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크리스마스 새벽, 낯선 이탈리아 밴드의 LP 앨범에 담긴 전곡이 MBC FM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통째로 흘러나왔다. 총 40분에 달하는 라테 에 미엘레(Lat̤t̤e̤ e Miele)의 1972년 데뷔 앨범 'Passio Secun̤d̤ṳm̤ Mattheum(마태수난곡)'.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의 고행, 부활 등을 테마로 한 12곡이 밀도 높게 이어지는 음반이다. 곡마다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날카로운 기타음, 난타하는 드럼, 음울한 나레이션 같은 목소리가 기묘하게 엇물려 진행된다. 종교적 색채가 담겼어도 성탄절에 익숙한 캐럴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장르를 알 수 없는 이 생경하고 실험적인 음반을 성탄절 새벽 청취자들 귀에 도발하듯 꽂은 이는 방송 진행 경력이 8개월에 불과한 풋내기 대학생이었다. 당시 미군방송 AFKN 외에 유일하게 새벽 1시에 방송되던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이 흐르는 밤에> 진행자 성시완 씨. 이듬해인 1983년 성탄절에 성 씨는 또 한 번 이 앨범 전곡을 턴테이블에 걸고 이탈리아어 사전을 뒤져 직접 가사까지 해석해 소개했다.
성 씨가 2년 동안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던 젊은이들은 40년이 지나 중장년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성시완'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다. 낯선 아티스트들의 20분이 넘는 곡을 예사로 틀어댄 DJ, 한 시간 내내 특정 아티스트의 곡만 내보내거나 진행자 멘트 한마디 없이 금지곡들만 방송하기도 했던 DJ.
음악이 자극하는 원초적인 충격을 받긴 했는데 너무 난해해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고, 따라 부르거나 흥얼거리기도 어렵고,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선 좀처럼 들려주지 않고, 음반 가게를 구석구석 뒤져도 찾을 수 없는 곡들. 클래식인가? 재즈인가? 로큰롤인가?
그 종잡을 수 없는 '빨간맛'의 정체를 쫓아 성 씨가 안내하는 세계로 접어든 이들이 꽤 있다. 유럽에선 1960~70년대에 이미 황금기를 맞은 '프로그레시브록', 혹은 '아트록'이 그렇게 '성시완 효과'를 매개로 비로소 한국에 상륙했다. 1986년부터 KBS 심야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한 전영혁 씨, 유학 후 1989년에 MBC <성시완의 디스크쇼>로 컴백한 성 씨를 길라잡이로 프로그레시브 매니아들이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다.
당시 주력 청취부대이던 중고등학생들은 성시완, 전영혁 방송을 통째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공부하듯' 듣고 또 들었다. 산삼 캐듯 건져 올린 프로그레시브 음반 속에 깨알만한 글씨로 빼곡하게 해설지를 쓴 필자 이름도 대개 '성시완' 혹은 '전영혁'이었다. 영미권 주류 팝과 가요가 독차지한 방송과 음반 시장에 갇혀있던 청취자들에게 성 씨는 해방의 기수였다.
지독한 음반수집가이자 독보적인 아트록 DJ, 1989년 음반사 '시완레코드'를 직접 차려 재평가될만한 음반들을 국내에 발매한 프로그레시브 음반사업가, 2000년대 들어선 PFM, 라테 에 미엘레, 뉴 트롤스 내한 공연까지 성사시킨 장본인….
신간도서 제목만 보고 망설임 없이 <성시완의 음악이 흐르는 밤에>(목선재 펴냄)를 집어들었다. 자신을 '성시완의 아이들 중 하나'라고 소개한 지승호 씨가 여러 차례 성 씨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음악이 흐르는 밤에' 프로그램이 끝나면 "방송이 이상하다, 무섭다, 귀신 나오는 소리다"는 항의를 받았단다. 방송국 부장으로부터 "너 지금 마스터베이션 하는 거야"라는 핀잔도 들었다. 36일 동안 '핑크 플로이드' 특집을 했더니 "너네 집에서 하지 왜 방송에서 하냐"는 욕이 날아왔다고 한다.
그래도 시종일관 자신의 고집대로 방송했던 까닭은 "그렇게 안 하면 내 존재 이유가 없으니까요"란다. 아트록 DJ로서, "선구자적인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는 자평에 동의한다.
"DJ는 천문학자와 같아서 새로운 별들이나 숨어 있는 별들을 찾아서 알려주는 거잖아요. 그 별들 중에서 기가 막힌 별들이 있을 수도 있고 중요한 별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걸 소개해주고 싶은 거죠."
돈 안 되는 음반들만 냈으니, 음반사업가로서도 사서 고생을 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매니아들에게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시완레코드'는 지난해 6월 문을 닫았다. "워낙 층이 얇으니까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100장만 팔려도 그걸 듣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시완레코드가 실패한 건 사실인데, 그래도 좀 족적을 남겼다는 자부심은 있어요."
이탈리아 현지에선 1600장 판매에 그쳤던 라테 에 미엘레 앨범이 시완레코드 발매로 국내에서 무려 2만 장이 팔려나간 일화,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서울역 인근 성당을 라테 에 미엘레 내한 공연장으로 섭외하려고 신부에게 개종 다짐까지 담아 서한을 보낸 뒷이야기, 매니아들의 바이블이던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 <ART ROCK> 매거진을 만들던 성 씨의 회고담도 아련하게 담겨있다.
지난 40년간 아트록 DJ, 음반사업가로서 성 씨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데는 손색이 없다. 그래도 거대한 우주에서 별을 찾아 아직까지 헤매는 이들이 솔깃할만한 '프로그레시브 천문학자'의 메시지가 빈약한 점은 다소 아쉽다. 마침 성 씨는 올해 '음악이 흐르는 밤에' 40주년, <ART ROCK> 창간 30주년을 맞아 기록물들을 엮은 책을 낼 계획이 있다고 하니 잠시 기다려보자.
* 프로그레시브록 역사에 가장 기념비적인 음반을 꼽아달라는 인터뷰어 지 씨의 질문에 성 씨는 "킹 크림슨의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이라고 대답했다. 이미 역작 반열에 오른 음반이고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곡 'Epitaph'가 수록된 1969년 데뷔 앨범이다. 내친 김에 라테 에 미엘레 데뷔작을 함께 들어봐도 괜찮겠다. 이 역시 50년 전 이탈리아 10대들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수작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