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흘
어린 것들은 눈썹이 수평선에 닿았다
달 없는 밤
예촌양서방조카도 멜 후리러
저 바다로 나간다
멸치떼를 그려보는 내 눈에
사금파리 하나
깨져나간 글자의 귀퉁이가 걸려있다
여기는 용두 할아버지네 집터
혼수였을라나 그러면
희,
발음하면
담장 뒤로 사라지는 옷자락 같아
사발에 담기지 못한 것들을
함부로 떠올린다
더는 물 고이지 않고
한해살이 풀들만 흔들리는 곤흘
늙은 새신랑은 돌아가지 못한 채
풍을 앓는다
마비되는 얼굴이 우는 듯 웃고
헐린 담장 아래
스무 살의 신방(新房)을 더듬는 내게
산책객은 재개발을 묻고 간다
* 흘 : 성읍이나 촌락의 의미로 쓰이는 제주의 지명 접미사
(곤을동은 늘 물이 고여있는(곤) 마을(흘)이라 곤을마을로 불렸지만,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고 주민들이 총살된 뒤 폐촌된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