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어떤 진술
– 주남마을에서
바깥으로 가는 길은 모조리 막혔다
감시탑과 옥상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불이 난 버스 안으로 총알이 쏟아진다 뒤집힌 천정 밑 조각난 마네킹처럼 살점이 떨어지고 팔다리가 튕겨 나가고 파랗게 질린 얼굴이 구석에 박힌다 문들이 사라지고 이름이 사라졌다 지워진 눈 코 입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경적처럼 터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손에 잡힌 손가락과 흰 뼈의 시간들, 얼굴을 잃은 채 떠내려간 아빠와 딸 포승줄에 꽁꽁 묶인 밤, 겁에 질린 방 안에는 먹다 남은 밥상이 뒤집어져 놓여 있고 녹이 슨 수저와 메마른 입술뿐 바깥으로 가는 길은 모조리 막혀있어 손을 흔들면 손이 보이고 발을 구르면 발이 보이지 저 먼 곳 불빛 반짝이는 시간을 쓴다 쏟아지는 불꽃의 방아쇠를 당기는 손, 누구의 손인지 묻고 또 물으며
아직도 우리는 여기, 갇혀 지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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