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삼마치고개
여우 까마구 살쾡이 멧돼지 꿩이 살았다는 오음산 자락
그 해 겨울 1.4 후퇴
춘천 양구 인제 홍천의 피난민들
삼마치고개 넘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전쟁만은 피해 보자 몰려들었다
밀며 밀치며 넘으려는 발길 삼마치로 이어지는 골짜기마다 가득했다
홍천읍에서 이어지는 삼마치고개는 물론이고
월운서 넘는 싸리재고개에도
방량골에서 이어지는 방어재 고개에도
지게에 달구지에 보따리에 한 집안의 생계를 이고 지고
놓치면 헤어질세라 손에 손 잡고 고개를 넘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홍천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과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피난민들 틈에 섞여 고개 넘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쾌청한 하늘에 까마구처럼 쌕쌕이가 몰려오고
여기저기 낙하산이 날리고
장병들도 곧 철수할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소문은 연기처럼 마을마다 퍼지고
뒤늦게 사람들이 부랴부랴 보따리를 꾸려 삼마치로 향했다
눈 쌓인 겨울 날
일찌감치 어스름 저녁이 오고
남으로 남쪽으로 가는 피난민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음력 동지달 스무여드레의 밤
그날이 1월 5일이었다
말 세 마리를 갈아타고 넘어야 한다는 삼마치고개
밤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피난 행렬 위로 쌕쌕이가 날아다니더니
기름이 소낙비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석유냄새가 난다고
뭔 일이냐고 쳐다본 순간 섬광처럼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피난길은 삽시간 화염에 휩싸였다
이어 무차별 총격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석유 냄새에 살 타는 냄새에
칠흑 같은 밤길 달아날 곳도 없이
몰살당했다
피난민 틈에 섞인 중공군과 인민군을 섬멸하고자 저지른
만행이었다
열두 살의 상원이도 엄마가 싸준 짐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으나
엄마 손 놓치고 방량 고모네서 자고
집으로 오는 길에 총을 맞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줄줄 피나가는 상처를 졸라매고 견뎌낸
몸 한쪽이 아직도 쩔뚝거린다
새벽 동트기 전
아군의 뒤를 따라 피난길을 나선 열두 살 종구는
아부지 손 꼭 잡고 캄캄한 삼마치를 넘어 창봉쯤에서
여기저기 불에 까슬려 나뒹구는 시신들을 보았다고 한다
남으로 전쟁을 피해 떠났던 길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후미진 산모퉁이 구덩이에 끌어다 쌓았다고 한다
그 많은 시신들 중 일부는 유족들이 찾아가고 나머지는 구덩이에 쓸어 묻었다
그 중 방량 송장구뎅이는 그 날의 일을 알고 있다
분명 삼마치 피난길에서 살아남은 목숨은 있을 듯한데
나서는 이가 없다
그래서 더 슬픈 전쟁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기억해야만 하는
목숨을 묻어둘 수 없다
* 1951년 1월5일 밤 홍천삼마치 고개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다.
* 미 공군 문서에는 ‘3천 명의 피난민(refugees)을 공격했다.’고 짧게 적혀 있다.
* 증언에 의하면 삼마치고개 남쪽 상창봉리, 삼마치고개 북쪽 아랫마을, 삼마치리, 방량골, 장전평 등에 이르는 9km의 길이 온통 시신으로 덮여있었다. 폭격은 무차별 이루어졌는데, 당시 피난민
은 수천 명에 달했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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