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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의 긴장이 지속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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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의 긴장이 지속되는 이유

[논단]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 ①

다음 글은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부산광역시 공동 주최로 26-27일 부산에서 열린 제18회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주제 : 한반도평화, 신냉전과 패권경쟁을 넘어)에서 발표된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 전문이다. 주최 측의 양해를 얻어 4회로 나누어 싣는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응한 미국의 대중국 경제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난 30여년간 지속돼온 지구화(globalization)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2차 대전 이후 안보와 식량, 에너지 자원의 확보를 미국에 의존해오며 지구화의 혜택을 톡톡히 누려오던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0년대 초 이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개념으로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강조해온 학자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진행된 유럽의 냉전이 1989년 동유럽의 해방과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완전 종식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긴장과 대립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초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경영 파트너로 지목됐던 중국이 공산화되고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미중이 군사대결을 벌이면서 미국/일본 대 공산 중국의 대립 구도가 성립됐고 , 이러한 이념과 체제 대결에 덧붙여 지정학적 대립과 과거사(식민 지배와 침략) 청산이라는 역사적 문제가 중첩됐기 때문이다(대분단체제). 여기에 한반도 남북과 중국/대만 간의 소분단체제가 대분단체제의 갈등과 긴장에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안보체제 성립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와 소분단체제들의 긴장의 동시적인 심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미국"이라면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서는 "일본, 한국,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에서 대안의 동아시아를 함께 꿈꾸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며 비전을 가꾸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미중 패권경쟁의 동반자나 하수인이나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위한 동아시아 공동지성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던 2018년 5월 24일 당시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가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체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에 관한 합의를(평화협정) 미 상원에 상정해 '조약'으로 만드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라고 명확히 밝혔으나, 이후 대중국 견제의 필요성 때문에 북미 평화협상을 좌초시켰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동아시아 평화 체제 건설을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출발점으로 해서 '동아시아 비핵무기지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의 극단적 대결상황에서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과제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 체제를 위한 담대한 구상이라는 점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1. 대분단체제로 바라본 전후 동아시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말은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고유성과 연속성을 주목하여 그 특성을 조망하기 위해 필자가 2000년대 초부터 사용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다듬어온 개념이다.1) 전후 유럽의 지역질서는 미소 냉전을 직접 투영하는 질서였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미중관계를 축으로 구성되었다. 미소 냉전은 미중관계를 매개로 해서만이 동아시아에 반영되었다. 이 질서 안에서 미국의 역할은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연합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유럽의 지역질서는 냉전과 탈냉전의 이분법이 명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질서였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그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통시성이 있다. 변화 못지않은 강한 연속성을 띤다. 그 고유성과 연속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냉전-탈냉전 이분법과 별도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된 이유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이전, 그러니까 전전(戰前)의 동아시아 질서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유럽 질서와 다른 고유성을 갖는데, 그 점을 부각해 '동아시아 제국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동아시아에서 전후 대분단체제는 전전의 제국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제국체제의 역사적 유산 위에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의한다.

돌이켜보면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필리핀과 베트남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중소국가들은 동아시아 역사의 어떤 시점부터 '제국들의 길항'이 만들어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슷한 운명을 겪어왔다. 그 운명의 변곡점은 대체로 19세기 말이었다. 일본이 중화제국을 상대로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한반도는 1차적인 전쟁터가 되었다. 타이완은 그 전쟁의 결과로 중국에서 떨어져 나와 일본의 식민지로 되었다. 베트남은 그 전에 프랑스가 중국을 상대로 도발한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그 세기의 전환점에서 필리핀은 스페인에서 독립했지만 3년에 걸쳐 20만여명의 필리핀인이 희생된 처절한 독립전쟁 끝에 미국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청일전쟁과 뒤이어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도발한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해 중국의 동북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성립했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새로운 주체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신흥 제국이었다. 이들은 동아시아에서 각각 타이완과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필리핀에 대한 식민 지배를 발판으로, 서로 갈등하면서도 권력정치적 흥정을 통해 상호적응하고 협력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힘을 견제하는 가운데 중국을 경영한다는 두 개의 결정적인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갈등하되 흥정하며 협력하는 제국주의 카르텔의 질서였다. 이 카르텔의 표지는 동아시아 경영을 위한 일련의 비밀협정들 외에도 미일 두 나라 사이에 1940년 전후까지 지속된 '순진한 무역관계'로 포장된 전략적 경제동반자관계였다.2)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또 다른 축은 기왕에 홍콩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를 굳히면서 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대한 공동 경영에 참가하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제국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는 다섯 개의 제국들이 무너져 유럽에서 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국력은 1차 대전의 결과로 더 강화되었다. 그들이 주도하여 경영하는 동아시아 제국체제는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전쟁 중에 발생한 러시아혁명은 동아시아 제국체제와 그 안에서 미일 제국주의 콘도미니엄에 더 큰 의미와 역할을 부여해 주었다. 1920년대 초 미국이 주도해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워싱턴회의체제는 나폴레옹전쟁 후에 프랑스혁명의 유산을 억압하기 위해 1815년 구성된 보수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였던 비엔나회의체제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장차 일본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또 광포해진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을 제외한 모든 사회는 식민지이거나 반식민지였다. 수천 년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던 광활한 중국 본토는 제국들이 저마다 동아시아에서 확보한 식민지들을 교두보로 하여 경영하고 통제하는 반식민지였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약한 고리는 두 군데였다. 첫째는 러시아 견제와 중국 경영을 위해 서양과 제국주의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던 일본제국이 팽창하면서 미일 제국주의 카르텔 내부에 발전하는 긴장이었다. 둘째는 제국체제의 한 복판을 이루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반식민지 자체의 유서깊은 역사성, 그리고 중국 민족주의의 내면적 급진화였다.

동아시아에서 20세기 전반기의 제국체제가 청일전쟁, 미국-필리핀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이라는 세 개의 전쟁을 거치며 구성된 것처럼, 전후 대분단체제 역시 세 개의 전쟁을 거치며 구성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중국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먼저 제국체제를 지탱하던 핵심축인 미일 제국주의 카르텔이 파열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낳았다.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과 일본은 과거의 제국주의 연합을 벗어나는 동시에 더 굳건한 하나의 지정학적 동일체로 거듭난다. 중국 안에서 전개된 내전은 중국의 지정학적 정체성을 우에서 좌로 전환시킨 결과를 낳았다. 1949년 여름과 가을, 미국과 신중국이 "우호관계는 아니라도 전쟁하지 않는 평화공존의 관계"를 구성해갈 정치외교적 공간은 좁지만 존재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미국은 끝내 신중국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거부했고, 마오쩌둥은 그 해 12월 스탈린을 찾아가 중소동맹조약을 협상했다. 1950년 1월 마오쩌둥과 동맹조약을 체결한 직후, 스탈린은 1950년 1월 1949년 내내 거부했던 김일성의 남침제안을 승인한다. 이후, 북한과 소련, 그리고 신중국 지도부 사이에 한반도 전쟁 모의가 본격화하고 마침내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민족 내부의 내전과 전후 동아시아 차원의 미중 패권전쟁의 결합체였다.3)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미국의 개입이 막았다. 미국과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은 중국의 개입이 막았다. 그래서 이 전쟁은 세계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역사적인 상처만을 남긴 채 휴전선이라는 원점에서 한반도 분단국가체제를 고정시켰다. 대만해협을 사이엔 둔 중국 내적 분단도 미중 간에 군사적 충돌이 시작됨과 동시에 고착되었다. 더 나아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의 분단도 고착되었다. 신중국을 배경에 둔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지는 한국전쟁을 통해 굳어졌다. 프랑스의 식민주의 부활 기도가 좌절하고 퇴장하면서 생긴 공백을 미국이 대신 메꾸면서, 베트남의 분단국가체제도 1954년에 고정된 것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두 개의 다른 분단 시스템의 상호작용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하나는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 작용하는 '대분단 기축관계'이다. 이 기축관계는 세 가지 차원의 긴장을 내포한다. 첫째는 지정학적 긴장이다. 정치사회체제나 이념의 차이와 무관하게 강한 정치적 구성체들 사이엔 의례 존재하기 마련인 긴장을 가리킨다. 중일 사이에도, 미중 사이에도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지정학적 긴장은 깊었다. 둘째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에서 비롯되는 긴장이다. 냉전기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정치이념적 이질성은 자유와 반자유의 대립은 아니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였고 마오쩌둥의 중국은 반우파 투쟁에서 본격화한 전체주의 사회의 성격을 갖고 있어 정치적 이질성은 물론 분명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인 한국, 타이완, 남베트남은 반공 파시즘적 정권들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이때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의 본질은 '시장과 사적 소유 관련한 이질성'이었다.

대분단 기축관계가 담고 있는 세 번째 차원의 긴장은 '역사심리적 간극'이었다. 미일 간에도 전쟁을 치러 역사심리적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엔 진주만 공격과 원폭 투하라는 각자의 극단적인 전쟁범죄들이 서로에 대한 역사적 상처를 덮는 '아픈 심리적 방정식'이 성립했다. 이 방정식이 미일동맹의 심리적 지지선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국의 관점에서 미일동맹은 수십 년에 걸친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에 미국이 면죄부를 주면서, 미국이 일본과 하나의 초국적 이념공동체를 구성한 것을 의미했다. 유럽에서의 냉전체제는 서독과 서방 사이에, 그리고 동독과 공산권 사이에 각각 이념적 공동체를 구성했다. 그 결과 동서독 모두와 나머지 세계 전체 사이에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했다. 전후 독일과 전전 파시즘 체제 사이의 철저한 역사적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는 정반대의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의 냉전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 상처를 결빙(結氷)시키고 내연(內燃)하게 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의 책임자는 미국의 관점에서는 중국이었고, 중국의 관점에서는 미국이었다. 이 질서에서 일본은 역사반성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역사문제는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에서 '정신적 폐쇄회로'의 기능을 담당했다.

한반도와 타이완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성립한 소분단체제들은 대분단 기축관계와 역사적 기원을 같이 한다. 소분단체제들은 각자 내적·외적 요인들에 의해 두 개의 정치공동체로 분열해 대립하는 분단국가체제들이다. 저마다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역사심리적 간극을 안고 있다. 한반도의 전쟁이 그렇고, 중국 내전이 그렇고, 인도차이나의 반식민주의 전쟁이 그러했다. 소분단체제들도 저마다 '지정학적 긴장'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남북한, 타이완해협의 타이완, 그리고 냉전기 베트남의 남북이 각자 강력한 지정학적 행위자들과 동맹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하나의 '시스템'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분단 기축관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의 긴장들이 상호유지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기축관계와 세 개의 소분단체제들이 또한 상호유지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 긴장이 이완되더라도 한반도나 타이완해협에서 긴장이 증가하면 미중관계의 긴장완화도 제한되고, 나아가 다시 긴장이 커지곤 했다. 또 소분단체제들에 봄이 오는 경우에는 대분단 기축관계에 긴장이 발전하면서 소분단체제의 봄도 꺾이곤 하였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냉전기에도 한 차례 의미있는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말 중소분쟁을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은 대흥정과 대타협을 했다. 패색이 짙어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명예로운 후퇴를 위해서 중국의 협력이 필요했다. 중국은 타이완에 대한 국제법적 주권 획득과 그에 바탕한 유엔 상임이사국 등극이 필요했다. 이 타협의 결과 타이완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하에 주권은 중국에 속하고 정치군사적 영역에서는 미국에 속하는 양속체제(兩屬體制)에 놓이게 되었다. 대신 미국은 인도차이나로부터의 패주를 '명예로운 후퇴'로 포장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곧 공산화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의 새로운 상황은 그처럼 대분단 기축관계의 긴장 완화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공산화 통일은 대분단체제의 긴장 완화의 수준을 제한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반의 긴장을 다시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2. 탈냉전 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속: 3차원적 긴장의 재충전

동아시아 질서의 큰 변화는 물론 탈냉전과 함께 왔다. 탈냉전은 크게는 미소간의 문제였지만, 탈냉전을 추동한 중요한 열쇠의 하나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내면에서 우러나왔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을 계기로, 공산당을 포함한 중국 사회 구성원 전반에서 마오쩌둥 시대 전체주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 확산되었다. 곧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개방이라는 이름의 평화적인 정치사회적 혁명이 전개되었다. 1970년대 말에 시동을 건 중국의 개혁개방은 서유럽 사회들의 강력한 반핵운동, 동유럽의 시장경제 도입 흐름과 결합하면서,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의 소련에게 '신사고'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동서 냉전의 종식 과정은 동아시아의 한국, 타이완, 필리핀에 존재한 반공 파시즘 정권들의 몰락과 민주화의 배경이었다.

탈냉전은 그렇게 도래했지만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골격은 그대로 남았다. 대분단의 기축관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의 긴장은 각각 변화 못지않은 연속성을 가졌다. 냉전은 그 한 축인 소련이 해체되면서 무너져내렸고, 미소 냉전을 그대로 투영했던 유럽의 냉전체제는 해체되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한 축인 중국은 소련과 달리 개혁개방을 통해 반대로 경제력이 성장하며 국력이 팽창했다. 이로서 중국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 지정학적 긴장은 재충전의 길을 걸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이라는 차원도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치환(置換)'을 겪었다. 냉전기의 이질성은 시장과 사적 소유의 존재 여부였다.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그 이질성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탈냉전의 기운 속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민주화는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동시대에 진행되었다. 이로써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립이라는 문제가 정치사회적 이질성으로 인한 긴장의 내용을 재충전하게 되었다.

탈냉전 초기에 미국과 서방 사이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차원의 긴장을 강조한 흐름은 미국에서 문명충돌론과 함께 부상했다. 사무엘 헌팅턴은 향후 중국과 서방 사이의 문명적 이질성의 핵심으로 냉전시대와 달리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충돌을 강조했다.4) 국제관계에서 전쟁과 평화의 동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현실주의적 관점은 원래는 국력의 강약만을 따질 뿐 독재 혹은 민주주의 같은 국가의 내적 성격을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향후 중국과 서방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소로서 많은 학자들이 권위주의-민주주의 간 긴장을 중요한 요소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5)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차원은 타이완 민중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촉진하면서, 대분단체제의 지정학적 긴장을 심화시키는 장치가 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는 2010년대 말 홍콩의 민주화 운동 및 그 좌절과 결합하여,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역사 담론은 이념 담론에 가려 절반은 억눌려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일본과 함께 속해있던 한국과 타이완에서도 일본의 역사적 범죄에 관한 공개적 비판은 반공이라는 더 큰 대의에 밀려 억압되었다. 탈냉전이 되면서 냉전기 이념 담론은 퇴장했다. 대신 역사 담론이 부상했다. 동아시아의 이웃 사회들에서 갑자기 부상한 것처럼 보인 역사 문제 제기에 일본은 당혹해했다. 황망한 가운데 역사를 반성하는 '고노담화'(河野談話, 1993년 8월)와 '무라야마담화'(村山談話, 1995년 8월)도 내놓았다. 하지만 곧 일본은 역사문제에서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과 간격을 벌렸다. 1990년대 말 일본 역사담론의 우경화는 한반도 핵문제와 타이완해협 미사일위기 같은 소분단체제들의 긴장 사태들에도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 정치가 우경화의 길을 걸은 것과 관계가 있었다.

동아시아 역사문제는 이 지역 사회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평화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는 데 심리적 저항의 역할을 하는 '정신적 폐쇄회로'로 기능해왔다. 그것이 탈냉전의 동아시아에서 오히려 더 명백해진 상황은 1990년대에 진행된 사태들에서 엿볼 수 있다. 중국 난징시 한복판에는 1937년 벌어진 난징학살에 대한 중국 사회의 기억을 표상하는 '난징학살피해자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이 있다. 이것은 1985년에 세워졌는데, 1995년에 지금 규모로 확장되었다.6) 반면에 일본 사회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전몰한 군인들을 14명의 A급 전범들과 함께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일본정부 지도자들의 정기적인 참배와 공물헌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동아시아 이웃 사회들에서 그것은 침략전쟁과 제노사이드를 포함한 전쟁범죄 행위들에 대해 일본 사회의 역사반성이 부재함을 단적으로 표상한다.7) 과거 침략전쟁 시대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단절 없이 연결해주는 역사적 연속성은 1990년대 말 일본이 히노마루를 국기(國旗)로, 기미가요를 국가(國歌)로 공식 법제화한 결정에서 상징된다. 동아시아 다른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마치 독일이 과거 제3제국의 국기와 국가를 다시 정식으로 복권시키는 것에 비유되는 충격을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본 사회의 역사적 기억은 과거와의 단절이 약하며, 일본 정부가 '역사 지우기'에 앞장서 그 경향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이다.8)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를 구성하는 세 차원의 긴장들은 모두 그렇게 재충전되었고, 그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지지해주는 관계에 있다. 이 기축관계의 긴장들은 또한 한반도와 타이완해협에서 다시 활성화된 소분단체제의 긴장들과 맞물리면서 서로를 지탱하는 상호작용 관계를 구성했다. 1990년대에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완화된 것처럼 보였을 때 북한 핵문제와 타이완해협의 미사일위기가 벌어졌다. 이들 소분단체제의 긴장들은 대분단 기축관계의 긴장을 환기시켰다. 대분단 기축관계와 소분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상호지지 작용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냉전기에 베트남의 소분단체제가 수행한 기능은 오늘날엔 베트남과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는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 갈등에서 미국이 동남아 국가들과 연대하여 중국과 긴장하는 것도 닮음꼴이다.

필자는 2007년의 논문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중심을 종단(縱斷)하는 '대분단선'에 대해 논했다. 남중국해, 타이완해협, 오키나와와 센카쿠(댜오위다오)를 포함한 동중국해, 그리고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휴전선으로 이어지는 선이다. 중국의 국력 팽창과 함께 중국의 '자기정체성'이 확장해왔다. 그 일환으로 '영토적 경계'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개념의 현실화가 추구된다. 중국의 영토적 자아(自我)는 미국이 일본, 한국, 타이완, 필리핀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동맹체제에 기반해 누리는 동아태지역 해상패권과 긴장을 축적한다.9)

*주석

1) 이삼성,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에 관한 일고: ‘대분단체제’로 본 동아시아」, 『한국과 국제정치』, 제22권 제4호(2006년 겨울), 41~83쪽; 이삼성,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성과 중국: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중국의 구성적 역할」, 『한국정치학회보』 50집 5호 (2016년 12월), pp.163-189.

2) 1941년 미일 제국주의 카르텔이 파열하기 직전까지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에 필수적인 전략물자의 주요 공급자는 미국이었다. 미 국무부가 발행한 『중국백서』에 의하면, 미국이 일본에 석유와 폐철 등 전쟁물자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1월 26일이었다. 난징학살이 진행된 1937년에서 38년 초의 시점에서도 일본에 항공폭탄 제공국은 미국이었다. 일본 폭격기에 긴요한 항공유의 수출도 1940년 중엽까지 지속했다. 미국이 일본과 모든 무역을 종결한 것은 1941년 7월이 되어서였다(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한길사, 2009, pp.500-503).

3) 이삼성, 「한국전쟁과 내전: 세 가지 내전 개념의 구분」, 『한국정치학회보』, 47집 5호 (2013).

4) Samuel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thinking of World Order, New York: Simon & Schuster, 1996, pp.209-236.

5) David Shambaugh, Tangled Titans: The United States and China, Rowman & Littlefield, 2012, p.8.

6) 난징학살 80주년이었던 2017년 12월 난징대도살기념관은 시진핑 주석이 참석한 추모식을 가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중국 국가당안국은 『세계기억명록-난징대학살당안』과 당시 독일인으로서 난징대학살의 산 증인이었던 존 라베의 일기를 편집한 『존 라베의 일기』(Diary of John Rabe) 등 2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달 11일부터 중국 관영 CCTV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체계적인 위안부 운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며 일본에 역사반성을 촉구했다(박은경, 「시진핑, 난징대학살 80주년 추모식 참석…일본에 역사반성 촉구」, 『경향신문』, 2017.12.12).

7) 2013년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응은, 「秦刚:中国人民不欢迎安倍 中国领导人也不可能与其对话」, 人民网, 2013.12.30.

8) 일본 총리들 가운데 가장 우경화한 역사인식을 가진 것으로 말해지는 아베 신조도 2015년 8월 연설에서 “우리 일본인들은 세대를 넘어 과거의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겸허한 기분으로 과거를 계속 받아들이고, 그것을 미래에 넘겨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역사반성의 책임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할 의무를 언급했다(『연합뉴스』, 「아베 "전후세대 8할 넘어…사죄 계속하는 숙명 지워선 안돼」, 2015.8.14.). 문제는 그러한 원론적인 역사반성과 모순되는 구체적인 행위들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가 역사교과서에서 침략전쟁 기간에 벌어진 반인도적 행위들에 관한 역사지우기를 주도하는 것이 그렇다. 2022년에도 일본 문부과학성은 고등학교 검정교과서에 나오는 ‘조선인 강제연행’이나 ‘종군위안부’ 등의 용어를 정정하도록 출판사에 직접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지적이 일본 학자들로부터도 나왔다(『경향신문』, 「일본 정부가 고교 교과서에서 위안부·강제연행 지웠다...일본 학자들도 지적」, 2022.8.24).

9) 이삼성, 「21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 미국의 동아태지역 해양패권과 중미관계」, 『국가전략』, 제13권 1호 (2007년 봄), p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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