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2021년 7월 1일자 '채희완의 탈춤1', "전근대의 유산 탈춤, 청년들에 의해 끓듯이 부활하다", 2022년 1월 3일자 '채희완의 탈춤2', "인생으로서의 탈춤", 2022년 8월 8일자 '채희완의 탈춤3', "대학가에 탈춤반이 생겨나던 초창기 시절에"의 뒤를 잇는 글이다.
정병훈 : 연대에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지고 희완이형하고 술 먹느라고 그 재미에 신촌에 많이 오셨던 것 같아요, 제가 채희완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거는 1974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니까 47년 전인데, 그때에 1학년 들어가서 이제 겨우 ‘봉산탈춤’을 배웠을 땐데 선배들이 어디를 자꾸만 가요. 그랬더니 어디 뭐 연습하는 데가 있다면서요? 한번 따라가 봤더니 서울사대의 무용실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춤극을 연습하고 계시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 가서 심부름도 좀하고 이러면서 이제 뭐라 그럴까, 이렇게 엉겨 붙었죠. 그래서 참가한 것이 바로 이애주 선생의 대학원 졸업 공연이었던 것 같아요. ‘땅끝’ 춤판. 이애주 춤판 ‘땅끝’이라고 하는 공연이었는데 그게 굉장히 무용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고 하시는데요. 그 당시 얘기를 좀 들어보아야겠습니다.
채희완 : 네. ‘땅끝’이 공연되던 그 해가 1974년이었는데 맞아요. 6월 22일, 23일 국립극장 소극장, 지금은 국립극장 하늘오름극장인가 달오름극장인가. 그런 이름으로 바뀐 무대였습니다. <이애주 춤판>이란 제목으로 이애주 선생의 첫 작품 발표에 1부, 2부로 나눈 중에 2부의 무용극 ‘땅끝’이라는 작품을 올렸습니다. 1부는 전통춤의 여러 종목들을 올렸습니다. 그런 개인 발표회에 탈춤이 들어가 있는 것, 또 불교의식춤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마도 최초였을 겁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라서 춤 공연이 1년에 한 20건, 한 달에 한 두편 쯤 되면은 적합할 정도의 아주 드문 드문하고 귀한 그런 공연이었어요. 그때 27살인 이애주 선생의 첫 발표회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애주 선생의 발표회를 보고 제2의 최승희의 첫 출발점을 보게 되는구나. 그런 설레는 분위기까지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이애주 선생은 적어도 근현대 한국춤의 한 지점에서 아주 어린 연령대에 한 위상을 점유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해에, 그 전인가요? 전후로 해서 서울 신문사에서 주는 예술상이 있었는데, 국악에는 판소리로 박초월 선생이 명인으로 받으셨습니다. 춤으로는 이애주 선생이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 박초월 선생은 소리의 신동이라고 어릴 때부터 추앙을 받았던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의 위상에까지 거의 동급으로 상을 받았던 겁니다. 근데 그 당시에 이애주선생은 서울사대 체육과 및 대학원을 마치고, 여러 군데 강사로 나가시면서 동시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학사 편입을 해서, 71년에 3학년, 그 다음에 4학년 그 다음에, 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병욱 선생님 밑에서 활동을, 이제 학문도, 춤도, 그리고 사회 활동도 그렇게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네의 첫 발표회에 ‘땅끝’이라는 춤극을 같이 하게 된 거죠.
출연자들은 한 반 쯤은 각 대학의 탈춤반 중에 괜찮다고 하는 대학탈꾼들만 한 학교에 한 사람씩 뽑았고, 아닌 이들은 기획 쪽으로 옮겨서 그 당시에 있었던 각 대학의 탈춤반들이 총동원되는 그런 광경이었어요. 그리고 이애주 선생이 접촉했던 젊은 여성춤꾼들이 또 반쯤 차지해서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거기에다 김민기씨도 탈춤을 접해 배운 지 그야말로 다 합쳐서 한 30시간도 안 되는데 출연까지 했습니다. 아까 장만철, 장선우 씨도, 그 양반은 제 다음에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에 2대 회장을 맡았던 친구인데요. 춤은 꼭 뭐 좀 그렇지만, 그 영화의 활약상보다는 조금 못 미치는데도 아주 열정적으로 했고, 뭐 누구 누구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정병훈 : 김영동, 이종구 선생)이종구 선생, 김구한 선생, 김영동 선생, 국악원 악사분들, 나중에 전부 다 보유자분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도 이미 명인이었습니다. 그 분들도 이말삼초, 20대 말 30대 초반의 연세들이었는데요. 그 분들이 합세해 가지고 공연을 했습니다. 춤극이니만치 춤으로 주인공은 처녀와 청년인데, 이애주와 정재만이 맡았습니다. 정재만 선생은 이미 한영숙 선생의 승무의 수제자로 한국춤의 황태자란 칭호가 따라붙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이들을 못살게 구는 섬주 역을 맡았습니다. 춤극의 스토리는 한 줌에 잡힐 듯 간명합니다.
이애주춤판에서 최초의 춤극 <땅끝>을 올려
채희완 : 어느 외딴섬에 섬주가 있어 그 섬을 통치하여 이끌고 있었습니다. 기근과 역병과 환란이 계속 겹치자, 섬주는 처녀공양을 생각해 내고서는 주민들을 모이게 한 다음 한 처녀를 점지해서 그 다음 날 바다에 바치는 그런 의식을 합니다. 그날 밤에 그네를 사랑하는 청년과 점지된 처녀가 섬주의 사당에 들어가서 몸을 던지듯이 불을 태우고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을 칩니다. 그러자 긴급소집된 도민들에 의해 쇠갈퀴가 바다 한가운데로 던져져 두 청춘 남녀는 다시 해안가로 끌려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이렇게 기근, 점지, 사당태움, 탈출, 해안가 등 다섯 장면을 주축으로 해서 만들어진 춤극인데요. 그 작품은 김지하 시인이 수년 전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구상한 것을 술집에서 얻어 듣고, 그것을 춤쪽으로 옮긴 것이지요. 그 당시에 김지하 시인은 감방 생활을 몇 번째 하고 계신 때였습니다. 그때 대학 탈춤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뽑아가지고 출연시키기로 하고서 연대 쪽에 배당을 내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연세대 탈춤반은 73년도에 창립해서 아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특히 거기에 성내운 지도교수님께서 계셔서 방향도 아주 튼튼하게 되어있고, 또 정현기 선생이라든지 또 (정병훈 : 박정세) 박정세 선생이라던지 (정병훈 : 박정세 목사, 나중에 목사님이 됐죠) 그런 분들이 큰 배경이 되어가지고 아주 튼튼하게 자리잡은 곳인데요. 그 동아리에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로 돼 있는 정수범씨가 탈춤꾼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친구는 그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못하고 그 대신 정병훈 선생이 출연을 하게끔 적극적으로 제가 천거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탈춤을 접한 지는 또 그야말로 도합해서 (정병훈 : 세달쯤) 얼마 안 되는 시간인데, 본인의 열정과 눈빛과 그 어깨짓이 참 든든하다 싶어서 제가 추천을 했는데, 이애주 선생이 뭐라고 해야 될까요, 어여삐 여겨서 같이 출연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공식적인 인연을 깊게 맺게 된 거죠.
정병훈 : 그때 제가 낚여서 여태까지 이 탈춤판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 졸업 논문을 제가 선배님으로부터 받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때 탈춤이 주제였잖아요? 그 논문에 대해서 잠깐 소개해 주시죠.
채희완 : 저는 74년도에 서울대 미학과 조교일을 보게 됐습니다. 대학원생 시절이죠. 지금 말씀드렸듯이 74년도가 저로서는 탈춤활동을 최후까지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던 신나는 때였는데 학교에서 조교 생활을 함께 하게 돼 가지고 한편으로는 신나면서도 마음으로는 밀린 공부를 언제 하랴, 여간 바쁜 게 아니었지 싶습니다. 그리고 75년도에 ‘오둘둘(522)’ 사건이라고 대학 탈춤반, 문학반, 연극반이 중심이 돼 가지고 벌인 대학문화시위가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농대 4학년 학생이었던 김상진군이 교정에서 박대통령에게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할복으로 목숨을 끊은 비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대학장(葬)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탈춤식으로 해서 장례 행렬로, 서울시 한복판까지 가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를 해가지고 의례를 시작했는데 사전에 일망타진 당했죠. 많은 학생들이 ‘오둘둘’ 사건에 관련되어서 감옥에 갔습니다. ‘오둘둘’ 사건은 저로서는 70년대 중후반 ‘민청학련사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5월 22일을 두고 ‘오둘둘’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 며칠 전, 5월 19일 날 베트남이 패망했습니다. 패망이라고 하지만 인민에게는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신정권이 유신에 대한 발언을 하는 자는 당연히 잡아간다, 뿐만 아니라 유신에 관해서 발언하는 자를 잡아간다고 발언하는 자도 잡아간다, 그렇게 했습니다.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그런 때에 그야말로 말문을 트는 것을, 문화 행사로, 그것도 김상진군의 장례 행렬로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대학 문화의 숨은 에너지를 응축하고 발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참으로 떳떳했습니다.
서울농대생 김상진 군의 죽음을 대학 장례행렬로 한 ‘오 둘둘’ 사건
채희완 : 저는 그 일에 관여한 분마다 제게까지는 폐해의 불똥이 튀지 않토록 처음부터 철저하게 보안해 주셔서 조교 생활을 질기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한 달이 지나고 1년 6개월간 주요 출근지가 중정과 경찰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조교 생활을 간간히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해에 1976년 2월에 재임용, 교수 재임용제이라는 것이 내려 왔습니다. 국립대학은 조교까지 재임용 대상으로 됐습니다. 거기에 해당자가 돼서 짤렸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자른다는 것은 없었습니다만은 이미 그렇게 되었지요. 당시 사지가 멀쩡한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던 저는 이를 계기로 할 일을 탈춤 쪽으로 다잡았습니다. 탈춤식으로 살아보자였습니다. 이를테면 공동체의식의 사회화랄까요?
석사학위위 논문은 첫해 냈는데 안됐고, 다시 오기가 나서 썼습니다. 탈춤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당시에 ‘민중문화를 어떻게 보는 게 마땅한가?’라는 그런 시각으로 탈춤의 예를 드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을 ‘가면극의 민중적 미의식 연구’라고 했습니다. 원래 제목은 ‘집단연희의 민중적 미의식 연구’였습니다. 집단연희, 탈춤, 이것이 공동체의 문화로서 예술 행위의 주재자를 개인으로 두지 않고 집단으로 둔다라는 점에서 저는 큰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민중적 미의식’, 이 용어를 가지고 거듭 탈락을 당하게 되는데요. 그 당시 70년대에 지식인 사회에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민중이란 무엇인가’, ‘나는 민중인가?’ 그 두 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민중이란 용어는 일종의 금기어이기까지 했습니다. 학문 세계에서 그런 용어를 쓴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용케 그것을 견뎌가지고 했습니다. 탈춤반 지도교수이셨던 정병욱 교수조차 그냥 ‘한국인의 미의식’ 이렇게 하면 될 걸 ‘왜 하필이면 민중적인 미의식이라고 하느냐.’ 하고 추궁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아직도 그렇습니다만은 ‘나는 민중인가?’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주체인데, 과연 민중은 누구인가? “생명의 담지자 민중인가” 아직까지 그런 고민 속에 있습니다마는 제가 이 탈춤을 접하면서 몇 가지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한 가지는 민속학이 학문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것, 저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학문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중심으로서 눈여겨 봐야 될, 그렇게 사는 삶을 눈여겨 바라보는 핵심적인 학문이 민속학이라고, 조금 더 용어를 잡는다면 민중학, 민중생활학, 민중민족학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끔 된 거죠. 학문의 대상이 그냥 그냥 사는 보잘 것 없이 사는, 사는 것도 아닌, 역사나 문화의 떠올림 받은 적이 거의 없는 그런 삶, 그런 사람의 삶에 대해서 학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일컬어 ‘민속학’이란 용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물론 나중에 민속학의 여러 세계적인 조류, 흐름을 보니까 민족주의 민속학, 사회주의 민속학, 문화인류학적 민족학, 비교민속학 등등의 여러 부류로 나뉘고 합니다. 저도 생각을 해왔습니다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그냥 그냥 사는 어떤 기층 아래의 것,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삶과 같이 학문을 하는 것이 저는 민중학, 민중의식학, 민중세계관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런 일에 기여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서 시민, 대중이란 용어보다 민중, 민중, 그렇게 하는데요. 아직도 크게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국인의 미의식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미의식이어야 된다고 아직까지도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미의식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미의식으로, 한국미학이 아니라 민족미학으로
채희완 : 저는 한국 미학이 아니라 ‘민족미학’이어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그 민족의 개념 속의 중심은 민중입니다. 기층민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역사 창조의 정체 세력이라고 할 수 있고, 넓게는 막막히 ‘중생’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삶, 거기에 관한 학문으로의 접근, 그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역사학이나 문화학이나 또 제가 전공하고 싶어하는 미학에서 핵심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욕과 의지를 처음 탈춤을 접하면서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런 공부라고 하는 것이 꼭 책만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의 실증 자료들, 이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구술 자료, 또 그 삶 자체에 접근해서 얻어낼 수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것은 일찍이 조동일 선생이 여러 민속 현장에서 자료를 채취해 가지고 그 자리에서 민속지적 구성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또 미학적 분석과, 그 자리에서 문화적인 해석을 가할 때, 그런 작업 중에 특히 ‘서사민요연구’라는 책에서 초기 작업의 성과를 보이셨는데요. 그런 것에 한 번 의지해서 해보는 학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 중심으로 하는데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업의 성과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 그리고 위대한 사상가들의 예술관, 미학적 견해를 중심으로 해왔던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름조차 내세울 수 없는, 형편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 의식과 미의식은 무엇인가?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미학적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이 탈춤을 접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제가 처음 탈춤을 접한지 얼마 안되는 때인데, ‘양주별산대놀이’를 하는 그 현장에 갔습니다. 대학 탈춤반 사람들하고 같이 가서 거기에 현장에 보유자로 계신 분들, 거기 또 전수자로 일하는 젊은 친구들 하고 같이 얘기를 나누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을 이장님을 비롯해서 그 마을의 유지급들, 그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왜 우리한테 오질 않고 저 쪽에 가서 그러고 비비고 있냐? 호되게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곳에 왔다면 먼저 우리를 보고서 그 동네에 접근하는 시초로 잡아야지, 저런 개망나니 같은 사람들을, 우리 마을에 있게끔 한 것만 해도 오감한 것인데 이 대학생이라는 자들이, 또 학문에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자들이 왜 저렇게 접근을 하느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회별신굿이 있는 양반마을에 가서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탈춤을 접근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제가 한 4~50년은 전의 이야기이지요, 70년대 초중반 시절의 얘기입니다. 물론 탈춤이나 민속 연희물들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말하자면 궁중악이라든지 궁중의식이라든지, 고귀하다고 누구나 다 인정하는 그런 학문적, 예술적 그 연행 행태들, 이런 것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종목들은 그 지정 받는 데 크게 고생들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종묘제례악 같은 것은 두말 않고 지정하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마는, 바닥에 사람들이 놀았던 이런 종목들은 그야말로 예술성이나 문화적 가치로 보나 예술 이전의 것들로 밖에는 평가할 수 없는 것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민속연희물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선학들께 고마움과 존경을
채희완 : 그것은 이제 나중에 우리가 알아서 그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인데, 그때 이런 것을 지정하기 위해서 애쓰신 선학 선생님들을 저는 학문적으로, 또 인생론적으로 참으로 존경합니다. 그런 분들 중에 여러 분들을 저는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분들과 연관된 얘기는 할 시간이 없습니다마는, 그분들은 저처럼까지는 참혹하게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거기 현장 자료 수집할 때도 크게 대우를 받고, 학자로서 그런 대우를 받아가면서 그것을 채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그렇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다릅니다마는, 그러나 그분들이 스러져가는, 또는 툭 치면은 어디갔는지도 알 수가 없는 그런 바닥에 억울한 사람들의 그 삶의 통절함을 일으켜 세워서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바탕이 된다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 그것이야말로 탈춤을 추면서 제 공부 길을 밝혀준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는 그 당시에 탈춤을 추면서, 또는 탈춤운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딴따라’ 라고 얘기했습니다. 딴따라, 연예인이죠, 요즘으로 하면 밤무대 뛰는 것인데 저는 그 딴따라를 지향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한 판 잘 놀아본 적이 없지만, 낮에는 서생노릇하고 밤무대 뛰는 것을 지향한다. 저의 인생관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서생 노릇과 딴따라
정병훈 : 그렇게 노시고도 아직도 미진하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한데요. 이대로 해서 잠시 물을 한 잔 드시고 딴따라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좋습니다. 지금 이제 그 논문 말씀하시면서 선생님의 탈춤 운동의 기조, 기반이 되는 생각들을 지금 얘기하고 계신데 저도 민중, ‘민중적 미의식’ 이라고 하는 것을 채희완 선생 논문을 통해서 처음 접했고 또 그 당시에 박정세 선생이 우리 선배였는데요. 졸업 논문으로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민중의식에 대해서 또 논문을 쓰셨어요. 그래서 그 두 편의 논문이 제가 탈춤하는 데도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지금 이런 생각들이 저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학생들, 대학 탈춤, 탈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딴따라 얘기를 조금 더 하시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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