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겨울, 한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가 울음을 터뜨렸다. 산모의 어머니는 우는 딸을 채근했다. "어허. 아이를 앞에 두고 그럼 못 써" 하지만 산모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낳기 전부터 딸이란 걸 알았음에도, 막상 정말로 딸이 태어나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산모의 머릿 속엔 시부모의 표정이 그려지는듯 했다. 산모의 남편도 어정쩡한 표정으로 아이를 받아 안았다. 축하 아닌 실망 속에,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실망 속에라도 태어난 건 다행인 축에 속했다. 1990년, 만연한 남아선호 '사상'에 백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까지 겹쳤다. 그렇게 1990년에 태어난 신생아의 남녀 성비는 116.5로 역대 최대 불균형을 기록했다. 여자 아이가 100명일 때 남자아이는 116.5명 꼴로 16.5명 더 태어난 것이다.
태아의 성별을 감별해 여아를 낙태했다는 사실은 사회적 문제가 됐다. 1987년에는 의료법상 '태아 성감별'을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하지만 '핑크 옷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에 낙태를 감행하는 일은 계속됐고, 결국 1996년 3월 처음으로 성감별을 한 의사와 조산사를 적발해 면허 정지 처분을 내렸다. 2010년이 되어서야 낙태가 불가능한 임신 후기에 성별을 알려 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
그렇게 사라진 여자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SF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황모과 지음, 문학과 지성사)는 지워진 여자 아이들을 호명한다.
1990년대 여자 아이들이 '복원'된 세계
소녀시대의 '다만세'는 20·30여성들에게 특별한 노래다. 동년배 여성들이 전부 불렀던 노래. 듣기만 해도 왠지모를 용기가 생기는 노래다. 지난 2016년 이화여대 시위에서도 경찰 진압 과정에 맞서 학생들이 '다만세'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희망적인 가사도 한 몫 한다.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작가는 1990년, 사라진 백말띠 여성을 20·30 여성들이 그린 희망의 세계로 '복원'한다. 그래서 소설 2부의 제목도 '다시 만난 세계'다.
소설은 1990년생 채진리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날, '쿵'하는 강한 진동을 느낀 진리는 세상이 어딘가 뒤틀렸음을 직감한다. 도착한 교실에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학교에 원래 너희 여자애들은 없었다며 소리치는 남자 아이들. 다정했던 남자친구 훈우도 여자아이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여자아이들은 하나 둘 사라진 학교는 급기야 남자 고등학교로 명패를 바꾼다. 진리는 평행세계를 오가며 사라진 여자 아이들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진리는 1990년대에 있었던 일을 목격하게 된다.
"남아 선호 사상, 그게 도대체 뭐지? 여아 불호 사상이란 같은말 아니야? (중략) 특정 연도에 태어날 여자아이들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사회 전체가 고안해냈다. 끔찍한 발상이었고 무지막지하게 집행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형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도, 우리 세계에서도. 태어나기도 전에도 태어난 뒤에도 어떤 차원에 살든 이 나라에서 우리는 끊임 없이 지워지는 존재였구나 여기서도 거기서도. 이전에도 지금도."(198p)
진리는 사라지는 친구들을 지키려 남아있는 친구들과 동아리를 결성해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 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사라진 아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폐지'가 대선 공약인 2022년
엉뚱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SF 소설은 때로 현실의 부조리를 부각시킨다. 현실을 낯설게 만듦으로 우리가 공기처럼 취급했던 세계의 부조리가 얼마나 기이한지 드러내 준다.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옛 말이 됐지만, 문학 속 재현 세계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감을 자극하고 깨워준다. 이를테면 이 소설속 평행세계는 현실에도 있다.
얼마전 강남역에 취재 갔을 때의 일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 청년들이 이번 대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다. 37명의 여성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들은 눈에 띄게 주변 눈치를 봤고, 거리에서 크게 이야기 하는 상황을 불편해 했다.
그 중 8명의 여성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입을 모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언급했다. 한 20대 여성은 "대선 후보들끼리 누가 더 여성을 배제하는지 경쟁을 펼치는 것 같다. 그 흐름의 시작이 윤 후보의 여가부 폐지 공약"이라고 지적했다. 한 30대 여성은 "여성이 당당하게 살기 어렵다. 정말 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20대 여성은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는 대선같다. 한국에서 살기 싫다"고 말했다.
윤 후보는 나아가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며 "여성은 불평등한 취급을 받고 남성은 우월적 대우를 받는다는 건 옛날 얘기"라는 인터뷰 내용으로 논란을 빚었다. 윤 후보는 대선 지지율 1위, 2위를 다투고 있는 유력 후보다.
"처음엔 한두 명쯤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고작 한두 명만 제정신인 것 같았다. 이곳은 이중적이다. 각자 현실이라고 믿는 두 개의 세계가 우연히, 동시에 겹쳐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어쩌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꿈꾸는 곳도,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곳도 달랐다"(89p)
소설 속의 채진리가 자신을 비롯해 여자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작가는 이들이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고 표현한다.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들과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선 후보는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소설이 현실같고, 현실이 소설같은 세상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에서는 사라지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채진리는 자신을 대변해 줄 사람이 있으면 하고 바란다. 2022년 대선에서는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해줄 이가 있길 기대해본다.
"목소리 큰 통역사 한 명 있으면 좋겠다. 큰 소리로 우리 마음 대변해줄 사람."(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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