정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어진다. 창의적인 모색도 필요가 없다. 왜냐면 그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평화협정 협상을 비핵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입구이자 평화과정의 초석이라고 그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나면, 그래서 정부 인력과 학계가 그런 개념을 받아들여 함께 나서 진력한다면 해법을 찾을 가능성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그렇게 성사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대분단체제의 질곡을 넘어선 동아시아 질서의 초석이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남북한과 함께 미국과 중국이 당사자로서 참여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그 성립 자체가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첫 단추가 된다. 그 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타이완해협까지를 하나로 묶어 이들 지역에서 어떤 세력도 핵무기의 사용, 배치, 개발의 금지를 규범화하는 '비핵무기지대'를 건설하는 것이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다음 숙제이자 실현가능한 목표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일본과 한국의 평화운동 일각에서 논의해온 '일본열도와 한반도에 국한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를 타이완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비핵무기지대'로 확장하는 개념이다.6) 한반도에 평화협정체제가 성립하면, 타이완해협에서도 양안간에 평화체제의 제도화 논의가 떠오를 비상하게 유리한 환경이 될 것이다. 그 일환으로 타이완이 포함된 동아시아 비핵무기지대의 논의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안의 동아시아를 그려본다.

동아시아의 안보 지형에 그처럼 공동안보의 실마리들이 성립하는 것이야말로 북한 전체주의의 강화나 중국 사회의 전체주의로의 회귀도 근본적으로 막아낼 동아시아 인간안보의 단초가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전쟁의 위협과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서로 지탱하며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1) Edward Wong and Damien Cave, “U.S. Seeks to Reassure Asian Allies as China’s Military Grows Bolder,” The New York Times, August 5, 2022.

2) 김진방, 「차이잉원 "대만 이미 독립국가…독립선언 불필요"…中 강력반발」, 『연합뉴스』, 2020.1.15.

3) 2017년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선제타격을 거론하고,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 참수부대’를 공개했다. 필자는 선제타격과 참수작전은 실행될 수도, 실행되어서도 안 되는 잠꼬대일뿐 아니라, 무엇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사용 문턱을 대폭 낮추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었다(이삼성, 2018, pp.85-131). 윤석열 정부의 선제타격론 강화로 그 우려가 북한 핵사용 5원칙 법제화로 앞당겨 현실화했다.

4) 김정은은 2022년 10월 10일 “적과의 대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핵전투무력 백방 강화”를 재차 선언했다.

5)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2』, 삼인, 2010, p.290.

6) 일본 평화운동계가 논의해온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는 미국 핵우산의 해체를 전제한다. 사실상 미일동맹, 한미동맹의 해체도 전제하는 것에 가깝다. 필자가 수정하여 생각하는 ‘동아시아 비핵무기지대’는 비핵지대 구성에도 불구하고 중국 혹은 러시아가 한반도나 일본에 대해 핵위협을 하거나 핵사용을 할 경우 그 위반국에 대해 미국이 동맹에 근거해 핵보복을 할 수 있는 국제법적 가능성을 허용하는 내용이다. 동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구성과정에서 군사동맹 해체를 전제로 하면 그 실현가능성은 거의 제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기존의 군사동맹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함으로써 그러한 공동안보의 실현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포함한 공동안보가 현실성을 띠게 될 때, 비로소 동아시아 사회들은 미국과의 동맹과 핵우산에 대한 의존성을 줄여나갈 공간도 열릴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2018), 제15장의 8절 「동북아 비핵지대를 군사동맹 문제와 분리할 필요성」, pp.84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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