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여운형
한반도는 대단히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한국이 전근대시기에 전세계 다른 국가, 지역과 달리 외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은 것은 이러한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전 지구적으로 세력 분할을 하던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한국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결국 해양세력인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이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전쟁을 벌임으로써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의 직접적 지배를 받았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한국의 지배층이 제국주의시대를 맞아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친미파 등으로 나뉘어 열강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도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일제의 침략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와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피해와 고통은 일제가 패망하고서도 계속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국군과 소련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서 동족상잔의 내전이자 양대 강대세력의 국제전을 치렀다. 여기서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제의 지배와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협력’한 친일파 등 극우세력과 친소 극좌세력이 분단이 되는데 내적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집단학살을 일으키는 등 전쟁의 피해와 고통을 크게 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2013년 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휩싸였다. 한·미 연합 독수리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3월 19일부터 핵폭탄 투하에 쓰일 수 있는 B-52 전략폭격기가 괌기지에서 날아왔고, 북이 이에 대응하겠다고 하자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평가되는 F-22 전투기, 스텔스 B-2폭격기가 출동했고 핵잠수함 샤이엔이 배치되었다. 요컨대 한반도는 전근대사회와는 대조적으로 근대 이후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대국과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급속히 커진 중국과 미국, 일본, 러시아의 4강에 둘러싸인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전략을 어떻게 세우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에 대해 현명한 답안을 제시한 지도자가 여운형이다. 좌우합작 하면 여운형이 떠오를 정도로 여운형처럼 일제말 해방 후에 좌우합작운동에 전력을 바친 지도자는 없는데, 그가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한 것은 좌우합작만이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확신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민족국가 건설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자파 세력 부식을 위한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이들 강대국들로부터 경쟁적으로 외교적, 경제적 지지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민족해방운동을 펼칠 때에도 국제관계를 중시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볼 때 독립운동은 국제적 기회를 적절히 포착하는 것과 함께 국제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의 주체성 견지는 그의 모든 활동에서 보인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그의 국제적 활동에서도 잘 드러났다.
2. 일제강점기
1) 여운형의 첫 번째 중요 활동 - 신한청년당
여운형과 김규식은 독립운동자 가운데 국제적 연대 활동 등 국제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여운형은 3·1운동과 직결된 독립운동을 최초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즈음부터 상해지역의 청년들을 규합했다. 1918년 11월 대전이 끝나자 상해에서도 환호의 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이 2일간 행진을 벌였다. 그 직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오자 여운형은 그에게 독립 호소의 운동을 펼 것을 밝혀 지지를 받았고, 곧 이어 조동호 장덕수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윌슨 특사 크레인과 언론인 밀라드에게 전달했다. 그와 함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청년터키당의 영향을 받아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총무간사로 취임함과 동시에 이미 중국혁명운동에 참가한 바 있는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총무간사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이 상해를 떠난 것이 1919년 2월 1일이니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이상 빨랐고,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서 발표보다도 앞섰으며,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인정하고 지원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기 두 달 이상 앞섰다. 그리고 신한청년당 동지인 장덕수 선우혁 등이 국
내에 파견되어 각각 이상재 손병희 등과 양전백 이승훈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호소했고, 조소앙은 도쿄에서 유학생과 접촉했다. 여운형 자신은 러시아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이동녕 박은식 강우규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한국인을 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3·1운동은 여러 국내외 조건이 가세한 것이어서 신한청년당의 활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어났을 터이지만, 1차세계대전 종전에 여운형이 기민하게 움직여 신한청년당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나중에 3·1운동의 주역이 될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것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잊을 수 없는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운형·신한청년당이 3·1운동에 미친 영향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까
2) 여운형 적국수도로 – 미주 독립운동의 상징 박용만과 조봉암을 함께 생각하며 적국인 일본제국의 수도인 도쿄에 국수주의자 등 일부 독립운동자들의 반대가 있었는데도 여운형이 과감히 들어간 것 또한 그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에 걸쳐 도쿄에 머물면서 고가 척식장관과 4차례 만났고, 하라 수상, 다나카 육군대신, 도코나미 내상(內相), 노다 체신대신, 미즈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회견을 했으며, 일본의 대표적 개명 지식인 요시노와도 흉금을 터놓았고, 후에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오오모리(大森榮), 야마가와(山川均) 등과 한국인 중국인들이 모인 신인회(新人會) 주최의 모임에서 연설했다. 특히 일본인과 외국인, 언론인 등 명사 5백여명이 참석한 제국호텔에서 “한족의 장래가 신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고 자신한다”며 기염을 토한 명연설은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일본제국의 유력자들은 여운형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여운형은 이들을 압도하는 논리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1920년 2월 하라내각이 궁지에 몰려 중의원을 해산시켰는데, 하라내각이 궁지에 몰린 데는 여운형의 방일문제가 한몫 하였다.
* 한국 독립운동자가 상해나 도쿄 등지에서 일본 정부의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을 어떻게평가해야 하나
3) 여운형과 극동민족대회 여운형이 김규식과 함께 1922년 극동민족대회(극동노력자대회, 극동피압박민족대회, 극동인민대표대회)가 열린 모스크바, 뻬체르부르크 등을 방문한 것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중의 속박을 받고 있는 약소국의 혁명가로는 누구든지 소련의 혁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한국의 현실에 맞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일본인 가타야마(片山潛)와 함께, 또 한 번은 중국인 구추백(瞿秋白)과 함께 레닌을 만났는데, 레닌이 지금 공산주의를 실행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에 크게 공명했다. 그는 일제의 재판을 받을 때도 피력했지만, 맑스의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 같은 지역은 노농독재를 실행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여운형의 “맑스주의는 소련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으니 조선에서는 두 나라와 달라야 한다”는 ‘여운형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좌우합작주의가 탄생했다. 여운형주의는 후술하겠지만, 좌우 연합 또는 합작에 의해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고, 일제 패망 이후에도 그 주의에 따라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그것이 한국이 처한 국내외 조건에 가장 올바르게 대응하는 길이라고 판단했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에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여운형이 러시아에서 목도한 바도 그의 신조를 공고하게 했다. 볼쎄비키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영국·프랑스 등의 군대가 러시아로 들어올 때 러시아 우경파(右傾派)들이 “공산당에게는 패하여도 다시 흥할 수 있지만 외국에게 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슬로간을 내걸고 공산당과 합작해 공동 보조를 취하여 국가적 단합을 하는 것에 여운형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 여운형과 공산주의 – 여운형의 공산주의 이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백남운 평가?)
4) 여운형과 중국혁명
여운형은 신규식 등 민족주의자나 이회영 등 아나키스트들처럼 중국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중국혁명이 곧 조선혁명이라는 신념 아래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국민당, 공산당 모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17년 이래 손문과 친밀한 사이였고, 다른 국민당 간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모택동과 몇 차례 만났고, 구추백 등 공산당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았다. 1921년에는 조동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를 만들어 연대 활동을 하였으며, 1926년 국민당이 제2의 국민혁명운동 곧 중국통일을 위한 북벌전쟁을 일으켰을 때 김규식 등 많은 한국인 혁명가들과 함께 적극 가담했다. 여운형은 광동에서의 연설에 이어 20여 만명이 참가한 무한 승첩(勝捷) 축하식에서 다음과 같이 축사를 했다.
“중국이 통일되는 때는 조선의 해방도 곧 실현될 줄로 안다. 조선인인 나로서는 열의와 환희로 축하한다. 이어서 조선혁명이 성공되기를 비노라”
* 여운형의 체포(1929)와 ‘귀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중앙일보사장‘ 체육과 주례 활동
3. 여운형과 주체적인 해방맞이
1) 여운형과 건국동맹 – 1942년 이정구 장권 등에게 임무. 12월 체포, 44년부터 군사조직 등 구체화, 8월 결성. 15일 아침 정무총감에게 5개항 주장하고 천명, 정무총감 인정
여운형은 해방을 맞기 위해 조직한 건국동맹 간부들을 제1차건, 제2차건 좌우 모두를 포함시켰고, 공산주의자 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는 한편 보수적인 김용기와 함께 농민동맹을 조직했고, 좌우를 막론하고 청년, 여성, 교사, 노동자, 만주군관학교 군인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했다. 여운형이 건국동맹 강령의 첫 번째로 각인각파를 대동단결케 하여 일제를 구축하고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겠다고 한 것도 해방후 한반도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명시한 것이었다. 그가 8월 11일경 연합군에게 제시할 조건의 첫번째로 연합군에게 감사하지만 조선인 자체의 피흘린 공이 큰 것을 인식시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겠다고 한 것도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여운형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여러 공산주의자 지하활동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 여운형의 건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 여운형과 건준 · 치안대
한국인은 참담하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1945년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8월 15일 해방 그날부터 건국준비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갔고, 다음날부터 서울과 각지에 치안대 등이 조직되어 많은 지역에서 우리 스스로 치안을 맡았다. 이날부터 여운형이 직접 가거나 여운형 사자(使者)가 도착하면 옥문이 열려 ‘정치범’들은 새 나라 세우는데 앞장섰다. 동시에 한국인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누렸으며, 전무후무하게 정치적 자유를 행사했고,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문화·예술인, 지식인, 한글운동자 등 사회 각 곳에서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시민혁명이자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이 일어난 것인데, 곧 이어 소작료 3·7제 실시, 토지개혁 등 경제·문화 혁명이 수반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뿌듯한 긍지로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의 한가운데에 여운형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기에 여운형은 인민들로부터 그토록 열렬히 지지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에 건준이 없었더라면 해방이 어떠했을까. 한국인은 나라를 빼앗긴 그 순간부터 독립운동을 펼쳤고, 일제가 패망할 때 중국 중경과 서안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연안지방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또 하바로프스크 부근에는 빨치산 등이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조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조기 귀국을 제한받아 임시정부도 11월 23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건준이 해방 그 날부터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고, 각종 시설, 기계, 기구, 자재, 자본 등을 보존 관리하지 못했더라면, 한국인은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 해방직후 정치적 자유는 미군이 주었는가 - 일부 정치학자들은 기본적 자유나 정치적 자유가 연합군에 의해, 특히 미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잘못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미군이 9월 9일 서울에 왔을 때 한국인이 앞에서 말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치안을 교란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지방 인민위원회나 치안대 등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친일파들을 모두 현직에 불러들여, 오히려 미군이 오고부터 상당부분 해방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또 하나 당대와 후대의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어떠한 조직을 만들던지 우익과 좌익이 함께 하도록 하고, 외국에 대해서는 등거리외교와 자주성을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한반도가 처한 국제적 제약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강대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건준을 조직할 때 특히 민족대단결의 모습을 갖추려 했고, 좌우의 안배에 신경을 썼다.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한 것이나 송진우를 끌어들이려 한 것에서도 그 점을 엿볼 수 있지만, 1차 조직에서 우파와 좌파를 고루 안배한 것은 남북에 들어와 있는 외국군과의 관계에 대한 대응이었던바, 해방정국에서 중요 단체를 이와 같이 좌우를 동등한 비중으로 조직한 지도자는 여운형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여운형이 건준 선언에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하기 위해서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이 통일전선을 펴야 하며, 건준은 바로 이러한 통일전선 결성을 갈망하는 사회적 요구에 의해 결성되었다고 밝힌 것도 강대국에 대해 능동적 적극적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 여운형과 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특이하나 해방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한 인민당
여운형은 인민당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민당은 전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오, 진보적이요 양심적인 자본가나 지주까지도 포섭하고 제휴해서 광범한 혁명적 민족전선을 지어 현단계에 적응한 가장 대중적인 정당으로써 긴급한 국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여운형이 지적한 인민당의 성격은 일반 정당론으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현단계’가 말해주듯 당시의 국내외 상황을 파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운형은 한반도는 산업발달이 미약하기 때문에도 이러한 ‘광범한 혁명적 민족전선’이 상당 기간 가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당시의 대외적 상황에 대한 고려이기도 했다.
4) 여운형과 신탁통치
(1) 오보와 반탁 (2) 반탁투쟁의 성격 (3) 3상 결정의 핵심
여운형은 침묵하다 4당회의 주선, 1월 7일 4당 합의, 삼상회의에서 자주독립 보장한다고 결정한 것은 전면적으로 지지하되, 신탁은 장래 수립될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해결케 함.
여운형 1월 14일 회견-삼상 결정은 양면이 있는데, 덮어놓고 지지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조선사람은 신탁 좋아하지 않는다. 속히 완전한 독립 요망한다. 하지에게는 신탁이 없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 그는 김구의 태도도 그 이전부터 비판
4. 좌우합작운동과 국제관계
1) 국제정치학자 이호재(안병영)의 논리
여운형은 유럽에서 강대국에 의해 둘러싸인 국가가 어떻게 독립을 유지하고 국가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가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보인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지 않았지만, 여운형의 노선은 유럽 약소국들의 경험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이호재는 약소국의 강대국들에 대한 대응관계를 그의 국제정치학의 주요 관심사로 삼았다. 그는 약소국 외교의 근본문제는 주권 유지와 안전 보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외세의 영향력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동시에 미약한 자주역량을 어떻게 강화시키느냐에 있다고 인식했다. 약소국이 외세의 영향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상태는 강대국들이 다원적 경합상태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면서, 이교수는 국내 정치가 분열되어 있으면 외세가 다원적 경합상태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전혀 외세의 중화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며, 반대로 경합상태에 있는 여러 외세가 각기 약소국의 국내 정치에 세력을 뻗게 되어, 중심세력 없이 분열상태에 있는 국내 정파 혹은 정당들이 서로가 다투어 더 많은 외세를 끌어들여 그 힘으로 다른 정파나 정당을 누르고 승자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국내적으로 격심한 혼란이 오고, 결과적으로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국내 정치력은 최소화되거나 분산되어 발칸화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국내 정치에서 보다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대내 정책이 어느 계층이나 이해그룹의 요구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어느 1개 강대국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중도적 외교정책이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이교수는 약소국 외교는 탈이데올로기 혹은 비이념적인 것일수록 좋다고 하면서 ‘외세 정치력의 극소화’와 ‘국내적 정치력의 극대화’가 모든 약소국에 해당할 수 있는 약소국 외교의 근본문제라고 강조했다. 오스트리아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소·영·프랑스의 4대국 점령에 놓였다가 1955년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다수당인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좌우 양익이 협력해 소련을 안심시킨 것이 큰 이유였다. 또 좌우합작에 의한 중도적 정부나 좌우 양익의 협조는 국내 복지를 최대화한다는 것을 강대국에 둘러
싸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의 예는 보여주었다.
* 핀란드도 근래 변화를 보였는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북유럽이 나토 쪽으로 기운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2) 좌우합작운동의 논리와 주체성
근현대 전체를 통틀어 민족 내부의 각 정파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있는 외세 문제에 대해 통찰력 있는 전략적 사고를 한 대표적 인물들이 1946년 5월경부터 추진된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먼저 이들은 미·소 양국에 대해 균형 있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우합작위원회 우익 대표인 김규식은 1947년 신년사에서 일부 노선이 친미 반소 또는 반미 친소로 독점정권의 수립을 몽상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 두 노선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입장을 망각한 것이며,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좌우 양익의 협조에 의한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을 저지하는 것이며, 미·소 양국의 조선에 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국제정세에 밝고 국제관계를 잘 아는 김규식은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과 함께 귀국한 지 닷새 만에 가진 정동교회 환영회에서 이미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 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규식이 말한 바 미군과 소련군을 물러나게 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모두 다 어느 정도라도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다는 평가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그것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정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연합국이 합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삼상 결정이 지켜져야만 한반도는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는데, 이 결정이 미소공동위원회 등을 통해 구체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합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하는 과제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한 나라에 기울어져 있으면, 다른 나라가 합의해줄 리가 만무했다. 따라서 친미반소나 반미친소를 지양하고 양국에 호혜적인 등거리 관계를 가져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좌우합작의 방안밖에 어떠한 방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합작운동 지도자들이 확신하는 바였다. 반탁투쟁만 중시하고, 더구나 반소반공투쟁의 일환으로 반탁투쟁을 벌이면서 모스크바삼상 결정 이행에 성의를 보이지 않거나, 반탁운동세력을 배제하고 소련에 편향된 활동을 하면서 민전이나 좌익 중심으로 모스크바 삼상 결정 제1항에 명시된 임시정부를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국제정치나 한반도의 현상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 외의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점령지 현상만 연장시킨다고 지적했지만, 좌익과 우익이 계급적 또는 정파 간의 이해에서 한걸음 물러나 합작을 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미·소 양군을 안심, 퇴각케 하는 확실한 근거였다. 좌우합작 지도자들이 합작만이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 것은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국가의 독립을 존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인식했다. 안재홍은 1946년 1월에 한 방송에서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한반도는 좌우의 합작에 의한 전 민족의 뭉쳐진 힘으로 미묘하고 복잡한 국제관계의 틈을 헤쳐나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극우와 극좌가 각각 남방세력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북방세력인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한 의뢰심을 지나치게 갖고 있다고 우려하고, 이를 지양하고 ‘중앙당’으로서 나아갈 길을 똑바로 나아가지 않으면 한국문제는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전략적으로 사고했다. 그는 강대국이 간섭하거나 강대국의 영향력에 휘말리지 않도록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국익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사고했다. 여운형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방에서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이 접합하는 위치에 있고, 세계 최강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자주국가의 건설과 유지 발전은 한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의 통일과 협력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일국에 편중해 타국을 배척하고 혹은 각국 간의 분쟁을 이용, 격성(激成)하여 어부지리를 구하는 등의 외교정책을 절대로 배격하고, 불편부당한 태도로 민주주의 제국(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을 가리킴 - 발표자)에 대한 공정한 친선관계를 확립하여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민족의 이러한 국제적 제약성을 십분 인식하여 자주적 노력을 기울이는 능력에 따라, 한반도는 지정학적인 약점이 강점으로 전화되어, 세계 정치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고, 민주주의 제국의 원조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이러한 적극적 능동적 대외관계는 분단에서는 있을 수 없고 반드시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 그 전제로 되어야 했다.
좌우합작운동 지도자들은 안재홍이 ‘중앙당’으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체성 또는 자주성을 강조했다. 특히 여운형은 이 점을 쉬지 않고 역설했다. 여운형은 그의 정치이념이 잘 담겨있는 「건국 과업에 대한 사견」에서 “국제적 원조(신탁을 가리킴-발표자)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침해하거나 혹은 우리나라를 전략기지화 혹은 상품시장화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이용하려는 여하한 의도에 대하여서도 철저히 항쟁할 권리를 갖는다고 강한 톤으로 언명했지만, 미소공위가 지지부진했던 1946년 4월 5일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불원 수립될 신정부는조선제가 되어야지 외국제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천명하고 ”우리의 자율통일이 없는 곳에 조선제 정부도 없을 것을 잊지 말자“고 좌우 정치세력에게 호소했다. 여운형은 4월 19일 조선제 임시정부 수립 문제와 관련해 북과 공동대응 또는 합작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났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체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수립은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외국인의 원조는 받을망정 결코 외국의 괴뢰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정부를 수립하려면 우리 민족의 자율적 통일이 없어서는 아니 된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모든 문제를 전가한 채 수수방관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매......”
* 남북합작과 김일성과의 회담이 실패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3) 극우극좌의 전쟁에 의한 해결 주장과 여운형의 죽음
좌우합작주의는 외국군을 물러가게 하고 독립을 가져오는 첩경이었고, 국내적 정치력을 극대화하여 강대국에 대해 능동적 적극적 외교를 펼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세력의 자율성이 극도로 협소했기 때문에 현실은 그것을 수용하기가 지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와 본원적 수탈은 지주·부르주아세력의 물적 정치적 기반을 협애하게 했고, 사회주의의 주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은 고립된 투쟁과 오랜 감옥 생활로 협착한 시야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나 중도적 민족주의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무력화시켜 민족개량주의자·친일파와 공산주의자들로 양극화되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해방 이후에 유산으로 물려져 극우와 극좌는 외세와 결탁해 상대방과 중도세력을 공격했고, 분단 정부의 수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그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안재홍은 1946년 7월 “만일 우리 조선에서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 빨리 통일정부를 만들어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조국에는 다시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당시 상황대로 극좌 극우 편향으로 세력이 부식되면“멀지 않은 장래에 그야말로 내란적인 항쟁의 피를 흘리게 할”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논객은 “미소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을 믿는 이는 소련의 패퇴와 거기 의하여 북벌을 꿈꾸고, 소련을 믿는 이는 미국의 패퇴와 거기 의하여 남정(南征)을 꿈꾸는 모양입니다”라고 썼다.
* 여운형은 기회주의자인가
미소 양군이 남북에 주둔하면서 자기 세력을 부식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좌우대립이 심한 상황에서 여운형노선은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극우와 극좌는 중도우파인 김규식 안재홍 등을 때리기보다 대중의 지지도가 높은 여운형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한민당은 발기인 성명서를 낼 때부터 집요하게 건준은 조선총독부의 괴뢰조직이고 여운형은 친일파라고 중상모략을 퍼부었다. 여운형 노선과 박헌영의 극좌노선은 빙탄불상용의 관계에 있었지만, 양자는 ‘탁치 정국’에서 더욱 거리가 멀어졌고, 1946년 7월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하고 이어서 좌익 3당의 통합운동이 벌어질 때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 여운형 운신의 폭을 좁힌 좌우싸움
여운형은 좌우대립 등 해방정국의 협소함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이인 좌익들로부터도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 1919년 도쿄행이나 1922년 모스크바와 뻬쩨르그라드에서의 활동이 말해주듯 국제적으로 대단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해방정국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의 인도행 문제가 단적으로 그 점을 말해준다. 1947년 3월 네루의 요청으로 미군정에서는 인도에서 열리는 범아시아회의에 여운형을 대표로 위촉했다. 여운형은 즉각 지방에서 귀경하여 “3천만 동포는 하루빨리 미소 양국의 타협으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 수립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어, 우리의 사정과 요청을 전세계에 알려야 할 필요는 지금에서 더 요청된 때는 없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여운형은 인도에서 미국 등지를 들러 국제적 여론을 조성하려고 했는데, 좌편향의 근로인민당 창당 관계자들이 미군정에서 보내는 것을 따르면 안 된다고 극구 말려 인도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파열음을 내면서 좌초의 위기에 처했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백주에 저격당했다. 그는 분단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극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분단정부가 들어서면 그는 남에도 북에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민족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5. 여운형 노선의 부활 - 21세기 4강 시대를 맞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들어선 이후 두 정부는 단일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게 적대적이었고, 그것은 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쫓겨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박정희는 선건설을 외치며 모든 통일논의를 억압하다가 유신체제를 만들기 위해 북과 비밀 교섭을 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장준하는 유신체제를 동·서 양극시대 분단의 논리를 제도적으로 완결한 것으로 파악했지만, 박정희 유신체제는 체제유지에 분단을 최대한 이용했고, 반공 캠페인을 극단적으로 벌였다.
한반도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급격히 변화했다. 남한에선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을 추진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중요 문제에 합의를 했다. 21세기에 들어오는 길목에서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짐으로써 여운형 노선이 반세기가 지나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6·15남북정상회담은 여운형이 예견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비중을 한껏 높였다. 이미 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5월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해 8년 만에 김정일-장쩌민 북중정상회담을 가졌고, 그 뒤에도 10월까지 양국의 중요 인물이 오고갔다. 2000년 7월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해 10월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미국 역사상 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2박3일 간 방문해 김정일과 포옹했다. 뿐만 아니라 울브라이트는 임기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북에 타진했다. 놀라운 사태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 3월에 북에 쌀 지원을 약속한 일본이 10월에는 그보다 5배나 많은 쌀 지원을 약속하더니만 2002년 9월 총리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고이즈미가 평양으로 달려가 국교정상화가 임박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지하에 잠든 여운형은 자신의 전략의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그러나 한반도는 일본인 납치사건, 미국에서 부시정권의 등장, 핵 문제 등으로 다시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특히 2008년에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남북관계를 6월항쟁 이전으로 되돌려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발표하면서 대북교류·교역을 중단시켰다.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 긴장을 이용해 오키나와 문제 등에 대처하는 등 국익 챙기기에 나섰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2013년 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놓였고, 남북 교류·협력의 유일한 통로였던 개성공단이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등장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김정은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를 만날 때 김정은에 대해 냉담했던 중국이 다른 표정을 지었다. 러시아도 유대 강화를 연거푸 표명했다. 일본 정부조차 패싱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나섰다.
한반도가 국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일국가로 되어야 한다. 더구나 지난 역사가 말해주는 대로 한반도에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남과 북의 갈등이 심하면 한반도 내의 정치력은 분산되어 최소화되고 외부의 정치력은 극대화되어 지금도 외세 의존세력이 주장하듯 남과 북은 ‘전통적인 우방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4대 강국의 위상은 변하고 있다. 경제면에서 보더라도 2000년의 경우 남한의 수출입에서 미국과 일본의 비중이 컸고 중국은 보잘 것 없었는데, 2005년에는 수출에서 중국이 미국 일본을 훨씬 앞질렀고, 2010년에는 수입에서조차도 일본보다 중국이 비중이 컸다. 2013년에 전쟁의 위기에 휩싸이고 개성공단이 잠정 폐쇄되자 유라시아 철도 연결, 시베리아 가스관 설치 등 러시아와의 경제협력도 물 건너갔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와 지속적으로 좋은 경제관계를 갖기 위해서도, 북 경제의 과도한 중국 경사를 막기 위해서도, 또 망언을 일삼는 일본과 미국에 외교력을 갖기 위해서도 최소한 한반도의 긴장은 완화되어야 하고, 남북의 교류와 협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나아가 노무현 정권이 거론하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한다거나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10·4남북정상선언의 주된 합의였고 한반도 평화의 열쇠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활성화와 남북, 중국을 연결하는 황해경제권의 실현, 한반도와 만주, 시베리아, 일본 서북지구를 연결하는 동북아 경제협력지대를 위해서는 남과 북이 개성경험이나 과거의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21세기 한반도 미래는 여운형의 전략을 어떻게 얼마만큼 잘 실현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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