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속위임 원칙'과 '오리고기의 딜레마'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문회를 가진다고 한다. 맨 먼저 저녁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친구가 '그때 먹었던 삼겹살 맛있었는데'라고 하자, 다른 친구가 '돼지고기 지겹다. 이번엔 닭고기 먹자'라고 말했고, 그러자 어떤 친구가 '소고기도 한번 먹어보자'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단체 톡방에 있는 투표 기능에 주제를 올리고, 투표 결과에 따라 저녁 메뉴를 정한다.
여기에 우리 대통령제를 비유하면 이렇다. 1번 후보가 "삼겹살 먹읍시다. 그래도 돼지고기가 최고지요!"라고 하니까, 2번 후보가 "돼지고기 지겹습니다. 닭고기 먹읍시다"라고 하였고, 그러자 3번 후보가 "이제 소고기 먹을 때도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투표를 했더니 2번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당선된 2번 후보가 '오리고기'를 시켰다. 2번을 뽑았든 1번을 뽑았든 선거를 치렀던 시민들 모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직 대통령에 취임하지도 않은 윤석열 당선인이 공약을 파기하고 후퇴했다는 비판이 벌써부터 무성하다. 그러나 당선된 2번 후보의 오리고기 선택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데, 이른바 '무기속위임 원칙'에 따른 결과이다. 무기속위임 원칙이란 정치적 대표자가 자신을 선출한 유권자들의 의사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헌법상 원칙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46조 제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원칙은 대통령에게도 준용된다. 무기속위임은 독일연방기본법 제38조 제1항에도 규정되어 있으며, 근대 이후의 전 세계 문명국가에 보편적으로 확립된 헌법상 원칙이다. 이러한 '오리고기 선택'은 모든 대의제 정부의 본질적 특징으로,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의 주택정책은 오리고기가 아니라 심지어 너구리고기에 비유할 정도다. "민주당과 보수당은 과연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다른 기회에 논하도록 하겠다.
대의제는 '소수의 통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대표가 아닌 국민 전체의 대표여야 한다는 대한민국헌법 제7조에 동의하며, 그는 자신의 반대자도 포용해야 하므로 자신의 지지자들만의 대표자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무기속위임 원칙'의 긍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시민들의 대표로 뽑힌 이들이 시민들의 의사에 구속되지 않는' 이러한 체제를 과연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난 4월 중순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윤석열 대통령당선인의 인수위에 장애인권리 예산 보장과 장애인권 4대 법안(장애인 권리보장법·장애인 탈시설 지원법·장애인 평생교육법·장애인 특수교육법 개정안) 제정 및 개정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지하철 탑승시위를 하였다. 이에 대해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전장연의 지하철 선전전을 두고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비판했다. 어느 사이엔가 장애인권 법안의 정당성 여부에 관한 토론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정작 이준석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싸움만이 남게 되었다. 이준석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대단히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번 논란이 만들어낸 균열 사이에서 지금까지 숨겨왔던 감정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준석처럼 생각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준석 대표는 정말 '쿨하게' 사태의 본질을 보이게 했다. 그런데 이준석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그러한 시위가 있으면, 거리가 복잡해지고 시간 약속이 늦어지는 것에 내심 짜증이 난다. 단지 그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 때문에 짜증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반면 연민과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준석의 주장에 공감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한 번 해 보자. 전장연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장연에게는 이 방법 말고 없다. 전장연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 어떤 새로운 입법을 하거나 아니면 종전의 악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이렇게 시위하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이 없다. 만약 그러한 시위를 막고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저항하게 되고, 그래서 80년대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화염병을 들었던 것이다. 자, 다시 한 번 돌아보자. 도대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 방법 외에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이런 체제가 어떻게 '민주주의'인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혼동
어떤 한 정당 또는 한 사람의 독재적 권력을 무너뜨리면, 민주주의가 온다고 생각했다. 79년 10월의 학생들은 박정희를 몰아내면 '그날이 온다'고 생각했고, 87년 6월의 학생과 시민들은 전두환을 쫓아내면 '그날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87년 이후로 보수당과 민주당은 10년을 주기로, 1997년, 2007년, 2017년, 3번 정권을 교환했고, 이번 선거에서는 5년 만에 네 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사뮤엘 헌팅턴의 'two turnover test' 기준에 의한다면, 즉 경쟁하는 정당에 의해 두 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공고하게 되었을까? 정말 '그날'이 왔나?
하지만 두 번의 정권 교체로 공고화되었던 것은 '공화주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즉 군주에 의한 전제적 지배를 폐지하고 통치자를 선거로 선출하는 체제로서의 공화주의(共和主義)가 공고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독재적 권력은 군주제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헌법상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한 것으로, 87년 6월항쟁은 1789년 프랑스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 혁명이지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어떤 법률의 정지를 요구할 때 혹은 새로운 입법을 요구할 때에 통치자들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지금의 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의 소재와 근거'에 관한 규정일 뿐, 권력의 행사에 관한 규정이 아니다. 즉 권력은 선출된 대표자에 의해 행사되고, 그들은 무기속위임 원칙에 따라 그 권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오롯이 '기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통치자'인 것이다. 따라서 대의제는 '소수의 통치'이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대의제가 부패와 무능을 보일 때,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대의제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민주주의이다
다시 전장연의 시위로 돌아가 보자. 만약 스위스에서라면 어떻게 했을까? 장애인 단체는 먼저 시민들을 설득하고 그에 동의하는 10만 명을 확보한 다음, 스위스연방 헌법 제139조에 따라 그들의 이름으로 법률안을 발의한다. 그리고 발의안을 공표한 날로부터 18개월의 기한 내에 연방헌법의 일부개정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연방의회는 의무적으로 국민투표에 회부해야 한다(스위스연방 헌법 제140조). 그 18개월 동안에 법률안의 내용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 국민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법률에 대해 반대할 경우에는 일정한 수의 유권자가 발의하면 국민투표에 회부시킬 수 있다. 대의제의 엘리트가 입법한 법률을 시민이 최종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대의제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실제로 스위스에서 건물과 시설물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권에 관한 '장애인을 위한 동등한 권리' 시민발의가 있었고, 2003년 5월 18일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시민발의를 주도했던 장애인 복지단체는 장애인의 애로사항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적용 범위의 포괄성과 고비용 문제 때문에 부결되었지 장애인에 대한 보호원칙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 이후에 새로운 시민발의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위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게 되면, 화염병을 던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대립 대신에 토론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시민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투표 전에 이루어지는 토론이 민주주의에 더 중요한 절차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다수가 결정했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소수가 미래의 다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지금의 다수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모든 정보를 공개한 상태에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설령 잘못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다시 고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사람을 뽑는 것은 공화주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며,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투표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헌법에는 대통령만이 국민투표를 붙일 수 있을 뿐, 시민들이 국민투표로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거나 새로운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 최근 윤석열 당선인이 민주당의 '검수완박' 법률안에 대해 헌법 제72조에 따라 국민투표에 부의하겠다는 논의를 제기했다. 시민이 부의하는 국민투표와 대통령이 붙이는 국민투표의 차별성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하도록 하겠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만약 훌륭한 대통령이 나타나서 스위스연방 헌법 제139조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를 헌법과 법률로 입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마치 하늘이 성군(聖君)을 내려 우매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군주제 시절의 노예적 희망과 같다. 스위스연방 헌법 제139조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와 비슷한 내용으로, '조례의 제정과 개정, 폐지'에 관하여 주민이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이 현재 지방자치법 제19조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러한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현재의 지방자치법 아래에서, 주민발의가 저조한 것은 주민발의의 권한을 제한하는 독소조항 때문도 있지만, 정작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시민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또한 시민들이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현상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중대한 원인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를 탄핵시켰던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콘크리트 지지층 30%'였고, 문재인 정부의 실패 원인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지지층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열렬한 추종자들의 숭배에 갇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영웅을 숭배하고 상대편 영웅을 공격하는 것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숭배와 복종을 참여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한, 그리고 대의제를 민주주의라고 믿는 한, 설령 스위스연방 헌법 제139조와 제140조가 우리 헌법에 규정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반장을 뽑는 선거에 대해 학교에서는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교육'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엘리트를 추종하는 연습을 하게 되고, 이러한 복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히려 학교 반장은 모든 학생이 돌아가면서 하도록 하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토론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참된 훈련이다. 정치적 영웅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퍼졌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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