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와 총기를 비롯한 민감한 쟁점에서 거침없는 '우클릭'하는 연방대법원에 미국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일(현지시간) 최근 대법원의 결정들에 미국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를 두고 '미 합중국'(the United States)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으로 부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수가 확실한 우위를 점한 대법원은 지난 열흘 동안 낙태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정부의 온실가스 규제 권한에 제동을 걸며, 진보 성향 주(州)의 총기 휴대 규제를 차단하는 등 거침없이 힘을 과시했다.
그중 가장 파급력이 큰 대법원의 낙태 결정 직후 미국의 절반이 곧바로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조치에 착수한 반면 나머지 절반은 오히려 낙태 권리를 강화하고 나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북동부와 서부 해안으로 대표되는 진보 지역, 중부와 남동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 지역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구도다. 물론 보수 지역에 둘러싸인 진보 진영의 '섬'과 같은 일리노이주와 콜로라도주, 북동부에서도 보수 성향을 유지하는 뉴햄프셔주 등 예외는 있다.
지역 간 갈등뿐 아니라 같은 주 안에서도 도시와 시골 지역으로 진보, 보수가 갈라지는 현상도 자주 목격된다.
양측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성향과 맞는 지역으로 이주를 고민하는 미국인들도 적지 않다고 신문은 전했다.
특히 낙태 권한을 둘러싼 갈등은 과거 노예제 폐지 과정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낙태를 금지한 주들과 인접한 일리노이와 콜로라도가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의 '피난처'를 자처한 것은 과거 노예제에 반대했던 북부의 주들과 비슷하다고 낙태권 옹호론자들은 보고 있다.
반면 낙태 반대론자들은 그동안 낙태 권리를 인정한 1970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흑인의 시민권을 부정한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에 비유하면서 오히려 대법원의 이번 결정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게 노예 해방과 같다고 주장한다.
진보 성향 주정부와 주의회는 연방대법원 결정과 상반되는 조치로 진보적 가치 수호에 주력하고 있다.
뉴욕주 상원이 전날 낙태권과 피임권을 주 헌법에 명문화하는 조항을 통과시키고, 공공장소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버지니아주와 메인주 등이 탄소 배출을 규제하기 위한 방안을 공동 추진하고,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 주정부들도 '제로 배출' 자동차와 청정연료 기준 수립을 위해 협업 중이다.
총기 문제의 경우도 워싱턴DC와 델라웨어주 등 11개주가 이번 주 일부 무기와 대용량 탄창 등을 금지한 반면, 텍사스주와 뉴햄프셔주는 총기 규제를 풀고 있다.
예일대 역사학자 데이비드 블라이트는 NYT에 "대법원이 분열을 초래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것인지 이제 막 보기 시작한 것"이라며 갈등 악화를 점쳤다.
판결과 민심…美 낙태권 폐기서 확인된 거리
연방 차원의 낙태 권리를 인정했던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미국 대법원의 지난달 24일 결정이 던진 화두 가운데 하나는 판결과 민심과의 관계다.
1973년에 이어 1992년 재확인됐던 연방 차원의 낙태 권리가 약 50년만에 공식 폐기됐던 시점을 전후해서 나온 여론조사에서는 이번 결정과 달리 '낙태권 유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가령 대법원 판결 전인 5월 2일 나온 갤럽 조사에서는 55%가 낙태권을 지지했다. 대법 판결 직후에 나온 미국 CBS방송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9%가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반면 연방 대법원에서는 9명의 대법관 중에 5명이 찬성했고 4명이 반대, 민심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미국 진보 진영에서 이번 결정을 정치적 판결이라면서 분노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이다.
대법원을 구성하는 대법관의 성향이 보수 우위로 재편된 것 외에 외적 상황은 달라진 게 없는데 두 번에 걸쳐 반세기 동안 인정됐던 '헌법상의 권리'가 없는 것이 됐다는 인식에서다.
실제 이번 결정에 반대했던 진보 대법관 3명은 반대 의견에서 "법원이 흐름을 뒤집은 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고 오직 그 이유 때문"이라면서 "그것은 이 법원의 구성이 변화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연방 대법원이 보수 우위가 된 것은 트럼프 정부 때다.
종신직인 대법관은 사망, 사직, 탄핵 등의 경우에만 공석이 발생하게돼 후임이 임명되는데 공교롭게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계기가 3번이나 생겼다.
이 때 들어간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이 이번 판결에 손을 들어준 것이 헌법 해석이 변경된 결정적 이유인 셈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판결 당일에 "내가 공약한대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자신의 공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과는 반대로 보수 진영이 애초 '괴짜'인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낙태권 판결 폐기'였다는 말도 있다.
이와 관련, 트럼프 정부 출범 2년차인 2018년 만났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지지자는 당시 기자와 만나 "트럼프의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에서 계속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낙태권 판결을 뒤집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이번 판결은 미국 보수 진영의 큰 전략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며, 적지 않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런 시각으로 이번 사태를 보고 있다.
문제는 대법 판결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될 경우 최고 사법 기관인 대법원이 받게 되는 타격이다.
민심과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의도 자체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을 경우 신뢰의 위기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진보 성향인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2018년 "우리한테 군대나 돈이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때만이 대법원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 대법원이 맞는 이번 위기가 일시적인지 근본적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갤럽 조사에서 미국 대법원을 '상당히' 또는 '꽤' 지지한다는 응답은 25%에 그쳤는데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이클 살라먼 위스콘신 주립대 교수는 <AP> 통신에 "여론조사로 확인할 수 있는 특정 사안에 대한 지지는 왔다 갔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제도에 대한 신뢰 자체는 탄력성이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결정으로 (대법원) 제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신뢰를 회복하는 탄력성 측면에서는 한계에 이른 게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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