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모두 사살하라(Kill'em All)"
북한군이 남침 후 인근 마을까지 진격해오자
마산 진전면 곡안리 주민들은 1950년 8월 2일,
성주이씨 재실로 몸을 피해 모였다
1950년 8월 10일 오후 7시30분경,
미군 통역관이 재실에 와 둘러본 후
주민들에게 다음날 아침에 옮기라고 전했다
며칠 전 보도연맹원인 남편이 지서에 불려갔던
황점순은 두 아들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녀와 주민들이 아침밥을 먹던 다음날 7시경,
미군의 소총과 기관총이 재실을 향해 불을 품었다
전투기도 날아다니며 기관총을 쏘아댔다
종일 총소리가 울렸으며 영문도 모른 채
주민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황점순은 아이를 안고 뒷산으로 도망쳐
자신은 살았으나 아이는 죽어 있었다
그날, 마을 주민 86명이 무참하게 죽었다
무심히 세월이 흐른 후 지역에서
황점순과 유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도왔다
뜻 있는 시민단체와 신문사 기자들,
민간인학살사건희생자 유족단체가 힘을 합쳐
미국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으나 묵묵부답이다
전쟁에서 미군은 한국을 크게 도왔지만
피난민을 모두 적으로 간주했다
영동의 노근리에서, 칠곡의 낙동강 철교에서
단양의 곡계굴에서, 창녕의 무태재 등
전국에서 수많은 피난민을 학살했다
아직까지, 미군에 의한 피난민들의 죽음에
미국의 진심어린 사과나 보상은 없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주한미군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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