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는 20여 년간 SF 소설을 써온 곽재식 작가가 SF 영화를 보며 한 생각들을 모은 에세이다. 'SF를 읽는 법', 'SF를 만드는 법', 'SF를 보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엮인 앞의 세 장에서는 SF 영화의 작법과 기술적 요소를 다룬다. 'SF와 사회', 'SF와 과학기술'이라는 제목으로 엮인 뒤의 두 장에서는 SF 영화의 단골 주제와 소재를 다룬다.
저자는 "다양한 SF를 널리 접한 사람이라면, SF의 다양한 모습과 재미를 이것저것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SF에 대한 편견을 경계한다. 실제로 책에는 <터미네이터>, <토탈 리콜> 같은 이 분야의 고전부터 <외계에서 온 우뢰매> 같은 어린이 활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가 소개돼있다. 저자는 이 영화들 사이에 순위를 매기지 않고, 개별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이 책은 SF 영화에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에게 균형잡힌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매니아라면 SF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수다스러운 문체와 상투적이지 않은 발상이 만들어내는 '읽는 맛'
<채널을 돌리다가>의 장점 중 하나는 수다스러운 문체로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상투적이지 않은 발상이다. 책에 '읽는 맛'을 더한다.
첫 장부터 느낄 수 있다. 주제는 호기롭게도 '스포일러'다. 중간중간 영화 내용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책의 저자가 스포일러를 다룰 때 택할 수 있는 무난한 길은 '명작은 스포일러를 당하고 봐도 재미있다'는 클리셰를 꺼내드는 것일 테다. 저자는 이 길로 가지 않는다. 결말이나 반전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짚으면서도 솔직하게 정면승부를 택한다.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 <혹성탈출>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마지막 10초를 말하는 건 "재미를 망치는 짓이었다"고 하더니, 현대인들은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봐도 "조선 시대 사람들이 처음 듣고 보고 느끼던 감격 그대로는 느낄 수 없게" 됐다고 글을 이어간다. 그리고 "어릴 때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스포일러에 노출되기 전에 최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즐겨 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장을 마친다.
첫 장을 읽고 다시 목차로 돌아가 책에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 봤다. 반 정도는 본 영화, 반 정도는 안 본 영화다. 보기는 봤는데 기억에서 지워진 영화도 있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생각했다. 스포일러 경고문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그 능청스러움이 묘하게 매력적이라 책을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슷한 장점을 느낀 순간이 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영화'라는 에세이에서 저자가 찬사를 표하는 영화는 <백 투더 퓨처 2>다. 저자는 이 영화가 재미있으면서 결말까지 완벽한 영화라는 점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런 뒤 <백 투더 퓨처 3>가 등장한다. 저자는 이 영화가 1, 2편보다 재미가 덜한 영화라고 운을 떼더니, 전작과 비교되어 그렇지 떼어놓고 보면 이만큼 볼만한 영화도 많지 않다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별 상관 없는 이야기"라며 '<백 투더 퓨처 3> 원리'라는 것을 던져 툭 하고 위로를 내민다.
글을 쓸 때 완전무결한 최고의 걸작 같은 것을 만들고자 애쓰면 안 된다. <백 투더 퓨처> 1, 2편 같은 것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이 노력한다고 원할 때 막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하려고만 하면 실망만 하게 되고 제때 끝낼 수 도 없다. 몰두해 봐야 결과가 좋지 못한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백 투 더 퓨터 3> 수준을 염두에 두고 일하려 한다. 그래서 잘되면 그만해도 굉장히 훌륭한 것이고, 잘 안되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한 목표를 위해 애쓴 것이기 때문에 남는 것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SF 영화의 작법과 주제에 대한 잘 정리된 생각
물론 <채널을 돌리다가>가 수다스러운 문체와 상투적이지 않은 발상으로만 채워진 책은 아니다. 목차에서 제시된 SF 영화의 작법이나 SF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에 대한 잘 정리된 생각이 책의 줄기를 이룬다.
예컨대, 저자가 SF 영화에서 반전을 만드는데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하는 대목이다. 첫째, '붉은 청어'다. '범인 같지만 범인 아닌 인물'처럼 관객을 오해하게 만드는 인물이나 소재를 이용하는 것이다. 둘째, '좋은 일 같지만 나쁜 일'이다. 사람들이 열광하던 새 기술에 무서운 부작용이 있다는 식이다. 셋째, '이게 다 꿈'이다. 초중반부에 잘 활용하면 꿈과 현실이 헷갈리는 상황을 만드는 등 이야기를 색다르게 꾸밀 수 있다. 넷째, '기본 합의 뒤집기'다. 지구처럼 보이는 장소가 사실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면 흥미로운 반전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SF에서 곧잘 다뤄지는 '유전자 조작' 주젤를 보자. 먼저 '고전적인 부익부 빈익빈 이야기'를 꺼낸다. '부자들은 유전자를 조작해 자손들도 머리가 좋고 건강한 사람들로 태어나고, 빈자들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황에서 빈자들이 체제에 반항한다'는 줄거리로 유전자 조작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이야기를 짜다 보면, 유능한 사람이 그에 걸맞은 일을 하지 못하는 "불의"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으로 유능해진 부자와 명문가의 자손들이 좋은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도 불공평하기는 마찬가지다. 딜레마를 피하려 유전자 조작을 금지해도 문제는 남는다. '심한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유전자 조작 치료를 못받게 해야 하나,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해야 하나'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이 금지된 세상은 좋은 유전자를 타고난 운이 좋은 사람에게 유리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이어 저자는 '평등이나 사회의 안정 같은 가치 때문에 인류의 진보를 이뤄낼지도 모를 유전자 조작을 처음부터 막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특정한 유전자만 남은 상황이 해당 유전자에 불리한 환경적 변화에 취약할 수 있다'는 점과 '인류가 이 주제를 다룬 역사가 길지 않다'는 점을 들어 답을 유보한다.
이밖에도 책에서는 클리셰의 유형과 미술, 음악, 연출에서 외계인, 우주선, 좀비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자신의 스타일대로 SF 영화에 대해 써내려간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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