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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봉사' 류경녀 봉사원 "情이 그리워 그만 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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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봉사' 류경녀 봉사원 "情이 그리워 그만 둘 수 없다"

[인터뷰] 경기적십자 이천설봉봉사회 류경녀 여사

"봉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 철부지 때였으니까."

1981년부터 올해까지 40여 년째 경기 이천설봉봉사회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류경녀(81) 여사는 자신이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당시 40살의 나이부터 대한적십자사에 몸 담아 봉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류 여사는 마치 '봉사가 별거냐'는 듯 당연한 일을 해왔을 뿐이라면서도,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1980년대의 봉사활동은 상대적으로 여유있고, 각 마을에서 소위 '알아주는' 이들이 주류가 된 활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회에서 활동하던 류 여사는 자신의 경력이 봉사를 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초라했다'고 회상한다.

기존과는 보다 높은 수준의 봉사활동이 이어지면서 자칫 활동을 포기할 뻔도 했지만, 주변에 있는 봉사회원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민들을 보며 그녀는 쉬지않고 봉사에 매진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동안 계속해서 봉사활동에 매진한 결과, 그녀는 이제 적어도 동네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봉사원이 됐다. 활동 기간만 42년차에 달하는 그녀의 누적 봉사시간은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시간인 1만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1만3000여 시간이다.

이는 현재 경기도 내에서 활동을 이어오는 봉사원 중에서도 손가락 내 꼽히는 수치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봉사 이외에 별도로 지역 주민들에게 쏟은 시간을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그녀의 인생이 이천 지역에 투입된 셈이다.

프레시안은 류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이천 지역에서의 봉사활동 경력이나 앞으로의 각오 등을 들어봤다.

다음은 류 여사와의 일문일답.

- 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설봉봉사회 류경녀 여사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봉사회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이천 새마을회에서 일하면서 주로 봉사와는 성격이 다른 시골 활동을 주로 해왔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을 때는 나이가 어린데도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새마을회에서는 주로 서로 농사를 도와주거나 군부대에서 김장을 하는 등의 활동을 8년 동안 해왔다.

그러던 중 설봉봉사회의 초대 김광수 회장의 눈에 띄어 적십자 봉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봉사회는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다보니 새마을회와는 훨씬 수준이 높은 봉사활동이 계획됐다.

어린이와 아동, 노인들을 방문하고 말벗을 해주는 활동을 비롯해 군병원 행사, 6월 보훈의달을 맞아 홀로 남겨진 어머니들을 방문했다.

당시는 아직 한국전쟁의 여파가 남아 있어 경제상황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에 적십자 7대 원칙에 따라 더 배고픈 이들에게 더 많은 음식을 나눠주면서 봉사활동을 이어나갔다.

물론 재난관리책임기관이자 긴급구조지원기관으로서 큰 장마나 화재 등을 비롯한 재난 현장에 가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새마을회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적십자 봉사회 활동이 일정 부분 내 사비를 들여서 진행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새마을회 활동은 정부 보조금만으로 활동했었다.

나는 내 돈으로 봉사를 진행한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나 아까움이 아닌, 오히려 봉사에 더 진심을 담게 된 계기가 됐다. 내 사비를 들여서 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더 긍지가 생기고 '진정한 봉사'라는 느낌이 더 크게 와 닿았다.

- 기억에 남는 봉사 사례가 있다면.

내가 맡았던 취약계층 가정 중 잘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어서 '좀 더 잘할걸'이라는 아쉬움만 느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는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아이가 있는 가정을 맡았을 때다. 당시 6학년이던 아이는 부모님이 없이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혼란을 겪는 상태였다.

이에 국립의료원에 아이를 입원시킨 뒤, 의사를 물어 신체적으로 성별을 확정짓는 수술을 마쳤다. 이어 몇 달을 그 아이를 찾아 어려움과 불안을 해소해주고, 중학교까지 졸업시켰지만 결국 그 아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이의 행방을 찾아 연락을 하고, 설득도 해봤지만 결국 아이가 그대로 떠나면서 봉사원들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된 기억이 남는다.

또 한 번은 부모님이 없고 할머니랑만 거주하는 4남매가 있는 가정이었는데, 제일 맏형이 계속해서 탈선하면서 보살피는 것을 포기한 적이 있다. 

당시 그 아이가 서울로 홀로 떠나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할 때도, 이후 다시 탈선해 집을 떠날 때도 끊임없이 바로잡으려고 노력해봤지만 결국 철이 들 때까지 봉사원들이 버티지 못했다.

이처럼 잘 된 사례가 거의 없어 내 안에서는 아이들을 끝까지 보살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매번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을 뿐더러, 봉사원들도 자신들의 살림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취약계층 관리 사례를 제외해도 다른 봉사활동 역시 어려운 점이 많다.

이상적인 적십자 봉사활동이란 몸과 마음이 모두 따라주는 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빼서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다. 정부나 관련 기관들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설봉봉사회 류경녀 여사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 앞으로의 봉사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 2년 넘게 코로나19로 인해 적십자 내에서도 봉사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봉사회 차원에서도 반찬봉사 위주로만 활동하는 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있지만서도, 나중에는 다시 적십자와 각 봉사회가 활기를 찾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앞으로 더 많이 활동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천 지역의 취약계층 가구 중에서 코로나블루를 호소하는 분들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각자 의지를 갖고 위기상황을 헤쳐나간다면 취약계층 가구도 무사히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봉사회가 해나가는 활동에 비해 내가 따라가지 못해 안타까울 정도로 나이가 있으니만큼, 신체적 한계로 인해 채 못다할 봉사가 그저 아쉬운 마음이다. 

다만 앞으로의 지역 봉사 활동을 위해서는, 적십자 차원에서 봉사기금 등으로 각 봉사회에 활동력을 불어넣어준다면 좀 더 많은 활동을 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봉사를 시작했을 당시 40살이면 철부지 때다. 근심걱정 없이 봉사를 했고, 성격도 활동에 맞았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며 몸이 힘들지만, 정이 그리워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어 좀처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관에 들어갈 때까지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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