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집권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정치권에서 가장 애용되어왔던 ‘국민’이라는 말은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맞은 듯하다. 얼마 전 대통령집무실 명칭도 자칫 ‘국민의집’이라는 이름으로 될 뻔 했다. ‘국민’이라는 말이 범람하는 사회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 ‘국민’이라는 용어는 본래 영어 nation의 번역어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많은 용어와 마찬가지로 ‘국민’이라는 말 역시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다만 ‘국민’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만들어진 말은 아니고 원래 존재했던 한자어이다. 즉, 한 나라(國)의 백성(民)이라는 의미로서 <주례(周禮)>나 <좌전(左傳)> 등 고서에도 출현하고 있다.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가 정착시킨 ‘국민’이라는 용어
처음 근대 일본에서 ‘국민’이라는 용어는 광범하게 사용된 것은 <국민지우(國民之友)>라는 잡지의 제목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7년 창간된 이 잡지의 제목은 미국 잡지 <Nation>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국민’이라는 용어를 근본적으로 정착시킨 핵심적인 인물은 일본 근대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근대화론의 선구자이자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초기에 서양 민권사상을 받아들여 ‘인민’과 ‘국민’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차 국가구성원의 용어로서 권리의 측면이 강조되는 ‘인민’ 대신 ‘국민’을 채택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명확하게 국권(國權)을 민권(民權)의 우위에 설정하게 된다. “一国の帝王は一家の父母の如し(일국의 제왕은 가족의 부모와 같다)”나 “国は国民の殻なり(국가는 국민의 껍데기이다)”라는 그의 글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 그는 분명하게 국권론자로 전향하면서 일본의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고 국권론의 전제 위에 규정되었던 이 ‘국민’의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신민(臣民)’과 사실상 동일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대제국헌법>나 <교육칙어>에서는 “汝臣民”, 즉 “너희 신민들”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고 심지어 1945년 일본 천황의 <항복조서>조차도 이 “汝臣民”로 시작하고 있었다.
‘국민’이라는 용어, 일본과 한국 외에 없다
우리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이라는 조항이 많다. 그런데 독일 기본법(헌법)을 보면, 관련 조항 모두 “Alle Deutschen...”, 즉 “모든 독일인은...”으로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 프랑스 헌법은 au peuple, 즉 peopl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밤면 일본 헌법은 “すべて国民は....(모든 국민은...)”이다. 물론 우리 헌법이 일본 헌법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의 주창자로서 마침내 그것을 실현시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정착시켰던 ‘국민’이라는 용어가 그가 ‘정복’을 주창했던 이 땅에서 이렇듯 시대의 유행어로 된 지금의 모습은 우리 역사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아이러니가 응축된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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