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문화는 국가적 기억을 보존하고 후세에 전승함으로써 미래 역사에 기여하기 위한 정책적 영역의 하나이다. 그래서 보훈문화는 한 사회의 역사인식이나 정체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기능이 있다."(서운석, "보훈 선양과 교육, 그리고 문화", <보훈학 개론>, 모시는사람들, 2021, 207쪽).
어떤 조사를 보면, 인생을 80년 산다고 치면 그 중에서 26년은 잠자고 21년은 일하고 9년은 먹고 마시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다른 조사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화내는 데에 5년, 기다리는 데에 3년을 소비한다고 한다. 이런 기간들을 빼면 남는 시간은 16년이다. 그러나 이 16년이 모두 건강하고 활기찬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주말에 TV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면서 안 돌아가는 머리를 긁적일 수도 있지만, 주변 나들이를 하고 바람도 쐬면서 조금은 더 새로워진 마음으로 다음 날 출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싱그러운 시간을 잠이나 화내는 데 보내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보훈문화 여행을 추천해 본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독립문역에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도보로 50m 이내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와보면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 제국주의가 지은 근대식 감옥이다.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에 폐쇄될 때까지 80년 동안 사용되었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 형태인 판옵티콘(panopticon) 구조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히고 죽음을 당했다. 예를 들면, 서울역에 동상이 서 있는 강우규 의사, 허위․이인영 의병장이 이곳에서 처형당했고,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김구, 안창호, 여운형 선생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이곳은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고 나와 몇 걸음만 걸으면 독립관(獨立館)으로 이어진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 뒤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쳤다. 당시 황태자(순종)가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가 1997년 현재 위치에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이 독립관 바로 옆에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2021년도에 세워졌다.
이곳 독립관이 위치한 서대문독립공원 안에는 또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이 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추념탑 중앙에는 태극기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일어났던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추념탑 좌우 40m에는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다양하게 부조(浮彫)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좌측에는 윤봉길·이봉창 의사 상징상, 유관순 열사 만세운동상 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상, 청산리 전투상 등이 있다.
여기서 또 몇 걸음을 옮기면 독립문(獨立門)이 우뚝 서 있다. 독립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상징물이다. 갑오경장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다.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7년 11월 20일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독립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오얏은 자두의 순 우리말로 오얏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꽃문양이다. 독립문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서재필 동상이 있다.
이 장소에 또 하나의 보훈시설이 들어섰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2022년 3월 1일에 임시정부 수립 103년 만에 개관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바로 옆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념관은 바로 이 헌법정신의 내용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공간이다. 이 기념관은 특히 이념과 투쟁방법의 차이를 넘어 통합을 일구어낸 임시정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때에 따라 분화와 갈등이 있었어도 끝내 통합을 달성했던 임시정부의 역사에서 현재의 우리는 그 지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크든 작든 간에 모두 이런 문제를 품고 있을 테니 여기에 와서 한 번 꼼꼼히 해결방안을 강구해 보길 권한다.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고 한다. 오늘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한 번 나서보자. 서대문독립공원을 통해서는 서대문 안산자락길이 연결되어 있고, 안산(鞍山) 정상에는 봉수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가, 자락길 도중에는 천년고찰 봉원사(奉元寺)로 가는 길도 나온다. 봉원사 경내 미륵전 앞에는 ‘한글학회 창립한 곳’이라는 표지석도 볼 수 있다. 추석 선물세트처럼 여러모로 실속 있는 보훈문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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