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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동아시아의 안보

[성균차이나브리프]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는 패러다임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한 곳이다. '세계 정세의 불안'이다. 새로운 '냉전 시스템'의 전조를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해도 좋다. 지정학적, 국가주의적, 문명론적 패러다임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새로운 세계질서는 한국과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관찰자망(觀察者網)> 주필이고 푸단대 중국연구원 연구원으로 <문명의 논리: 중서문명의 게임과 미래>(상무인서관, 2021년)를 저술한 원양(文扬) 주필은 문명론적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문제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교해 본다. 

그는 "문명론적 패러다임은 동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적용가능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중대한 안보 도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시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국면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 방향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문명론적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올바른 분석인가 하는 점은 토론 거리다.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문제를 패권 국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미국과,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려는 중국,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욕망들이 복잡하게 부딪히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에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원양 주필의 이 글은 성균중국연구소가 발행하는 <성균 차이나브리프> 63호 권두 시평이다. 편집자주

국제관계학에서 보면, 올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은 조금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여러 이론 속에서 이번 전쟁의 필연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일찌감치 예측해 왔고, 게다가 사전에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대책이 없다고 단정했다.

당대 국제관계학의 세 가지 주요 패러다임은 지정학적 패러다임, 국가주의적 패러다임, 그리고 문명론적 패러다임이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이 세 가지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학자들 모두 우크라이나 문제를 상세히 다룬 적이 있지만, 분석 이후의 결론은 달랐다. 이론가들의 커다란 영향력 때문에, 그들의 분석은 현실세계에서의 역사적 흐름에 다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발발했고, 이론은 안보와 안정을 촉진하는 방향으로는 작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전쟁 위기를 심화시키고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로 동유럽 지역에서는 대격변이 발생했지만,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 지역은 아직은 방관자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각국의 인식과 사유도 그 몇 가지 주요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이미 동유럽에서 발생한 위기가 매우 큰 확률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위에서 얘기한 몇 가지 국제관계 패러다임과 동아시아 지역안보에 대한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 지난 2019년 베이징에서 만난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 ⓒAP=연합

지정학적 패러다임

지정학적 패러다임은 지구 표면을 자연 지리적 특성을 근거로 몇 가지 큰 부분으로 나누어 그 기본적 분석단위로 삼는다. 예컨대 대륙과 해양, 유럽 대륙과 대륙 역외권으로 양분하거나, 심장지역, 내부 초승달지역, 외부 초승달지역으로 나눈다. 또는 심장지역, 주변지역, 도서지역, 대륙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몇 가지 부분들 사이에서 강대국의 패권 형성과 경쟁관계를 분석한다.

2017년 타계한 폴란드계 미국학자인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현재 러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인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Gelyevich Dugin)은 매킨더(Halford John Mackinder), 머핸(Alfred Thayer Mahan), 스파이크만(Nicholas John Spykman) 등의 사상을 기초로 각자의 지정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브레진스키는 그의 대표작인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가 아닌 대륙에서 세계적 패권을 행사한 강대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미국의 거대한 전략 체스판으로 세계 미래의 정세를 결정하면서도 미국의 주도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심 무대라고 보았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인도는 "기수" 국가이며,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한국, 터키, 이란은 "피벗(pivot)" 국가이다. 미국은 반드시 이들 국가들 속에서 종횡무진하며 외교적 수단을 통해 주도권을 잡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지정학 이론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다. 이와 달리, 두긴의 지정학 이론은 러시아의 세계대국 지위 회복이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다. 두긴의 이론에 따르면,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은 러시아의 공간이다. 그는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은 다른 유라시아 국가와 함께 공동의 적에 반대한다는 기본적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하고, 육지권과 해양권의 대결구도를 통해 대서양주의, 미국의 글로벌 패권, 자유주의 가치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양극을 이룬다고 보았다.

두 사람의 이론에서,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러시아 관계가 모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가 유라시아 제국이 될 수 없고, 유라시아 제국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중앙아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5천 2백만의 인구, 주요 자원, 흑해의 출항구 등을 갖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다시 통제할 수 있다면,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강대한 제국을 건설할 자원을 되찾게 될 것이다(브레진스키, 1998)."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고, 어떤 동인에 의해서이든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억제, 유럽의 동부 국경 확정, 러시아 제국의 잠재력 회복, 미러 양측의 중앙아시아 피벗 국가 쟁탈, 우크라이나의 동맹 선택 등 모두 위기를 심화시키거나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두긴에게 있어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 지역은 오직 러시아의 서부일 뿐이다. 1991년 출현한 신정의 실체인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이질적인 영토와 인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우크라이나를 둘로 나누고, 두 개의 정치 주권으로 서부 우안 우크라이나(Western Right Bank Ukraine)와 신러시아(Novorossiya)를 인정하고, 동시에 키이우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만간 일어날 일이다." 이것은 현재의 무력 충돌이 "국가와 국가 간의 공격이 아니라 대지정학적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지정학적 패러다임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의 문제점을 제대로 시사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와 방안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이러한 이론이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의사에 따라 고안되어 매우 강한 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미 정해진 전략 목표를 위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하는 거짓 이론으로, 완전히 왜곡된 현실에 대한 개괄과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주의적 패러다임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가들은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을 신봉한다. 이러한 이론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분석틀에서 제외한 후 모든 주권국가를 일괄적으로 권력을 통해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이성적 행위체로 간주하고, 국제체제를 일정한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일군의 국가행위자들이 하나의 고정된 내적 구조 속에서 결집한 것으로 본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국제체제의 내적 구조로 인해 한 국가의 권력 확장은 반드시 다른 국가의 권력과 충돌하여 긴장을 고조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쟁은 일종의 해결수단으로써 전승국과 패전국 양자 사이에서 새로운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은 이론적 간결성과 대칭성을 갖고, 자유시장 경제학과 동일한 이성주의 철학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한 비역사적 정태적 자기이해의 계산과 이익의 극대화라는 가설을 고수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 이론의 아킬레스건이다.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그 해석 능력을 넘어서면, 이들 이론가들은 종종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며 현실을 주관적으로 곡해할지언정 절대 이론적 가설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 세계는 이들 이론가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저명한 현실주의 국제관계이론의 대가인 미어샤이머(John J. Mearsheimer)는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의 가장 확고한 수호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강대국 정치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는 30년 전 이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충돌을 예견했다. 1993년 미국의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정세는 그들 사이에 안보 경쟁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같이 서로 간에 오랜 동안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공동의 국경을 갖고 있는 강대국은 종종 안보 우려에 따른 경쟁에 빠지기 쉽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러한 우려를 극복하려면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두 강대국이 "길고 보호받지 못하는 공동의 국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보 딜레마에 빠질 수 있으며, 평화공존의 국면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변이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그저 위기가 심화되어 전쟁의 발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의 고정불변의 세계관이고, 모든 강대국관계를 "딜레마"로 보는,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비관주의이다.

사실 "딜레마"라는 저주의 주문은 "강대국 정치이론"의 모든 사안 분석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올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어샤이머의 최근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번 충돌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주권국가의 권력 충돌일 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양 강대국의 세력 대결이다. 누가 침략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강대국 정치이론의 이성적 계산에 따르면, 자국의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국은 모두 적군의 상황에 따라 선제공격의 방어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 잡지 <뉴요커> 3월 1일 자에 실린 아이작 초티너(Issac Chotiner)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어샤이머는 나토의 동부 확장, EU의 동부 확장, 그리고 미국에 의한 우크라이나의 친미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삼지창" 작전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권력 도전이며, 러시아의 특별군사행동은 이러한 도전에 대한 선제적 반응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저명한 "딜레마"의 저주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Tillett Allison, Jr.) 교수가 주장한 "투키디데스 함정" 이론이다. 2010년 이후 제기한 이 현실주의 국제관계이론에서 그는 중점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접한 강대국 간의 안보 딜레마가 아니라 신흥 강대국과 기존 강대국 간의 경쟁 관계이다. 이러한 경쟁이 충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딜레마"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새롭게 부상한 강대국은 현존하는 강대국과 공동의 국경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급격한 부상이 이루어진다면 현존 강대국에 대해서는 도전이 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광활한 태평양이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새롭게 부상한 세계 제2위의 경제권으로서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양자 관계에서 곤경에 빠져있고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현실주의 이론의 기본적 가설은 바뀐 적이 없다. 미어샤이머의 유명한 비유인 이미 형성된 국제체제는 하나의 "강철 케이지"이며, 체제 내의 주권국가는 우리 속의 "침팬지들"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중국과 미국 간에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딜레마만을 주시할 뿐,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건설적 이념이나 방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이 가장 많이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침팬지" 비유이든 "딜레마"의 저주이든 모두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 문명사에 진입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인류가 여전히 침팬지와 같은 수준으로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정학적 패러다임과 유사하게 국가주의적 패러다임도 구체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사실상 무력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거듭 강조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사실 머릿 속의 환상에 불과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진짜 현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문명론적 패러다임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였던 새뮤얼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은 문명론적 패러다임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주권국가는 사람들의 모든 정체성을 대표할 수 없다. 인류는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을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체제 등으로 스스로를 규정"해 왔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족, 인종집단, 종교단체, 민족 등과 동일시하고, 가장 광범한 차원에서는 문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헌팅턴, 2010)."

이러한 상황은 냉전이 종식된 오늘날 세계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1996년 출판된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건>이란 책에서 헌팅턴은 국가주의적 패러다임과 뚜렷이 구분되는 "문명론 패러다임"의 해석 이론을 제시했다. 이 패러다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분류는 냉전 중의 세 집단이 아니라 세계 7~8대 주요 문명이다. 그러나 주요한 구분은 지금까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구 문명과 기타 문명 간에 존재한다. 둘째, 가장 큰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 갈등은 그런 서로 다른 문명 집단과 국가 간의 갈등이다. 셋째, 민족국가는 여전히 세계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들의 이익, 연합, 그리고 갈등은 갈수록 문화와 문명 요인의 영향을 더 받게 될 것이다.

이 패러다임과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헌팅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이 책에서 헌텅턴은 미어샤이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평화로운 공존을 한다는 것이 비정상이라고 한 것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문명론적 패러다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밀접한 문화적, 인적, 역사적 연계와 양국 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혼재를 강조하므로, 관심의 초점을 동방정교회의 동우크라이나와 동방 카톨릭의 서우크라이나로 분열된 문명의 단층에 두어야 한다(헌팅턴, 2010)."

그는 미어샤이머가 이러한 중요한 요인을 완전히 간과했다고 보았다. "국가주의적 연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가능성을 부각시키지만, 문명론적 연구는 전쟁 가능성을 가장 낮게 평가하고 우크라이나가 둘로 분열될 가능성을 부각시킨다. 문화 요소가 사람들이 예측하는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문명론적 패러다임의 관심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헌팅턴이 보기에, 오늘날 7~8대 주요 문명으로 구성된 글로벌 지정학 구도에서 모든 주요 문명의 지리적 범위와 다른 문명의 지리적 범위 간에 지질학에서의 대륙판과 유사한 단층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더 큰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충돌은 바로 이 단층선 상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중 가장 뚜렷한 단층선의 하나는 바로 유럽을 서구 문명과 동방정교 문명으로 나누는 단층선이다. 헌팅턴은 "이러한 경계선은 북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 발트해 각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러시아 국경선을 따라 서부 벨라루스를 지나고, 다시 우크라이나의 동방카톨릭인 서부와 동방정교인 동부를 가르고, 이어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카톨릭을 신봉하는 헝가리인과 그 나머지 지역을 가르고, 다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그 외 공화국들과 분리하는 경계를 따라 유고슬라비아를 지나간다. 이것은 유럽 문화의 경계선이며, 냉전 이후의 세계에서 유럽과 서구 정치경제의 경계선이다"라고 분석했다.

다시 말하자면, 문명론적 패러다임은 "딜레마"라는 국제관계 연구의 기본적 분석도구를 "단층선"으로 대체했다. 책이 출간된 이후 30여 년 가까이 글로벌 갈등이 이 이론의 도구적 유효성을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서구 문명과 동방정교 문명 간의 "단층선"을 따라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발칸 등 지역들이,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단층선"을 따라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지역들이, 그리고 서구 문명과 중화 문명 간의 "단층선"을 따라 한반도, 일본, 타이완, 필리핀, 인도차이나반도 등의 상징적 지역들이 존재한다.

헌팅턴의 이론에 따르면, 단층선은 문명판의 경계이고, 경계 내에서 사람들은 짙은 문명적 정체성을 갖는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평범한 이웃나라가 아니라 "정신적·공간적으로 우리와 불가분의 일부"이며 "혈연적인 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명의 경계이다. 그러나 EU는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일원이고,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치적 경계이다. 또는 서구 문명의 확장을 의미하는 미래의 "단층선"을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근원이다. "단층선"의 관점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상황과 유사한 국가는 동유럽, 중동, 남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에도 많다.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해당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쪽에 속해 있었고, 문명적 정체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다른 한쪽에 속해 있어서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했거나 미래의 문명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정체성의 각각의 경계가 매우 커서 그로 인한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동아시아 지역 안보

요약하자면,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안보와 안정, 그리고 평화와 발전을 중시한다면, 동아시아 각국은 이상의 주류 국제관계이론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런 이론들은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위기를 완화시키기 보다는 심화시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우선 동아시아 각국은 지정학적 패러다임과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을 자국의 지도적 이론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동아시아 각국에게 있어서, 지정학적 패러다임에 속하는 어떤 이론이든 본질적으로 글로벌 패권에 관한 것이고, 모두 서구 제국의 글로벌 전략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지역도 "체스판"으로 삼아 전략을 구성하고, 동아시아 각국을 "체스판 위의 말"로 여긴다. 다 알려져 있듯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그림에서 동아시아와 동유럽 두 지역은 대칭성을 갖는다.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피벗 국가"인 한국이다. 강대국의 패권 목표가 달라진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위기가 조만간 한반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소국가의 자주권과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랜드 전략의 사상이라면,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사방에 전쟁의 불길이 흩날리고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질 수 있다. 강대국의 총체적 전략에서 그것은 책략의 일부이거나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분명 이것은 근거 없는 극단적 생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어떠한 국가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은 사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혀 알지 못하고, 동아시아 각국의 현대적 변화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 머릿속에 정태적이고 간략화된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여기저기서 "전쟁이 반드시 일어 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할 뿐이다. 이러한 이론이 동아시아 각국의 주류 이론이 된다면, 예언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현실주의 국제관계이론에 대한 한 비판과 같은 맥락이다. 

"전쟁을 특정한 외부 환경에 대한 너무도 당연하고 명백한 반응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극단적이며 위험한 행동이며, 각종 도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어떤 사상가와 정치가라도 지나치게 단순하고 냉혹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명론적 패러다임을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정학적 패러다임처럼 글로벌 패권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고,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처럼 비역사화와 정태화를 배제하는 문명론적 패러다임은 지역의 특수성에 주목하고 역사의 중요성에도 주목하므로, 조건부로 동아시아지역에 응용할 수 있다. 문명론적 시각에서 보면, 동아시아 지역 전체는 오늘날 현존하는 주요 문명에 속하며, 일본의 문화와 한반도의 문화는 이 주요 문명의 두 갈래이다. 이 주요 문명은 중화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고, 유가문명이나 극동문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어쨌든 하나이지 여럿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의 본령이자, 당대 동아시아 정치지형을 이해하는 기초이다.

이 지역의 격변은 16세기 서태평양 일대에서의 서구문명과 중화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이러한 충돌의 강도가 급속히 세지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가 해체되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동아시아 지역이 "탈아입구"를 시작하여 스스로를 서구 문명의 일부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도 두 문명판의 "단층선"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2차 대전 종식 이후에도, 문명판의 충돌은 멈추지 않았고, 새로운 형태로 계속되었다. 한편 중화문명의 핵심부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강대한 근대 국가가 당대의 수호자가 되어, 중화문명의 쇠퇴 과정이 전반적으로 역전되었고, 그 연속과 발전이 근본적으로 보장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서구 문명에서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당대의 선도자가 되어 서구 문명의 글로벌 확장을 계속해서 추진해 나갔다. 특히 비서구 국가들을 친미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켜 문명의 확장이 주권국가의 경계를 초월하게 되어 각각의 비서구 문명을 억누르게 되었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이러한 확장 방식은 국제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문명은 국제법상의 행위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문명의 확장은 침략 행위로 비난받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국가나 지역이 친미국가가 되고, 심지어 서구의 정치경제나 군사조직에 가입하게 되면, 오히려 "국민의 뜻"이나 "자발적 선택"으로 해석되어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소위 "제3의 민주화 물결"과 "색깔 혁명"의 본질-서구 문명이 스스로를 확장하고 다른 문명을 억누를 때 "단층선"을 능동적으로 넘어서는 공격 수단-인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현재 구도를 보면, 서구문명과 부흥하는 중화문명 사이의 문명 "단층선"의 최전선은 대체로 한국의 서해안으로부터 남쪽의 필리핀 루손섬 서해안과 팔라완섬 서해안까지의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이 선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현실적 존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 전통적 중화문명에 대해 서구문명이 행한 압박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여러 불안정 요소들이 잠재되어 있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관련국들이 평화 국면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미 정해져 있는 현상(status quo)을 묵인하고 있다. 이 "단층선" 상에서 향후 최대의 변수는 타이완이 될 것이다. 중국에게 있어서 문명론적 시각으로 보나 주권국가적 시각으로 보나 타이완은 떼어낼 수 없는 일부이다. 세계 대다수 국가들도 이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도 공개적으로 타이완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취한 동시병행적 행동을 채택하여 타이완과 중국 대륙의 분리를 추진한다면, 이것은 서구문명이 이 지역에서 다시 한 번 현재의 "단층선"을 넘어 중화문명을 더 압박하게 되는 것이다.

중화문명은 현존하는 주요 문명 중 유일하게 5000년 동안 단절된 적이 없는 원생문명이고, 그 문명의 쇠퇴와 부흥의 주기가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을 척도로 한다. 현재의 부흥의 흐름은 노도와 같아서 세계 어느 세력도 막을 수 없다. 미국이 다시 한 번 중화문명을 압박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는 전 세계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전체 지역은 반드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문명론적 패러다임은 동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적용가능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중대한 안보 도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시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국면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 방향을 제공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동아시아 각국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문명 "단층선"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중대한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역외의 강대국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지역 내에서 서로 마주보며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역의 안전과 안정을 함께 수호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 저자 원양(文扬)

- <관찰자망(觀察者網)> 주필

- 푸단대 중국연구원 연구원

- 상하이 춘추발전연구원 연구원

- 중국 인민대 충양(重陽) 금융연구원 고급연구원

- <뉴질랜드 연합보> 사장

- 스탠포드대 방문학자

- 해군군사학술연구소 주임

- <문명의 논리: 중서문명의 게임과 미래>(상무인서관, 2021년)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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