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가게 딸이기 전에, 그리고 쌍둥이 형제의 엄마이기 전에 그녀는 전북을 대표하는 민주화의 여전사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광주학살의 진상을 담은 유인물 2000여 장을 작성해 전북 전주 시내 전역에 뿌리고 전주시민의 항쟁 동참을 시도하다 수배됐던 고 최순희.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알리기 위한 80년 5월 24일에 '유인물 배포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5월 19일 전북대 민속극연구회의 탈춤꾼이었던 고 최순희는 동지들과 유인물을 통해 신군부의 만행에서부터 이웃동네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로 한다.
전주 금암교회에 등사기로 찍은 유인물의 책임을 맡은 그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짜여진 유인물 배포조에 속했다. 유인물에는 신군부에 대한 폭로와 광주 학살 소식이 담겨 있었다. 특히 유인물에는 5월 24일 하오 2시 전주 오거리에 모여 시위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밖으로 알릴 모든 매스컴이 하나같이 막힌 상황에서 신군부의 만행 소식을 전달한 유일한 수단은 이 유인물 뿐이었다.
숨죽이고 제작한 유인물을 전주시내 전역에 뿌리는 시점은 5월 24일 새벽으로 결정됐다. 5월 24일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 사이 전북대생들이 제작한 '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전주시내 전역에 뿌려졌다. 같은날 오후 1시 전주 중앙성당에서는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학생들의 손에 나눠진다.
이후 최순희는 검거망을 피해 다니던 중 7월 10일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보름 뒤인 7월 25일 석방된다.
그는 80년 이후로도 노동운동에 온몸을 던지는 투사의 모습을 이어가지만, 고문의 후유증 등으로 인해 지난 1992년 서른 둘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30년이 되는 고 최순희의 짧았던 삶에는 늘 감시가 붙어 있었다. 전주시 중노송동 풍남초등학교 정문 앞(현재 한국국토정보공사 전주지사 부지)에 있던 쌀가게 옥상에는 어둠이 깔리면서 경찰 잠복조가 밤새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감시 잠복조는 그의 지지 않는 근성에 이기지 못해 도망다니기도 일쑤였다는 것이 당시 이웃 주민들의 전언이다.
쌀가게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가던 그의 부모는 이런 딸이 밉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가슴으론 늘 민주화의 딸로 품었다.
민주화를 위한 모든 것에 양보란 없는 고 최순희이지만, 동네에서는 포근한 옆집 누나, 언니였다. 초등학생부터 중·고교생까지 그를 찾아 배움의 도움 손길을 내밀면, 그는 주저 없이 아이들에 둘러싸여 함께 웃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결혼이라는 행복의 순간이 찾아왔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쌍둥이 형제를 출산한 뒤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꽃다운 나이 사랑하는 가족과 민주화 동지들의 손을 놓고 그렇게 하늘로 향했다.
전북지역 한 언론인은 전주예수병원에서 마지막 모습으로 만난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고 최순희의 두 손에는 늘 수건이 쥐어져 있었고, 민주화의 열망과 그 열망을 위한 고통의 그늘을 늘 스스로 "얼쑤' 추임새로 외쳐왔다"
◆다음은 고 최순희의 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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