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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2022 평화통일시민강좌] ④ 김태우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2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는 평화통일시민강좌는 국가보안법, 북한바로알기, 한미관계, 미중전략경쟁, 평화기행을 주제로 4월 16일부터 12월 17일까지 매월 세번째 토요일 오후 3시, 신촌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7월 16일 김태우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의 강연을 정리한 주요 내용입니다.

미국 자료가 보여주는 한국전쟁의 민낯

1999년 9월, 미국의 <AP>통신 기자들은 한국전쟁 초기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인근지역에서 수백 명의 한국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당했다는 취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AP>통신의 주장은 가해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한국전쟁기 미국 문서들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과 미국 정부의 공동조사단이 구성되어 노근리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조사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1월에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관련 조사활동의 결과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직접 발표했습니다.

"비록 노근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으나 한국과 미국은 공동 발표문을 통해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한국인 피난민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본인은 노근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는 전쟁기 민간인희생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통령의 공식적 유감 표명이었습니다.

민간인 공격의 진실을 보여주는 전폭기 '임무보고서'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성명 발표 당시 저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석사 과정의 대학원생이었습니다. 노근리사건의 진상규명 과정과 그 조사 결과는 당시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 김태우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그러나 어쩌면 당시 제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노근리사건보다는 1990년대 유럽의 발칸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던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전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대 세계 어디에선가, 심지어 현대문명의 중심을 자부하는 유럽에서도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그 전쟁 수행방식은 폭력적이기 그지없었습니다.

전쟁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변함없이 민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자의 상당수는 고공의 비행기 안에서 무감각하게 수행된 공중폭격에 의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에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를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어쩌면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공중폭격 관련 문서들, 특히 불법적인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된 미국문서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만을 품은 채 미국의 문서보관소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열어본 첫 번째 문서상자들로부터 미공군의 민간인 공격, 즉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향한 공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들이 표현 그대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편대는 대로 남쪽 언덕 위의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해 그들을 흩어지게 하고 그 규모를 알 수 없는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9th Fighter Bomber Squadron, "Fighter Bomber Final Mission Summary, Mission 9-7" 1950. 7. 27.)

"편대는 약 100명의 흰옷을 입은 병력들이 2~3명씩 북쪽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이들을 향해 두 차례 기총소사를 가하면서 지나갔다." (9th Fighter Bomber Squadron, "Fighter Bomber Final Mission Summary, Mission No. 9-10," 1950. 7. 24.)

제가 열어본 첫 번째 문서상자는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상자에서도 계속 이 같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최초로 접했던 문서들은 모두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전폭기 조종사들의 임무보고서(mission reports)였습니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매일의 출격 임무를 마치고 비행기지로 돌아오면, 당일 폭격의 수행방식(시간, 장소, 목표물, 폭탄의 종류), 비행 중 발견한 특이사항 등을 기록하는 임무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습니다. 조종사들은 이 임무보고서를 통해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 즉 한국의 민간인들을 매우 빈번히 공격했다는 사실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 없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물론 당시 저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남한지역 공중폭격과 그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수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기 이승만 대통령이나 한국 정부기관들 또한 공중폭격 피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공군의 한국 도시 폭격에 대한 외신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한국민들이 자기 집이 파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나 그들은 그것을 조용히 참고 차라리 가옥이 파괴될지언정 적에게 나라를 뺏기어 독립된 국가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원치 않는다."

1950년 한국정부의 공보처 통계국 또한 전쟁 초기 3개월 서울 시민 사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중폭격(4250명 사망)이라고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전 인지에도 불구하고 "흰옷의 사람들"을 사실상의 적(enemy)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인식과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같은 군사작전의 역사적 성격, 원인, 주체, 구조 등을 상세하게 밝혀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밀폭격' 정책의 허와 실을 보여주는 '작전분석보고서'

저는 한국전쟁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구조와 성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전쟁 초기 약 4개월의 기간 동안에는 미공군의 '군사목표 정밀폭격' 정책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이 정책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또한 어느 정도 실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30일, 흥남의 조선질소화약공장 폭격은 그 대표적 사례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미공군 폭격기들은 분명히 노동자 숙소 폭격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북한 정부는 오히려 미공군이 인구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폭격 작전을 수행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북한 정부가 공개한 전쟁 초기 평양과 원산의 사진들은 도심지역의 처참한 파괴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듯 미국의 군사목표 정밀폭격 주장과 괴리된 북한 도심지역 파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구체적 이유를 당대 미국 문서들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에는 다수의 권위 있는 민간인 연구자들이 참여한 '작전분석반(operations analysis office)'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미국 명문대학의 현직 대학교수들까지 참여한 작전분석 활동의 주요 임무는 한국전쟁기 미공군 폭격 작전의 효율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한국전쟁기 공중폭격의 성과와 한계가 가감 없이 지적된 작전분석반 연구보고서를 통해 '정밀폭격' 정책의 허와 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정밀폭격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미공군 내에서도 남북한 지역 폭격의 주체가 상이했다는 사실부터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지역은 전선에서 떨어진 적 후방지역으로서, 주로 이곳에서는 B-29기 중폭격기(heavy bombers)에 의한 산업‧교통요충지 전략폭격이 진행되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지역은 실제 전투가 전개된 전선지역으로서, 주로 이곳에서는 F-80이나 F-51과 같은 소규모 전폭기들(fighter-bombers)에 의한 지상군 근접지원작전이나, 적 병력 이동을 막기 위한 차단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쟁 초기 폭격 주체와 전략‧전술의 차별화로 인해, 정밀폭격의 한계 또한 남북한 지역에서 상이한 원인과 내용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공군 '작전분석반'의 구체적 지적사항들

우선 전쟁 초기 북한지역 폭격을 전담한 B-29기 정밀폭격의 한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쟁 초기 미공군 작전분석반은 B-29기들의 소위 '정밀폭격'의 가장 중요한 한계로서 과도하게 낮은 타깃 적중률을 지적했습니다.

그 구체적 분석 내용에 의하면, B-29로부터 투하된 개별적 파괴폭탄 하나가 6.096미터x152.4미터 크기의 목표물에 적중될 확률은 0.7%에 불과했고, 9.144미터x304.8미터 크기의 목표물에 적중될 확률은 1.95%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6.096미터x152.4미터 크기의 목표물에 대해 50%의 적중률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90발의 폭탄이 필요하고, 80%의 적중률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209발의 폭탄 투하가 필요했습니다. 요컨대 B-29기는 군사목표로 설정된 타깃을 실질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목표물 인근에 무수히 많은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서 군사목표로 설정된 대부분의 타깃들은 인구밀집지역 한 가운데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선 후방지역 전략폭격의 목표물들은 적의 군사활동을 지원하는 산업시설(정유공장, 화학공장, 철강공장 등)이나 교통중심지(기차역, 조차장, 주요 도로와 교량 등) 중에서 선택되었는데, 응당 이러한 시설들은 인구밀집지역과 밀착되거나 그 한가운데에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미 공군은 나름대로 '군사목표'를 선별하여 그에 대해 제한적 정밀폭격을 수행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 폭격의 현실은 인구밀집지역을 향한 대량폭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실제 전쟁 초기에 촬영된 미 공군의 항공사진들은 이 같은 작전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작전분석반은 전쟁 초기 전폭기들의 남한지역 군사작전에 대해서도 그 한계들을 날카롭게 분석했습니다. 이 한계들에 대한 지적은 대부분 당시 실제 폭격을 수행했던 전폭기 조종사들과의 인터뷰 내용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모든 전폭기 조종사들은 임무지역에서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조종사들은 전폭기들의 짧은 항속거리로 인해 유발된 과도하게 짧은 임무 수행 시간을 거론했습니다.

전폭기의 항속거리는 연료를 가득 실은 채 기지로부터 이륙하여 작전 후 기지로 돌아올 수 있는 왕복거리를 의미합니다. 전쟁 초기 대부분의 미 공군 전폭기들은 일본의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했는데, 당시 전폭기들은 항속거리가 너무 짧아서 한반도의 임무구역에서 불과 7~8분 정도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북한군은 미 공군 전술항공작전의 한계를 빠르게 파악한 후, 전쟁 초기부터 전폭기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주간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주로 야간에만 산악 지형을 이용해 행군하거나 군사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폭기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런 상황 전개였습니다.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비행하는 제트기 내에서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미 공군 작전분석반은 이 같은 전폭기 군사작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조종사들이 짧은 시간 안에 폭격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적으로 의심되는 것들", "적으로 믿고 싶은 것들", "증거는 없지만 적을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은신한 적 병력을 노출시키기 위한 민간지역 시험폭격, 자동차 및 보급품집적소의 색출을 위한 시험폭격 등이 광범하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작전분석반의 인터뷰에 응한 조종사들은 한국 민간인들을 "흰옷 입은 적들"이라 부르며 적의 지원세력 또는 위장 부대원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 7월 말에 발생한 노근리사건은 위와 같은 미 공군 전술항공작전의 한계에 더해, "미군 기지로 접근하는 모든 피난민에게 항공기로 기총 공격"을 가하라는 피난민 통제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발생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 노근리에서 미군이 피난민들을 학살한 현장(왼쪽). 2006년 5월 29일 <AP>통신의 보도로 알려진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의 서한(오른쪽). 이 서한에서 노근리 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이 확인됐다. ⓒ연합뉴스

초토화정책의 결정과 수행 과정을 보여준 미군 문서들

1950년 10월 말,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중공군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전쟁에 개입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개입 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 10월에 수립된 신생국이 미국과의 전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판이었고, 유엔군 병력들은 중공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무기력한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이 같은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에 없던 매우 공격적인 폭격 정책을 하달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과 일본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인구밀집지역 소이탄 대량폭격 작전을 부활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전쟁 초기의 정밀폭격정책의 공식적 폐기를 뜻했습니다.

저는 당시 미극동공군사령관이었던 스트레이트메이어의 전쟁일지(war diary)를 비롯한 다양한 미군 문서들을 통해 11월 5일의 소위 초토화정책(scorched earth policy)의 결정 과정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이제부터 북한지역의 모든 건물과 시설, 마을(village)은 군사‧전술적 목표물로 간주합니다." 그는 유엔군의 주요 사령관들에게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목표로 간주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파괴작전의 성공을 위해 인구밀집지역을 향한 대량의 소이탄 사용도 허락했습니다. 맥아더와 극동공군 수뇌부는 소이탄을 사용해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 1950년 초토화정책의 실행 결과, 유엔군은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희천・삭주의 75% 등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와 농촌지역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냉전의 마녀들'이 목격한 한국전쟁

이상은 2008년 발표한 저의 박사학위논문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와 2013년에 출간한 <폭격>(창비, 2013)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저는 다름 아닌 미군측의 문서들을 통해 전쟁기 미공군 정밀폭격정책의 구조와 성격, 초토화정책의 결정과 실행 과정 등을 객관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과 과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전쟁기 미 공군 문서들은 지상의 비극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군 문서를 통해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그려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론의 영역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출간한 <냉전의 마녀들>(창비, 2021)은 그러한 전쟁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보고자 한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1951년 5월,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21명의 외국인 여성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초토화작전 직후의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이 여성들은 1950년대 노골적인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이례적인 사회적 성공을 거둔 전문직 여성들이었습니다. 영국 집권 여당의 핵심 여성 지도자, 2차대전기 미군 대령 출신의 덴마크 도서관장, 쿠바(혁명 이전) 부호 가문 출신의 20대 변호사, 인도네시아 민족해방운동가와 결혼한 네덜란드 변호사 등 21명의 여성들은 대부분 당대에는 이례적 성공을 거둔 고학력의 여성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성들은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여성단체이자 유엔 자문기관이기도 했던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의 초청에 응한 여성들로서, 한국전쟁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북한지역에 들어가는데 동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사위원회에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북미, 유럽의 여러 국가들뿐만 아니라, 공산국가와 비공산국가 여성들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정치‧문화적으로 다양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은 초토화작전 직후의 신의주, 평양, 신천, 안악, 원산 등의 지역을 둘러본 후, 폭격의 주체인 미국을 강력하게 성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 가능하듯이, 일부 조사위원들은 자국으로 돌아간 후 해직, 체포, 소송, 감금, 협박, 구타, 망명 등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여성들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당대 북한의 도시와 농촌들은 표현 그대로의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석조건물이 즐비했던 대도시는 드넓은 돌밭으로, 소규모 마을들은 모두 흙먼지와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여러 조로 나뉘어 도시 곳곳에서 개별적인 인터뷰를 진행했고, 북한사람들의 주거공간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사람들은 모두 파괴된 자신의 집 지하에 토굴을 파서 생활하거나, 도시 외곽 산 아래 동굴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처럼 열악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서 가재도구라고는 식량을 배급받기 위한 양푼 하나와 양초 하나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어쩌다 담요 하나를 갖고 있는 가족은 이웃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습니다. 북한사람들은 그렇게 굶주리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폭격의 공포와 싸우며 하루하루 생존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이렇듯 열악한 일상을 반영하듯, 당시 조사위원들이 가장 빈번히 들을 수 있었던 질문은 전쟁의 종결 시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의 승패, 세계 각국의 전쟁 인식, 전쟁 원조의 필요성 등에 대한 질문이나 호소가 아니라, "이 전쟁이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를 제일 궁금해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지속'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1951년의 사람들에게 2022년에 이르러도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물론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협정의 체결과 함께 격렬한 군사충돌을 일단락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정전협정은 주요 전쟁 참가국 군사령관들 사이의 일시적이고 군사적인 휴전(military armistice)을 의미할 뿐, 국가 최고지도자들 사이의 종전선언이자 공고한 평화협정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2018년 남북한 최고지도자들의 공동선언문인 판문점 선언 또한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쟁 지속 상태를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1951년 국제여맹 덴마크 조사위원이었던 카테 플레론은 귀국 후 작성한 언론 기고문을 통해 "덴마크인들은 '침략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완벽한 정의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지속과 형식에 대해서도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전쟁을 선제 도발한 북한이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비인도적인 전쟁의 '지속과 형식'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전쟁의 지속' 자체를 일종의 범죄행위로 간주했습니다.

70년 전 한국전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평범한 시민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전쟁 결정과 무관한 수많은 아이들, 여성들, 노인들, 의무복무 중이던 20대 남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입니다. 포탄이나 미사일의 탄두에는 적을 알아보는 눈이 부재합니다.

때문에 미래 한반도 거주민들의 전쟁 없는 평화를 위해서라도 한국전쟁의 참혹한 전개과정에 대해 당대 자료에 근거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70년 전의 한반도 혹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같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토론하고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한국전쟁 종전선언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 대토론을 벌이기에 더 없이 좋은 때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자멸에 반대하기 위해, 특히 미래 한반도에 거주할 아이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보다 진지하게 숙고하고, 냉정하게 토론하고, 과감히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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