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찬란한 봄볕 받으며,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2022년 4월 제84강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산실로 유명하고, 돌담길이 아름다운 한밤마을이며 위천 변에 다양한 서원과 정자가 즐비한 경북 <군위고을>을 찾아 갑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큰 스님 일연(1206~1289)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 단군·기자·대방·부여의 사적(史跡)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불교에 관한 기사·신화·전설·시가 따위를 풍부하게 수록한 역사서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84강은 2022년 4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서울을 출발합니다.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군위IC-의흥면(의흥향교)-고로면(인각사)-부계면(대율리돌담마을/남천고택/대율리대청/쌍잣나무/대율리송림/제2석굴암/모전석탑/양산서원)-효령면(제동서원/효령사)-군위읍(점심식사/군위향교)-소보면(양암정/광석재/송호서원/칠탄숙강당/양천서원/남계서원)-군위IC-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4강 답사지인 군위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의성·영천·대구·구미와 경계
군위는 북동쪽으로는 선암산(878m)을 경계로 의성군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아미산(756m)을 경계로 영천시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팔공산(1193m)을 경계로 대구시와 접하며, 북서쪽으로는 청화산(701m)을 경계로 구미시와 접하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위천(渭川)이 군위군, 의성군, 청송군의 경계에 있는 매봉에서 발원하여 군위군의 중심부를 북서류 하다가 우보면에서 북류해 오는 작은 물줄기를 합쳐 흐름의 방향을 서쪽으로 바꿉니다. 효령면에서 남쪽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남천(南川)을 합하여 군위읍 중앙부를 북류합니다. 소보면에서는 곡정천(谷亭川)을 합하여 산지를 감입곡류(嵌入曲流)하여 의성군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군위는 삼한시대에 진한의 여담국, 소등붕국 등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다가 신라 초기에는 노동면혁(여두멱이라고도 함)이라 했고,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군, 현의 명칭을 고칠 때 군위현, 효령현, 부림현으로 하여 숭선군(현 선산)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 9) 군위현, 효령현, 부림현(부계현으로 개명)이 상주목에 속했으며, 의흥군은 안동부에 속했습니다. 1143년(인종 21)에 다시 군위현, 효령현, 부계현이 상주목에서 일선군으로 환속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효령현이 군위현으로 이속되었고 부계현은 의흥군으로 각각 통합하여 감무를 두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의흥군을 의흥현으로 격하하고 1896년(고종 32) 다시 군위현과 의흥현이 군으로 승격되었고, 1896년(고종 33) 경상북도의 군위군과 의흥군으로 되었습니다. 일제 항쟁기는 1914년 부, 군, 면의 통폐합에 따라 의흥군을 군위군에 편입했으며 지금은 1읍 7면 180리입니다.
군위와 의흥에 읍치구역
군위에는 군위현과 의흥현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군위향교는 1470년(성종 1) 군위읍 마정산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선조 40)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과 이 고을 출신 이오봉이 풍수지리를 잘 아는 승려 성지를 보내 새로 터를 잡아 선방산 남쪽 기슭인 쇠똥 골(지금의 하곡리)에 이건하였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701년(숙종 27)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고, 1973년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여, 현재 대성전·명륜당·광풍루·동재·서재·내삼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의흥향교는 인종 때 창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고 유림 손돈암이 위패를 선암산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하였으며, 이로써 경상도에서 오직 이 향교만이 원래 그대로의 위패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1614년(광해군 6) 읍의 서편으로 이건하였다가 1641년(인조 19)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두 전통마을, 화산마을과 한밤마을
군위에는 화산마을과 한밤마을의 두 전통마을이 있습니다.
화산마을은 산성마을로, 해발 800m의 산 정상에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여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마을 아래쪽에는 화산산성이 있는데, 1709년(숙종 35)에 병마절도사 윤숙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지은 산성으로, 흥예문에서 수구문에 이르는 거리 200m, 높이 4m의 성벽을 구축하던 중, 심한 흉년으로 산성을 완공을 하지 못한 채 남아있습니다.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과 일출, 일몰이 장관입니다.
한밤마을은 부림 홍씨(缶林 洪氏) 시조 홍란(洪鸞)의 14대 손으로 입향조인 홍로(洪魯)가 고려 말에 낙향하여 살면서 집성촌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후 밤 야(夜)자 대신 밤 율(栗) 자로 고쳐 부르게 되어 대율리(大栗里),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통마을인 한밤마을에는 집집마다 야트막한 돌담들이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나누듯 정겨운 모습으로 둘러져 있으며 1천년 세월에도 10리의 돌담과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주변의 정자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남천고택은 한밤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산세를 따라 북향하여 양지산(필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50여 년 전에 부림 홍씨 홍우태의 살림집으로 그 후 주손들로 이어지면서 수차에 걸쳐서 중수하였습니다. 사랑채 대청 상부에 ‘숭정후 상지 즉위이년 병신삼월십 칠일 신시 수주 상량(崇禎後 上之 卽位二年 丙申三月十 七日 申時 竪柱 上樑)’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36년(헌종 2)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안채 역시 건축수법으로 보아 사랑채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고 사랑채는 100여 년 전에 중수하였고 사당은 수년 전에 개축하였습니다.
원래 가옥의 형태는 ‘흥(興)’자형의 독특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해방 후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었고 대문채는 옮기면서 향(向)을 바꾸어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 돌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택 담장 밖에는 한밤마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율리 대청'이 있습니다. 대청은 조선 초기에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32년(인조 10), 1651년(효종 2), 1705년(숙종 32) 세 번에 걸쳐 중창 되었습니다. 고택 안에는 홍우태가 250년 전에 직접 심었다는 잣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습니다. 대율리 송림은 예로부터 대율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으로, 동제를 드리는 솟대가 있는 신성한 곳임과 동시에 누구나 와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마을 숲[林藪]입니다.
즐비한 서원과 정자들
군위에는 다양한 서원과 정자가 있습니다.
양천서원(良川書院)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홍관(洪灌)과 홍언박(洪彦博), 조선 중기의 문신 홍위(洪瑋)를 배향하고 있으며, 1747년(영조 23)에 홍위가 스승 유성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칠탄숙(七灘塾)’이라는 서당을 건립한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이후 1786년 서당의 북쪽에 사당을 세우고 홍언박과 홍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798년(정조 22)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홍관을 추배하였습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6년 오랫동안 세거해 온 남양 홍씨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습니다.
양암정(兩岩亭)은 조선시대 문신 서담(西潭) 홍위(洪瑋)가 자연을 음미하며 송학(宋學)을 연마하기 위해 1612년(광해군 4)에 세운 건물로 1868년(고종 5)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888년(고종 25)에 다시 세웠습니다. 정자는 풍치가 좋은 위천 옆의 절벽 끝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토석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는 대문을 세웠으며 문의 우측에는 양암정이라 음각된 암석이 있습니다.
칠탄숙 강당(七灘塾 講堂)은 서담 홍위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29년에 지은 서숙(書塾)입니다. 칠탄은 외량리를 감싸며 흐르는 물의 일곱 여울을 일컫는 말로서 동네 입구 첫 여울을 열풍탄(熱風灘), 서애 유성용을 모신 남계서원 앞을 남계탄(南溪灘), 그 위의 여울을 선곡탄(線谷灘), 양천서원 앞 여울을 양천탄(良川灘), 내량리를 중심으로 흐르는 곳을 내량탄(內良灘), 가마솥 모양의 산봉우리 앞 여울을 부봉탄(釜鳳灘), 마지막 일곱 번째 여울을 서담탄(西潭灘)이라 합니다.
남곡서원(南谷書院)은 고려시대 보문각 대제학과 판도판서의 관직에 오른 영천 이씨 영양군 6세 남곡 이석지(李釋之)와 그의 자제인 집현전 제학과 한성부윤을 지낸 장자 안우, 직제학 겸 병조판서 차자 안직, 이조 정랑 삼자 안유, 군기사 부정 현실, 안실 등 6위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대강당, 남곡의 사적비와 비각, 제학의 유적비와 비각, 두문동 72현의 행적을 새긴 와비와 창건기문, 남곡서원 표지석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당인 효충사는 5위의 위패를 종향하였습니다.
광석재(廣石齋)는 고려가 망하자 평생을 두문불출하고 이름을 ‘려(麗)’자로 고친 충신 이려(李麗)의 애국충절과 그의 증손인 이세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주목사를 역임한 후손 이정기가 1660년경에 건립하였습니다. 대지가 경사져 있기 때문에 자연석으로 기단을 높이 쌓았습니다.
양산서원(陽山書院)이 있는 마을은 부림 홍씨(缶林 洪氏)의 세거지로 고려 말의 충신 홍노(洪魯)와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 홍귀달(洪貴達), 이좌좌랑을 역임한 대학자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성현의 위패를 봉안한 묘우, 강당인 홍교당, 입나재, 구인재, 읍청루, 반무당 등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다가 1897년(광무 1) 강당을 현재의 규모로 중건하였고 1989년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강당 뒤쪽에 건립한 장판각에는 홍노의 <경재선생실기(敬齋先生實記)> 목판과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홍여하가 수찬한 <휘찬려사(彙簒麗史)> 목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남계서원(南溪書院)은 1581년(선조 14) 3월에 남계정사로 창건되었으며, 1607년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뒤 1621년 후진들이 중수하여 1627년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李好閔)을 추가 배향하여 봄, 가을로 봉향해 왔습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자 위패를 하회로 옮겼으며 일부 건물만 남아 서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으나, 1990년에 영천 이씨, 남양 홍씨, 경주 이씨, 연안 이씨, 해평 김씨, 풍산 류씨 등 7개 문중 후손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습니다.
화계서원(華溪書院)은 돈암(遯巖) 손기남(孫起南)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6년(영조 2)에 창건되어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7년(광무 1) 당시 의흥군수 신태철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밀양 손씨 후손들의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선조들 집집마다 화계서원의 주요목재(기둥과 대들보 및 석가래 등)를 감춰 두었다가 새로 복원하여 숭덕사 모성당으로 개칭하여 현재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송호서원(松湖書院)은 1753년(영조 29) 설립되어 운영해 오던 송호서당에 1798년(정조 22)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진(李軫)과 이보(李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855년(철종 6)에 서원으로 개편하였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광복 후 복원하며 이숙황(李淑璜)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강당·주소(廚所)·삼문 등이 있습니다.
봉강서원(鳳岡書院)은 목화를 전래한 고려시대의 문신 문익점, 물레를 고안한 문래(文來), 직조법을 발명한 문영(文英) 등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1861년 창건하였으며, 1960년 현재의 서원 터에 문중의 후손들이 신실인 경현사, 삼문, 강당, 외삼문인 상의문, 충선공 유허비각 등을 중수하였습니다.
제동서원은 당나라 장군 이무, 김유신, 소정방 등 세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김해 김씨 후손들이 다시 사당을 지어 보존해 왔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946년 옛 사당 터에 새로운 서원을 창건하였습니다.
효령사(孝靈祠)는 삼국통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김유신과,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이무를 함께 봉안하고 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김유신·소정방·이무의 삼장군은 지금의 장군동 근처에서 회동하였으며, 장군봉에 지휘소를 세우고 기거하면서 백제를 정벌할 작전을 수립하여 백제를 쳤다고 합니다. 대업을 이룬 뒤 삼장군은 다시 효령에 들러 장군봉에 올라 “이제 삼국 통합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주민에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려 말 나라의 명으로 사당을 세워 그 이름을 장군당이라 하였습니다.
신라 초기의 불교유적들
군위에는 신라 초기의 불교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2석굴암은 493년(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했으며 석굴은 지상에서 20m 높이에 위치하고 석굴 안에 있는 삼존석불은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로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 자락에서 꽃 피워지고 신라 왕도 경주로 전해져 결실을 맺었는데 팔공산 비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이곳에서 거대한 바위산 절벽을 이루었고, 이 절벽 허리 20m 높이에 남으로 향한 둥근 천연동굴에 삼존불상을 봉안하였으니 삼존석굴이라 합니다. 신라의 불교 공인(법흥왕) 전 핍박받던 시대에, 숨어서 오로지 불심으로만 수도하던 곳으로서, 8세기 중엽 건립된 경주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단층 탑신부를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탑신부는 근래에 새로 쌓아서 원형이 변하였으나 본래의 탑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석굴 앞에 절이 있었으나 폐허가 되고 당시의 주춧돌만 남아 있었습니다. 1989년 복원사업으로 선방·산신각·종무소·법당·소하천 등을 차례로 증개축 하였습니다.
법주사는 청화산의 동남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 소지왕 15년에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조선 인조원년에 소실되어 1660년(현종 1)에 재건된 전통사찰입니다. 경내에는 오층석탑과 국내에서는 가장 큰 왕맷돌이 있는데, 일반 맷돌과는 달리 4개의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이 왕맷돌은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인각사는 642년(선덕여왕 11)에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데 절 입구에 있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기린이 뿔을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충렬왕 10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건되고 토지를 하사하여 보각국사 일연의 하안지지(下安之地)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불교서적 100여권을 저술하였고,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 다시 중수되어 숙종 25년에 당시 의흥 현감 박성한이 증축하였습니다. 일연은 이곳에서 입적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중국 왕희지의 유필로 집자한 보각국사 탑 및 비와 석불상과 부도가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탑 양식을 이어받은 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양식 연구에 중요한 탑입니다. 각 층의 비례와 지붕돌 형태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어 석탑의 편년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석불좌상은 불신과 배(舟) 모양의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수인은 오른손으로 촉지인을 취하고 있고, 왼손으로 선정인을 취하였으며, 손 위에는 조그마한 보주를 올려놓았습니다. 조각 수법으로 볼 때 10세기에서 11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이 시기의 불상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보각국사 탑과 보각국사 비는 1289년(충렬왕 15)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부도탑과 그 탑의 비문입니다. 일연은 노년에 인각사에서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고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보각국사비와 정조지탑이 세워졌습니다. 탑의 상층은 불상, 중층은 연화, 하층은 토끼, 사자, 원숭이 등 여러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인각사 동쪽 2km 떨어진 부도 골에 있었으나 외지 사람들이 자기 조상의 묘를 안장하기 위해 1928년 서쪽으로 50m쯤 옮겨 놓은 것을 1978년에 인각사 경내로 다시 옮겼습니다. 비는 1295년(충렬왕 21) 제자인 청분(淸分)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죽허(竹虛)가 왕희지의 유필을 집자하여 만들었습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遺事)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로서, 저술을 위하여 청년시절부터 사료를 수집하고 원고의 집필은 대략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입적하기까지 인각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태사는 산의 형태가 마치 배처럼 생겼다 하여 선암산(船岩山)이라 명명되는 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661년(문무왕 1)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 건물들은 새로 지은 것입니다. 수태사는 본래 물이 귀한 곳이므로 물이 풍족하게 나오도록 바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합니다. 선암산 역시 커다란 바위산으로 반석과 폭포, 그리고 동굴 등이 많고 그에 얽힌 전설도 다양하게 전하는 명산입니다. 문헌 자료로는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어떠한 역사가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절 입구에 세워진 근대의 비석 3기 가운데 하나의 대좌가 9세기 석등의 하대석(下臺石)인 것으로 보아서 통일신라시대 수태사의 존속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원통전 옆에 있는 오층석탑이 10세기 무렵에 세운 것으로 보이므로 이를 통하여 당시 수태사의 사세를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폭포가 산수의 조화를 이루며 호랑이 굴, 손 장군 피난 굴, 가마솥안과 같이 생긴 반석 등이 있습니다.
지보사는 마치 배를 띄운 모양 같다고 해서 선방산이라는 산 중턱에 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673년(문무왕 13)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1942년과 1972년에 다시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사찰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하여 지보사라 합니다. 첫째는 큰 가마솥이고, 둘째는 천연의 오색 흙인데 이것은 단청하는 물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셋째는 맷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민족문화말살을 위해 가져갔거나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사찰내의 삼층석탑은 보물 제682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 건물은 대웅전·삼성전·요사채·서별당 등이 있습니다.
압곡사는 677년(문무왕 17)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5km 지점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장소가 협소하여 아미산 봉우리에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하늘을 향해서 던지니 현재의 압곡사에 앉아 그곳으로 사찰을 옮기고 압곡사라 하였답니다. 원래 이 골짜기에는 물이 없었는데 나무오리가 앉은 뒤부터 깨끗한 물이 흘러내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압곡사에는 만은당대선사·만우당대선사·보광당대선사·수월당대선사·의상조사·정허당대선사·사명당·총산당대선사·현암당대선사 등 9폭의 선사영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정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글을 적어 놓았으며 특히 만우당대선사와 현암당대선사의 초상화에는 지운영이 찬한 글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4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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