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세계병역거부자의 날(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Day)'입니다. 이날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거부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며, 전쟁에 동원돼 이웃을 살해하고 세상의 평화를 훼손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개인의 양심에서 시작됐습니다.
'여성병역거부선언'은 이러한 평화운동의 맥락에 동의하며 군사주의가 '정상성 이데올로기'로 선점한 '기존의 의미체계'를 비판하고, 권력이 부여하는 '병역'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타자화되어온 여성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운동입니다. 일상에서 재현되는 모든 종류의 구조적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이자 특히 구조적으로 전쟁을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강화시켜온 군사주의와 가부장 문화 자체를 비판하며 '무엇이 전쟁이고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하는 운동입니다.
한국에선 2018년에 처음 여성으로서 병역거부 선언이 있었고 이어서 2019년에 강정마을에 사는 세 여성이 병역거부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2022년에 네 명의 여성들이 병역거부선언을 하게 되었습니다.2022여성병역거부선언모임
이 선언문은 언어와 몸짓 사이 어딘가로부터 자라났다. 이 언어를 짓기 위해 몸으로 살아온 경험이 필요했던 만큼이나 몸은 맞지 않는 말들을 하나둘 고르다가 기어이 또 실패할 조각보를 엮는다.
강정 마을로 주소를 옮긴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강정에 온 나, 내게 온 강정을 이해하려 매일을 살아왔다.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어 내일을 기다리기도 한다. 팬데믹을 겪으며 서울에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느꼈고, '중심의 삶'을 포기해나간 그 만큼씩 '경계의 삶'이 보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지위가 암묵적으로 기여하고 있던 합법적 폭력의 생김새를 눈과 귀와 발과 손으로 더듬어가는 중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일 바라보는 한라산 백록담과 그로부터 내려오는 바람의 말이기도 하다. 마당에 핀 흰 귤꽃의 말이기도, 깃발을 흔들고 춤추고 노래하는 동료들의 말이기도, 그리고 바라건대 장벽 저쪽을 채우고 선 해군 병사들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같은 빛과 같은 물과 같은 미생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 확률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여성"
나는 '출생 당시 병원의 판별'로부터 시작하는 여성의 서사를 살아왔다. 19세기 소위 과학자들은 성별을 여성과 남성 둘로 나누는 젠더 이분법은 '발달한 문명'의 백인들만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남술라웨시의 버기 사람들은 젠더를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서아프리카 일부 부족사회에서는 5세 이전에는 성별을 결정하지 않거나, 성별을 정할 때 인체 구조가 아닌 에너지를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인도의 히즈라나 인도네시아의 비수, 북미 원주민의 투 스피릿 등 '둘 이상의 젠더'를 포함하는 문화들은 식민 정복자의 동화정책에 의해 말살됐다. 때는 인류가, 혹은 폭권을 가진 자가 이 세계를 균질한 '우리'들만의 것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불균등하며 통제할 수 없는, 그러므로 몰아내어 마땅한 '저들'로 분류해내던 시기였다.
복잡성을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비과학적이며 자문화 중심적인 '선'을 그어 간단히 차이를 눌러버리는 것이 인종차별의 역사라면, 젠더 이분법 또한 그 일부다. 신생아 때 가지는 극히 작은 특징만을 바탕으로 그 존재의 역할과 한계를 고정하는 우리는 여전히 식민 서사 안에 살고 있다.
누가 군대에 징집되고 누가 그렇지 않는가? 이것은 두 성별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다. 한 '부분'이 '전체'를 위해 복역하는 방식을 강제할 뿐 아니라 각 집단 안에도 등급과 위계를 만들어 서로를 도구화하고 스스로를 단속하게 만드는 체제 자체의 문제다.
"병역"
한국은 2021년 세계 군사력 순위 종합 6위, 국방비 지출 순위 8위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서로를 살리고 돌보기 위한 '협력'을 요청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더 잘 죽이기 위한 '경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2500만 명)에 맞먹는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 것(2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재난으로부터 우리가 싸워야 하는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죽임의 문화임을 배워야 한다. 군사주의는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죽일 것인가, 어떤 것이 죽어 마땅한가, 무엇이 먼저 죽고 나중에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죽임의 논리이다.
바로 그 죽임의 논리로 인해 자체 회복력을 잃어가고 있는 지구 행성의 위기 앞에서, 국경은 공생이 아닌 공멸을 위한 문턱일 뿐이다. 돌봄과 죽임의 논리는 공존할 수 없다. 나는 국민의 이름으로 죽임을 정당화하는 국가에 복역하기보다, 무국적 인간동물의 이름으로 치유의 연결망 만들기에 참여할 것이다.
"거부"
나는 '병역거부자'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재 진행형의 도망자라고 느낀다. 가부장제로부터,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군사주의로부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안팎으로 촘촘히 짜인 폭력의 구조로부터 한 걸음씩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중이다.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대체역 판정을 받은 친구가 있다. 수 시간에 걸친 면접, 증거자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에게는 그런 식으로 인정을 획득할 만큼의 '순수한 양심'이 없음을 알았다. 나의 신념 체계는 온통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것투성이이며, 용감하게 폭력에 맞설 배짱보다는 흐릿하게 물러서서 확신이 생길 때까지 유보하고 버틸 정도의 고집밖에 없다.
스테파니 앳킨슨은 "자랑스러운 탈영병"으로서 말한다. "전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갈등에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없는 언어를 찾아가는 길고 연속적인 움직임 가운데 병역 거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선언"
다중을 향한 외침이라도 곧고 매끄러울 수는 없다 믿으며 이 선언을 닫는다. 우리는 모순되고, 다층적이며, 온통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단선적인 경험을 하는 균일한 주체가 아니기에 그렇다. 복잡함으로 인한 막막함에 가로막히지 않고 더 다양하고 불완전한 선언들이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우리가 침묵할 때, 우리는 우리를 침묵하게 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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