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주의', 영화 감독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독창적 창작물로서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의 역할은 중요하다. 영화의 산업화가 급속도로 이뤄지고, 헐리우드 등이 영화 산업 규모를 천문학적으로 키워놓으면서 투자와 기획이 중시된 영화 제작 시스템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관객과 평론을 만족시키는 세심한 '디렉팅'은 여전히 감독이라는 '창작자'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아이디어를 '스토리'로 만드는 시나리오 작업 역시 공동 창작이 대세지만, 종합예술로서 영화 전체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디렉팅이 엉망인 영화는 아무리 자본을 투여하고 최고의 시나리오 창작자가 붙어도 성공하기 힘들다.
그런데 현재 창작자로서의 영화 감독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현행 저작권법은 영화 감독을 창작자로서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구멍이 나 있는 셈이다. 영화 산업 속에서 영화 감독은 영화 기획부터, 제작, 연출, 개봉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영화를 '산업'으로 이해하는 법 체계 안에서 정작 감독들의 권리는 매우 한정적이다. 영화 감독들의 권리가 한정적이니, 몇몇 성공한 영화 감독 외에 다른 영화 감독들은 입봉작을 통해 가능성을 보이고도 '재도전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찬옥, 강제규, 강윤성, 윤제균, 김용화, 김한민 감독 등 영화감독 507명이 소속된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영화감독 권리 찾기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유정주 의원이 3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천만 영화 감독들 마침내 국회로 : 정당한 보상을 논하다' 정책토론회에서는 저작물로서 영화의 가치 속에서 실종된 '저작권자' 영화 감독의 실체를 수면위로 드러냈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유지태 씨가 토론회 사회를 맡았다.
이자리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인 민규동 감독과 윤제균 감독은 "놀랍게도 K팝 창작자들과 K콘텐츠 창작자들의 현실은 매우 다르다. K팝 작곡가들이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발생하는 저작권료를 거둬들이며 다음 창작의 동력으로 삼고 있지만 한국 영화의 감독,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어디에서 이용되든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보호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쌓여가는 한국 영상 창작자들의 로열티가 국경을 넘어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 나라의 문화 기금 등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국부가 줄줄 새나가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유정주 의원이 발의한 '영상 저작물 저작자의 정당한 보상을 위한 저작권법 개정안'은 감독과 연출자, 각본가 등을 '영상 저작물의 저작자로 규정'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게 골자다. "영상 저작물의 저작자 중 타인에게 영상물의 지적재산권을 양도한 자는 그 영상 저작물을 복제, 배포, 방송, 전송 등의 방식으로 최종적으로 공중에게 제공하는 자가 영상 저작물을 제공한 결과 발생된 수익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OTT든 방송이든 영화를 대중에게 최종 제공하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 저작권료와 별개로 저작자로서 영화 감독, 작가 등에게 적절한 보상금이 지급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 의원은 이 개정안의 효과에 대해 "저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국제적 흐름에 맞추게 되고, 해외에서 수령된 저작권료를 국내로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법안으로 인해 저작권료 징수가 강화되면 해외에서 발생한 8261억 원(국제저작권관리단체 연맹 추산) 중 영상 제작물(약 1%로 추정) 저작권료 약 82억 원이 한국의 영상 저작물 저작자에게 분배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선 국제적으로 국가간 상호 유사한 법적 근거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영상 저작물 관련 저작권자 규정의 폭을 넓히고 저작물 관련 수령 대상을 늘리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감독조합에서 조사한 데 따르면 영화의 기획부터 개봉까지 거의 전 과정에 관여를 하는 영화 감독의 평균 계약금은 8300만 원, 평균 연봉으로 환산하면 약 1800만 원 수준에 불과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실연자나 제작자, 프로덕션의 연출자 등이 재방송 등을 통해 저작권료 일부를 배분받는 데 반면, 영화의 경우 TV 재방영, OTT 판매 등의 과정에서 감독, 작가, 배우는 별다른 권리를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들은 "기존 콘텐트를 사올 때 지급하는 금액에 모든 저작권료가 포함돼 있다. 별도의 창작자들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하면 '이중 지급'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법이 저작권료와 별개로 법적 창작자로 인정된 이들에게 일종의 '저작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이중 지급' 논란을 비켜갈 수 있다. 김정현 변호사는 "음악 산업의 경우 방송 사업자 등이 실연이 녹음된 상업용 음반을 사용할 경우, 상당한 보상금을 실연자에게 지급하도록 돼 있다. 실연자는 이미 가창 계약으로 보상을 받았지만, 실연 행위에 대해 법률상 보상금을 또 수령할 수 있다. 이번 개정안은 이와 유사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날 토론회를 주관한 한국영화감독조합 윤제균 대표가 현재 CJ ENM 스튜디오스 콘텐츠 부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는 점이다. 윤 대표는 '해운대'(2009)와 '국제시장'(2014)으로 국내 최초 '쌍천만 감독'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OTT 등 플랫폼을 소유한 CJ 계열사의 대표로 재직중인 윤 대표가 저작권료 관련 이해 관계에 있어 대척점에 있는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자격으로 토론회에 참석해 '감독들에 대한 저작권 인정'을 주장한 셈이다.
한국영화감독조합 관계자는 <프레시안>에 "윤제균 감독은 영화감독들의 실질적 '갑'일 수 있는 회사의 대표인데, 실질적 '을'인 감독조합을 대표해 토론회를 참여했다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크다. 그만큼 용기있는 행동이고, 또 그만큼 영화감독들의 정당한 보상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축사를 통해 "출판이나 음악 산업 등과는 달리 영상 창작자들의 경우 마땅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 수익을 내도 이에 걸맞는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공정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제2의 기생충, 제 2의 오징어 게임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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