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사람은 잊어도 노송은 알고 있다
안동군 남후면 수상리 '청골'
오랜 노송(老松)의 허리에 난 상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악마의 흔적을 안고 있다
푸른 군복의 동포에게 죽임당한
해방 운동가의 눈동자가 옹이로 박혀 있구나
해방 후 미군정의 후원으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국민보도연맹원들의 만행은
태백산 기슭 안동까지 기승을 부렸는데
국가는 국민을 살해하는
그들의 범죄를 방기(放棄)하고 조장했다
안동에서는 1949년 6월 30일 녹전면 원천리 주민들이
녹전지서 뒷산 골짜기 등에서 살해되고
예천에서는 1949년 1월 22일
공출문제로 반상회에 참가했던 유천면 고림리 주민을 비롯한
1949년 한 해 동안만 한 고장에서 50여 명이 희생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7월 남후면 한티재를 너머 와룡면 테리
기름땅 고개에 남은 핏빛의 기억
한 줌 재도 안되는 이념을 앞세워
안동형무소에 갇혀있던
조국해방 평등세상의 사상범 200여명을
재판도 없이 설명도 없이 드르륵 총살하고
대구로 부산으로 도망갔던 국방군 2사단과 경찰들
시신을 땅 구덩이에 발로 밀어 넣어
바지가 핏빛으로 흥건했다고 형무소 직원은 증언했구나
북진 중 마을에 주둔한 국방군 8사단 군인은
부역의 올가미로 동족을 살해했다
남선면 정하리에 여러 날 주둔하며
소․닭을 잡고 보초를 서게 하는 등
실컷 부려먹다 떠나면서
주민 25명은 강 건너 영남산 법흥리
상수원 뒤 골짜기에서 살해되었고
남후면에서는 개곡리 부역을 이유로
무고한 농민들 광음리 암산골에서 살해되었다.
일직면에서는 9월 20일경 수복 과정에서
국군의 짐을 지고 가던 중
명진리 마을 앞산에서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9월 29일 안동읍 태화리 어개골에 거주하던 김일준 외 11명은
인민군 점령당시 피난가지 않고 부역했다는 이유로
수복한 경찰에 의해 고문 후
안동 서부리 야산에서 살해당했고
다른 마을 주민들도 큰골에서 총살당했다
일직지서는 1950년 9월 24일 수복하여
지서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주민 50여명을
차례로 호명하여 곡괭이 자루로 마구 때리다가
결국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에서 모조리 살해하였다
와룡면 이하출장소는 9월 29일 주하리
이재태, 이석리, 권재연 일가 4명 등을 연행하여
이하역 맞은 편 골짜기에서 총살했고
와룡지서 박조균은 국군 수복 후 국방부에 의해
와룡면 주민 50여 명이 부역혐의로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
12월 27일에는 풍천면 구담1리 주민 3명이
밤 10시경 불려 나간 후 살해되었다
풍산면 주민들은 9월 25일경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국군에 의해 개천과 막곡리 막실마을 인근에서 총살당했다
태백산 준령 안동에 핀 진달래
아직도 발하지 않는 제비꽃 자색은
까닭없이 눈뜬 채 죽은 이들의 핏빛이며
낙동강 반변천 구석구석 고인 푸른 이끼는
아직도 다 풀지 못한 한 많은 노래였구나
청골, 한티재, 암산골, 어개골, 막실
그리고 법흥동 안동형무소 지하
여기는 나의 고향, 나의 외가,
나의 태(胎)가 묻힌 곳, 나의 뼈가 묻힐 곳
이 땅에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원혼들 70여 년을 떠돌고 있으니
차마 죽기조차 서럽구나
* 시에 인용된 사건은 1960년 『국회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와 2010년 간행된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의 보고된 한국전쟁 전후 안동지역 민간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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