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지방선거를 통해 ‘제36대 경기도지사’에 더불어민주당 김동연(65) 후보가 경기도정을 이끌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지난 선거기간 동안 당내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의 잡음과 상대 후보의 수 많은 네거티브 공세를 이겨내고 당선에 성공했다.
‘일 잘하는 김동연’이라는 선거운동기간 김 당선인이 외쳐온 말처럼 그는 자타공인 ‘경제 전문가’다.
고등학교 졸업 전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공직에 입문한 뒤 경제기획원과 기획예산처, 기획재정부 등을 거쳐 초대 국무조정실장과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경제통’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던 그는 이제 민선 8기 경기지사로 당선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로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 소년가장 김동연
1957년 1월 28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태어난 김동연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지만, 11살이 되던 1967년 사업가이던 부친이 불과 서른셋의 나이에 아내와 네 자식을 남겨둔 채 타계하면서 장남으로서 소년가장의 짐을 짊어지게 됐다.
갑작스러운 가장의 부재는 급격한 가세의 몰락을 가져왔고, 결국 1968년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으로 이주했지만, 그마저도 도시정비 사업으로 헐리면서 경기 광주 대단지로 강제이주돼 한동안 천막생활을 이어갔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비롯해 세 명의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소년가장으로서 진학 보다는 취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덕수상업고등학교(현 덕수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74년 11월 만 17세의 나이로 한국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고졸’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늘 갈증을 느끼던 ‘배움’을 위해 1977년 직장생활과 입시 준비를 병행한 끝에 야간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해 방위병으로 입대해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병역과 학업을 병행했다.
□ 우연이 준 기회, 행정공무원으로의 변신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다시 은행원으로 생활하던 어느 날 김 당선인은 은행 독신자 합숙소에서 옆방 선배의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고시 수험생을 위한 잡지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잡지 속 합격기를 읽으며 고시공부에 대한 뜻을 갖게 됐고, 결국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대학생, 더 깊은 밤에는 고시 수험생이 되는 1인 3역을 하게 됐다.
그렇게 주경야독에 전념하던 김 당선인은 은행원으로 생활한 지 7년 8개월만이자, 만 25세이던 1982년 ‘제26회 행정고시’ 및 ‘제6회 입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1983년 ‘행정공무원’으로는 총무처(現 행정안전부)와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에서, ‘입법공무원’으로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입법조사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무관으로 일하던 그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 공부를 병행한 끝에 1986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에도 또 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미시간대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93년 6월 3년 9개월만에 미시간대 공공정책학 석·박사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본격적인 경제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1994년 대통령비서실 기획조정비서관실 행정관을 시작으로 1995년 재정경제원 초고속정보통신기획단 국가망계획반장 서기관, 1996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서기관, 1998년 예산청장 비서관, 1999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서기관, 1999년 기획예산처 행정팀장, 2001년 기획예산처 재정협력과장, 2002년 기획예산처 정보화담당관 부이사관 등을 잇따라 거친 것이다.
또 2002년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에 오른 그는 같은 해부터 이듬해까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활동했으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은행(IBRD)에서 선임정책관 역할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했다.
2005년 기획예산처 전략기획관으로 돌아온 뒤 기획예산처 산업재정기획단장과 재정정책기획관 등으로 일하면서 참여정부에서 발표한 국정마스터플랜 ‘비전 2030’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2012 기획재정부 제2차관에 올랐으며, 2013년에는 초대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되는 영예를 얻었다.
□ 훌쩍 떠난 공직… 경제부총리로 돌아오다
국무조정실장으로서 공직의 정점에 서있던 2014년 ‘지금이 그만 둘 때’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 김 당선인은 스스로 공직을 떠났다.
그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老眼)처럼 느끼게 될 때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 때 등 스스로 정의 내리고 있던 ‘공직을 떠날 때’가 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공직을 떠난 그의 선택지는 아주대학교 총장직이었다.
2015년 2월 제15대 아주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그는 학생들이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고, 도전에 겁내지 않으며, 실패도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갔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나 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파란학기제(도전학기제)’ 및 해외연수 장학금 제도 ‘애프터유(After You)프로그램’ 신설 외에도 ‘Ajou Global Internship’과 ‘Brown bag Meeting’, ‘총장 Book 릴레이!’ 및 ‘총장 진로 멘토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2017년 5월 청와대에서 경제부총리 제의를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던 그도 거듭된 요청에 결국 같은 해 6월 문재인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이후 경제부총리직을 사퇴한 2018년 12월까지 김 당선인은 3%대의 성장률을 회복했고,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했다.
또 혁신성장의 전도사로 벤처붐을 일으키는 초석을 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한·중 통화스왑’을 연장시키고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을 막는 등 경제안정에 기여했다.
□ 경제전문가, 이제는 경기도의 성장을 이끈다
국무조정실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에도 정치권과 경제계 및 교육계 등의 지속적인 영입 제안을 뿌리친 그는 2년여 간 전국을 돌며 ‘사람’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기회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그 꿈을 실천에 옮겼다.
바로 2021년 9월 8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새로운물결을 창당한 그는 올해 1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단일화를 선언하고 후보직을 사퇴하며 잠시 꿈을 접는 듯 했지만, 지난 4월 새로운물결과 더불어민주당의 합당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경기도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경기도민들은 그에게 ‘경기도를 위해 모든 소임을 다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렸다.
김 당선인은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경기도민이 행복한 ‘새로운 경기’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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