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6월 말 나토 정상회담 참석 계기에 한일 정상 간 접촉이 거론되었다. 지금까지 일본 측의 반응을 볼 때 성사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사전 정지 차원에서 추진했던 박진 외교장관의 방일도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2021년 6월 G7 정상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매달리고 일본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형국이다. 언론에 따르면 일본 측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측의 대응이 보이지 않아 환경이 정돈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선 정상회담부터 해 보자는 새 정부의 접근이 일본 측에 먹히지 않은 것이다.
정부가 한·일 간 가장 시급한 사안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의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만간 민관합동기구를 출범시킨다고 한다. 우선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매각·현금화를 보류할 필요가 있다. 보류가 여의치 않을 경우 한일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피해자들의 이해 내지 동의를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이다. 그동안 일본 측의 반발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대위변제', 즉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일본 기업에 대해 구상권을 보유하되 사실상 행사하지 않는 방안, 그리고 한일 양측이 기금 출연을 통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방안 등이 이야기된 바 있다.
정부와 민관합동기구는 팔을 걷어붙이기 전에 일본 측의 기본 입장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 측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소되었다고 보고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를 이유로 국제사회에 대해 한국은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떠들어 왔다. 일본 측이 문제 삼는 것은 배상 방법, 즉 일본 기업이 피해자에게 직접 지급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다. 2019년 5월 일본 외무성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청구권협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제3국 위원을 포함하는 중재위원회를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였으며, 일본의 요구에 대해 한국의 조야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협정에 분쟁해결절차가 규정되어 있으면 법적 다툼이 발생할 경우, 그 절차를 따르는 것이 상식인데 문재인 정부는 출발선에서부터 한국을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우리 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전제로 제시하는 해법을 일본 측이 받아들일까 의문시된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이 1965년 '청구권협정'을 위배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이제라도 '청구권협정'에 따른 중재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측이 제안을 하면 일본 측은 애초 그들이 제안한 방안이므로 거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몇 가지 한일관계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첫째, 제3국 중재위원을 선임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중재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해 협의하여야 하므로 양측 간 공식 접촉이 이루어질 것이며, 중재 과정에서 양측이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개진할 것이므로 이 과정 자체가 문제 해결을 위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청구권협정 제3조 3항에 따르면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양측은 승복해야 한다. 즉, 중재 결정으로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가 한일간에 이슈가 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중재를 통해 기대되는 가장 중요한 효과는 어느 한 쪽에 불리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한일 양측 모두 국내적으로 다른 의견이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국제 중재는 일반 재판에 비해 어느 일방에 유리한 결정을 내놓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즉, 우리가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재로 가는 경우 문제 해결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으나, 문재인 정부가 '죽창가'만 불러대며 일본 측이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허비한 세월이 몇 년인가? 민관합동기구에서 그간 거론된 해결 방안을 재탕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관련 협정에 따른 중재절차를 통해 제3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길이라고 본다. 냉정하게 말해서 2019년에 우리 측이 일본 측의 중재 요청을 묵살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번에 우리 쪽이 중재위원회 개최를 요청하였는데 일본 측이 거부한다면 양국 사이 갈등 관계에서 공이 일본 쪽으로 넘어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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