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국, 세계화 반대로 돌아서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국, 세계화 반대로 돌아서다

[논단]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우크라이나전쟁 ②

다음 글은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부산광역시 공동 주최로 26-27일 부산에서 열린 제 18회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주제 : 한반도평화, 신냉전과 패권경쟁을 넘어)에서 발표된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논문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의 두 번째 부분이다. 편집자

3. 탈냉전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제1국면과 제2국면

2000년대 들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국제정치학계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 중국 사이에 경제적 상호의존이 발전해왔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했다. 필자는 그 관념의 안이함과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다. 어떻게든 이 지역에 공동안보의 질서를 구성해내기 위해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경제적 상호의존은 "군사안보적 대분단체제의 그늘"에 언제든 덮여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필자는 지적했었다(2006, p.78).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해 '경제적 현실주의'의 시각을 취한다.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가 지적했듯이 경제적 상호의존은 때로 국가들 사이의 평화공존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파괴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점을 주목한다: "국가들이 군비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권력집단과 대중은 모두 (경제적 상호의존 때문에)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착시에 빠진다. 그래서 군비통제를 위한 노력은 뒷전이 된다.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양극화된 군사동맹과 군비경쟁에 몰두하면서도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막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의 동아시아 질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2016, p.168).

탈냉전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양상은 크게 세 국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국면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이다. 이 시기엔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서방이 중국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중국을 통제하면서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시장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식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내포한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2001년 부시행정부의 출범에 기여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대외정책 어젠다는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한다는 목표를 포함했다.1) 그러나 9.11로 말미암아 미국의 우선순위는 이슬람 세계를 향한 '대테러전쟁'으로 옮아갔다. 이 기간에 중국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일부로 발전하면서 경제적으로 서방의 예상을 뛰어넘은 부강을 이룩했다.

동시에 미국은 같은 시기에 중국에게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 현대화의 명분을 제공했다. 2002년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탄도미사일방어제한협정(ABM Treaty)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미사일방어망 구축을 본격 추진했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자신이 경고한대로 핵무기체계와 해군력을 현대화하고 다변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아울러 중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라는 이름의 유라시아대륙연합(a Eurasian continental coalition)이 공식 출범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2국면은 2010년대 초반에 미국이 동아태지역에서 자신의 해상패권이 위기에 처했음을 인식하면서 시작된다.2) 이 무렵 미국은 이슬람세계에 대한 대테러전쟁을 일단락지었다. 이제 '아시아 재균형'을 앞세운다. 미일동맹이 누리던 동아태 해상패권이 위기에 처하는 수준으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하면서, 미일동맹이 중국 견제를 대외정책 우선순위에 올린다. 이 시기에 센카쿠(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간의 충돌과 남중국해에서 미중간의 긴장이 본격화했다. 미일동맹과 중국의 긴장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도 맞물려 전개되었다. 한미동맹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공식화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기체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11년 말 사망한 김정일을 이어 등장한 김정은 정권은 대분단체제 전반에서 커지는 긴장을 등에 업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매진했다. 미중 긴장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이 마침내 핵무장을 완성한 것은 2017년이었다. 수폭실험과 함께 일본과 괌의 미 군사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IRBM과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ICBM 시험발사도 성공했다.

유라시아대륙 한복판에서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신냉전 조짐이 대두한 것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2국면과 일치한다.3) EU와 NATO로 집약되는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은 과거의 냉전과 다른 세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소련 붕괴 이후 유라시아 대륙으로 영역을 넓혀간 서방의 '확장주의'가 푸틴 체제하의 러시아 내부에서 성장해온 내셔널리즘과 충돌하면서 발전하는 긴장이다. 둘째, 푸틴 체제하의 러시아에서 권위주의와 과두정이 강화되면서, 러시아와 서방 사이 지정학적 중간지대에 속한 사회들에서 서양과의 통합을 원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서 권위주의-민주주의의 대립이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차원의 긴장 축으로 재충전된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도 그것이 중요한 긴장 축으로 부상했다. 러시아 사회의 권위주의적 속성은 지정학적 중간지대 사회들의 친서방 지향을 강화시키면서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킨다. 그것이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지정학적-군사적 긴장으로 전환되는 양상이다. 셋째, 냉전기에는 동아시아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긴장을 기축으로 하는 대분단체제가 미소 냉전이라는 더 큰 맥락의 글로벌한 긴장 구조를 배경으로 했다. 반면에 2010년대에 표면화된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 심화와 맞물려 그것에 의존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서방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과 도전은 2010년대에 들어 활성화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 심화라는 맥락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상하이협력기구로 표상되는 유라시아대륙연합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만 2014년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대담한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대외정책이 시진핑 체제 출범과 함께 '일대일로'(一带一路: The Belt and Road Initiative)를 통해 글로벌한 차원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2국면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일대일로는 중국 서부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의 자원에 대한 경제적•지정학적 접근권을 추구한다. 이후 미일동맹의 인도-태평양전략, 그리고 NATO의 유라시아 확장 전략이 중국의 일대일로와 각축하며 긴장을 높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4. 2010년대 말 이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3국면과 러시아-서방의 신냉전

(1) 미국·중국의 신중상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 흐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제3국면에 접어든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201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제2국면까지의 대분단체제에서 미국의 중국 견제는 군사안보적인 지정학적 성격이 강했다. 제3국면에서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 개념이 안고 있던 지경학적(geoeconomic) 차원이 표면화하면서 '통합과 상생'에서 '봉쇄'로 옮아간 것이다. 중국의 군사적 도전과 세계적 영향력 확대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성장을 제한하고자 하는 경제봉쇄(economic containment)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경제의 첨단화와 고속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관세장벽과 첨단기술 이전 봉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더 확장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경제봉쇄는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주목하였고 20세기에 들어서는 레닌과 길핀이 주목한 '패권자와 도전자의 불균등 발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반영한다. 보다 최근에 그래함 앨리슨은 그것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정식화한 바 있다.4)

그러한 두려움이 특히 2010년대 말의 시점에서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로 노골화한 배경에 관해서, 필자는 세계 자본주의경제 안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중국의 경제관계와 그 결과 미국 정치 안에서 성장한 '반세계화 포퓰리즘'을 주목한다. 그간 미국과 유럽은 WTO체제하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세계자본주의경제에 통합하여,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활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몰두했다. 중국의 값싼 공산품과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에 의존하여 선진자본주의 사회들은 마이너스 초저금리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조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세계의 공장으로 변모한 중국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안의 '불균등 발전'의 주체가 되었고, 마침내 미일동맹의 동아태 해상패권에 도전할 힘을 길렀다. 러시아는 냉전기에 확보한 핵무기 초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소연방 붕괴 후의 경제적 혼란에서 벗어났다. 이 세계화 구조 속에서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은 공동화했다.

미국 자본주의에서 부의 생산은 지식집약적 부문과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이 주로 담당하고, 최하층 3D 산업은 불법이민자들이 대신하면서, 중하층 중산계급의 일자리는 크게 줄었다. 지식집약적 산업에서 소외된 중하층 노동자들의 설자리는 갈수록 좁아졌다. 이들은 세계화와 국제주의와 그것이 내포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들에 깊은 반감을 축적해왔다. 미국의 경제사회적 양극화의 배경이다. '세계화'가 내포한 국제주의, 자유무역, 다문화주의, 사회적 자유주의를 둘러싸고, 지난 수십 년간 세계화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반감을 가진 중하층 백인들을 포함한 노동계층이 1930년대 이래의 미국 뉴딜연합으로부터 이탈한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2018년을 전후해 미국과 유럽에서 중간파를 포함한 대중들이 자유주의적 가치에 더 적대적으로 되면서 권위주의적 정치가들을 더 지지하는 흐름이 포착되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5)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내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마침내 2020년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폭력적으로 부정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뒤집는 쿠데타를 음모한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6) 미 공화당은 그 전체가 트럼프주의의 포로가 되었다.7) 트럼프주의는 부유층의 과두정 지향과 중하층 백인사회의 인종주의와 반세계화 포퓰리즘의 연합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노동계층의 지지에 의존하는 민주당도 중하층 노동자층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요구에 민감해진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거스를 수 없는 미국정치의 추세로 되었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으로 표상되는 미국 정치 내부의 반자유주의적 경향과 포용성의 약화가 대외 경제정책에서 개방성의 후퇴와 동시적이라는 점 역시 시사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백인 중하층 노동계급의 반세계화 정서를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한 중국에 대한 반감과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혐오로 연결시키는 '반이민 포퓰리즘'(anti-immigrant populism)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8) 민주당과 바이든은 이 트럼프주의의 정치사회적 기반이 증명한 힘 앞에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노동계층의 반세계화 성향에 적응하려 한다. '반이민'에서 일부 후퇴하되, 트럼프보다 더 광범한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중심주의적 대외경제정책을 선택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유럽을 포함한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안보적 공약을 혼란에 빠뜨렸다면, 바이든의 미국 중심주의는 군사안보동맹은 존중하고 활용하되, 동맹의 경제적 차원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었다.

바이든의 반세계화는 중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유럽의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무역장벽을 들이대는 더 편협한 보호무역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 경향은 '반도체도, 배터리도, 바이오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들 산업에 대한 산업보조금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주요 산업의 국적(國籍) 회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리쇼어링'(Reshoring)이란 명패를 단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이 신중상주의적 흐름은 반드시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중국의 산업정책은 내재적으로 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국도 정부가 앞장서서 중국을 닮아가는 모습이다.

이 상황은 1930년대에 세계 열강들이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면서 신중상주의적 정책을 본격화했던 것과도 유사하다.9) 당시 독일은 중동부 유럽 국가들과의 경제블럭화와 함께 산업의 국내화를 추진했다. 일본도 동아시아에서 만주국 건설 등 경제블럭화를 추구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사실 1930년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안이었다.10) 2020년대의 세계, 특히 동아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군사안보적인 양극적 동맹체제화에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930년대의 보호무역주의와 '산업의 국내화(國內化)'가 동시에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미국의 경제적인 대중국 관세장벽 구축은 미국이 중국의 각종 규제에 의한 비관세장벽과 지적 재산권 약탈 등을 명분으로 삼으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 차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미국은 숨기지 않는다. 중국 역시 각종 규제에 의한 비관세장벽과 민중 차원의 '애국소비'가 자유무역을 제한한다. 두 나라의 신중상주의는 상호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자유무역에 의존해 성장해온 한국과 타이완 같은 나라에 구조적 장벽이다.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적 교류협력을 유지해야만 경제성장의 지속도 평화 관리도 가능한 한국과 타이완 모두에게 미국의 대중국 경제봉쇄와 보호무역주의는 경제, 군사외교 양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3국면에서 미국정치가 '반세계화 포퓰리즘'에 지배되기에 이르렀다면, 같은 시기 중국 정치는 권위주의 강화의 길을 걸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 중국의 정치적 변화의 중요한 요소는 집단지도체제 구축과 최고 지도자의 3연임 금지였다. 2018년 중국 공산당은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이 가능하도록 연임제한을 폐지했다. 올해 가을엔 시진핑이 3연임을 달성할 것이다. 미국 정치가 반세계화 포퓰리즘의 포로가 될수록, 그리고 중국 정치가 권위주의적 경직성을 강화할수록,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과 경직성은 더 견고해진다. 미일동맹과 중국의 긴장은 한반도와 타이완해협의 긴장 완화도 어렵게 한다.

(2) 러시아-서방의 신냉전과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만남과 공생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전방위적인 침략행위가 전개되었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무기 지원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로 대응하면서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이 본격 국면에 들어섰다. 본격적인 신냉전의 계기가 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 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미국의 세계적 역할의 후퇴 추세이다. 이 추세의 극적인 표상은 2021년 8월 30일 카불공항에서 벌어진 미군 최종 철수작전의 혼란상이었다.11) 미국은 2조 달러의 비용, 그리고 4만7천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포함한 17만 명의 인명 희생을 기록한 채, 탈레반 축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축출당했다.12)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전쟁 20년, 그것이 부른 아프간인들의 희생에 대한 유일한 도덕적 정당화는 사실상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혼란스런 퇴장과 함께 그 명분도 무너졌다. 이러한 미국의 패주는 불과 몇 년 전 성공으로 끝난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개입과 비교되었다. 미국도 2013년 이래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반정부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2017년 3월 시리아에서 더 이상 아사드 정권의 축출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여기서도 미국은 실패했고, 아사드 정권을 지지한 러시아는 성공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NATO 회원국들을 포함한 동맹국들에게 과도한 비용분담을 요구해 빚어진 미국의 신뢰성 악화,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 더 강화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도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의 약화와 맥이 닿는다.

둘째,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자신감이었다. 에너지 수출로 재정 능력이 확대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초음속무기 개발 등 군비 현대화에 성공했다. 2015년 달러로 환산했을 때, 러시아연방(Russian Federation)의 GDP는 1990년 1.16조 달러에서 매년 추락을 거듭해 1998년 최저점인 6,668억 달러로 축소되었었다. 1999년 이후 꾸준한 성장을 보이면서 2008년 1.3조 달러가 되었다. 금융위기 때인 2009년 1.2조 달러로 잠시 줄었다. 2010년부터 성장세를 회복하면서 2021년 1.49조 달러를 기록했다.13)

셋째, 제3국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긴장 심화라는 지정학적 조건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전면적인 영토적 침략은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어온 대분단체제의 긴장 악화를 등에 업고 전개된 사태이다. 중국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방과 평화공존하면서 공유하는 이익이 많을 경우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중국은 동참할 것이다. 러시아는 정치군사적 고립과 경제적 파국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우호관계 없이는 혼자 버틸 수 있는 경제력이 안 된다.14) 현재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버티는 힘은 애당초 유럽에 갈 몫의 에너지 자원들까지 중국과 인도에 수출하여 수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하기 직전인 2022년 2월 4일 베이징에서 푸틴과 시진핑이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미칠 부정적 충격을 비판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안보체제"를 구성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선언은 중국의 '일대일로' 건설을 전제하는 '대유라시아 동반자관계'(Greater Eurasian Partnership)의 구축을 동시에 강조했다.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무제한적"임을 선언한 가운데, 러시아는 "타이완의 어떤 형태의 독립도 반대"하며, 중국은 'NATO의 확장'을 반대한다는 공약을 교환했다.15)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에 의해 촉진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전쟁은 미국에게 위기이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과 합병 조치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을 강화해왔다. 유럽은 또한 중국과의 경제관계에도 깊은 기득권을 갖고 있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봉쇄를 경제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러시아의 재부상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에너지 의존관계를 끊어야 하고, 유럽과 중국의 경제적 의존관계를 약화시켜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미국에게 그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을 제공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미국의 국내정치에서 공화당이나 민주당 모두에게 '반세계화 포퓰리즘'에 편승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동기도 만족시켜준다.16)

*주석 

1) Ross H. Munro, "China: The Challenge of a Rising Power," in Robert Kagan and William Kristol, eds., Present Dangers: Crisis and Opportunity in American Foreign and Defense Policy, San Francisco: Encounter Books, 2000.

2) 미 의회가 ‘미중 경제 및 안보 검토위원회’를 설치해서 양국간 경제•무역관계가 미국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 분석해 매년 의회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2000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연례보고서가 처음으로 중국의 공군력과 재래식 미사일 전력 팽창이 동아시아 미군기지들에 제기하는 점증하는 위협을 분석하는 챕터를 따로 마련한 것은 2010년이었다(Robert Haddick, “This Week at War: The Paradox of Arms Control: Even if it passes, New START will only ensure that the U.S. remains dependent on nuclear weapons,” Foreign Policy, November 19, 2010). 2012-15년 사이에 미 국방부 보고서는 중국 핵무기와 미사일체계, 해군력의 현대화와 첨단화를 본격 주목한다(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U.S. Department of Defense, Annual Report To Congress: Military and Security Developments Involving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15, April 7, 2015;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한길사, 2018, pp.146-163).

3) 2004-2005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Lawrence Freedman, “Why War Fails Russia’s Invasion of Ukraine and the Limits of Military Power,” Foreign Affairs, July/August, 2022, p.14.

4) 앨리슨이 정의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도전자가 패권자를 대체하려 위협할 때 패권자가 겪게 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당혹과 혼란”을 가리킨다. 패권자는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그 지도자들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수준의 위험”까지도 감수하려는 심리상태에 빠진다(Graham Allison, 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 Boston: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7, p.xvi, pp.44-51).

5) David Adler, “Centrists Are the Most Hostile to Democracy, Not Extremists,” The New York Times, May 23, 2018. 미국 공화당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인사가 2022년 시점에서 “공화당 안에 온건파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평하기에 이르렀다(Peter Smith, “Moderate Republicans No Longer Have a Home, and It Started With My Defeat,” The New York Times, Sept. 22, 2022).

6) Paul Krugman, “Crazies, Cowards and the Trump Coup,” The New York Times, June 30, 2022.

7) 미국 공영방송 PBS가 2022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 대다수는 2024년 대선에 트럼프의 재도전을 반대했지만, 공화당 지지층의 67%가 트럼프의 재출마를 지지했다(Matt Loffman, “Trump should not run for president in 2024, majority of Americans say,“ PBS, Sep 7, 2022).

8) 트럼프주의의 ‘반이민 포퓰리즘’은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높고 긴 벽을 건설하는 정책으로 대표된다. 트럼프는 2015년 2월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서 처음으로 “나는 벽을 세우겠다. 누구도 트럼프처럼 벽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했다(Joshua Green, Devil’s Bargain: Steve Bannon, Donald Trump, and the Nationalist Uprising, New York: Penguin, 2018, p.111).

9) 제2차 세계대전 전야 1930년대 보호무역주의 흐름은 Jeffrey Frieden, Global Capitalism: Its Fall and Rise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W.W. Norton & Company, 2006, pp.206-209.

10) Frieden, 2006, pp.142-148.

11) 이미 혼란이 극에 달해있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13명의 미군을 포함 170명을 살해한 테러도 미국은 막지 못했다.

12) Adam Nossiter and Eric Schmitt, “U.S. War in Afghanistan Ends as Final Evacuation Flights Depart,“ The New York Times, August 30, 2021.

13) The World Bank, “GDP (constant 2015 US$)-Russian Federation,” (https://data.worldbank.org/).

14) 앞서와 같은 세계은행 자료에서 동일하게 2015년 달러를 기준으로 할 때, 1990년 중국 GDP는 러시아에 미치지 못하는 1조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2021년엔 러시아의 10배가 넘는 15.8조 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준으로 미국 GDP는 1990년 9.81조 달러였으며, 2021년엔 20.3조 달러였다. 한국 GDP는 1990년엔 중국의 절반 수준인 4,105억 달러였고, 2021년엔 1.69조 달러로 중국 GDP의 약 9분의 1 수준이었다.

15) “Joint Statem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on the International Relations Entering a New Era and the Global Sustainable Development,” February 4, 2022. (http://en.kremlin.ru/supplement/5770).

16) 2022년 9월 27일 러시아로부터 독일 등 유럽으로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발틱해의 파이프라인 Nord-Stream 1 & 2가 세 군데서 폭발이 일어나 훼손되었다. 유럽인들은 의도적인 파괴행위의 결과로 판단하고 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비판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미국과 우크라니아의 공작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Melissa Eddy, “Pipeline Breaks Look Deliberate, Europeans Say, Exposing Vulnerability,” The New York Times, Sept. 27, 2022). 이 가스관의 파괴로 이익을 볼 세력은 과연 누구일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유럽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앞에서 표면적인 단결에도 불구하고 내부 분열 위험을 크게 안고 있다. 이미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특히 2022년 겨울을 앞두고 미국이 주도하는 반러시아 전선에서 유럽이 동요할 우려는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가스관 파괴는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의 해역에서 벌어진 것인데, 이 해역은 미국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집중된 지역임을 러시아는 강조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