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나이 여든일곱
이 날 이때껏 먹도록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의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 주조장 앞마당에 나타난 헌병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사람을 찾을 때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던 열세 살 소년의 그 날,
앞장서서 헌병들을 집에까지 안내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랐네.
‘나는 아무 죄없응게 금방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로 끌려간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날
그날,
하필이면 반군들의 구례경찰서 장악을 위한 총공세의 밤이었네
콩 볶듯 볶아대는 총소리가 무서워 할아버지와 마루 밑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숨죽이며 밤을 지새웠던 그날 밤
반군들의 공습에 대비한 경찰들에 의해 그날 밤
아버지는 *경찰서 공터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네.
반군들이 산으로 쫓겨 가고 거리가 쥐 죽은 듯한 아침
용기를 내어 넘어다본 경찰서 공터에는 시체가 즐비하였지만
더 가까이 가볼 수 없어 멀리서만 눈물만 훔쳤었네
경찰들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그 시신들을 봉성산에 묻었다는데
무 묻듯이 구덩이 세 개에다 죄다 묻었다는데
그 자리 빙 둘러 철조망 치고 군인들이 지켜서 달려가 시체를 찾아올 수도 없었네
한 세 달이 지나고서야 군인들이 철수해 할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송장냄새 어찌나 지독하고 알아볼 수도 없어 찾지를 못했다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아들 뒤를 따라가시고
나는 아버지를 저승길로 내몬 자식이란 멍에를 쓰고 한평생을 한으로 살아왔네
새끼줄에 묶여 사람을 죽이려면 조사나 하고 죽이라고 억울하다고 절규를 하며 즉결처형 당했다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한 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한 많은 삶을 살았네
내 나이 여든일곱
이날 이때껏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 적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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