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흠(鄭斗欽:1832~1910)선생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경술년(1910년) 한일합병 때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같은 시기에 매천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곡성에서는 정재건(鄭在楗), 김제에서는 장태수(張泰秀)가 각각 유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정두흠은 <손명사(損命詞)>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순절 당시의 유묵은 확인되지 않고, 그의 문집인 운암집(雲巖集)에 칠언율시 2수만 전한다. 운암 정두흠선생의 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지은 <손명사>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장흥문화원(고영천 원장)은 고전국역사업 일환으로 최근 역주운암선생문집 간행하였다. 국역은 홍순석 명예교수(강남대, 한문학전공)가 전담하였으며, 김대현 교수(전남대 국문과)가 해제를 썼다.
운암집은 4권 2책으로, 1919년도에 장자인 정제하(鄭濟夏)에 의해 간행되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이 서문과 <운암재기(雲巖齋記)> <망화대기(望華臺記)>를 썼다. 그리고 기우만(奇宇萬)이 <묘갈명>을 썼다.
운암집에는 을사년(1905) 조약 때 순절한 신헌‧조병세‧민영환‧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 6명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사가 있다. 1906년에 순절한 최익현을 애도하는 시편도 있다. <임오군란을 탄식함(嘆壬午軍擾)> <의장 개제를 탄식하며(歎衣章改制)> <의병을 일으킴에 감회가 있어 읊다(倡義感吟)> 등 당시의 정황을 개탄하며 지은 시도 적지 않다.
운암 정두흠은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학한 문인이다. 부친과 형님의 강권으로 48세 되던 1879년(고종16)에 출사하여 권지승문원정자‧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을 거쳐 56세 사헌부 지평에 오른 문신이다. 세 차례 대성(臺省)에 오르고, 사간원을 출입하면서 불의를 만나면 곧바로 간쟁하고, 잘못을 보면 반드시 탄핵하였다. 재임 중 <청색천변소(請塞天變疏)> <청엄방헌소(請嚴邦憲疏)> <만언소(萬言疏)> <청파매관소(請罷賣官疏)> <청납직언소(請納直言疏)>를 올렸다. 스스로 ‘상소에 미친 사람[疏狂]’이라 할 정도로 강직했던 인물이다. 운암 정두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풍채가 정숙하며, 충효는 남에게 옮길 만하고, 문학은 세속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정두흠 선생의 부인인 청주한씨도 “나라 망하고 남편이 죽었으니 홀로 살 수 없다.”고 하며, 운암의 1주기를 제사를 지내고 조용히 따라 죽었다. 이같은 우국충정과 정절에도 불구하고, 운암 정두흠의 사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도로가 횡단하였고, 망화대(望華臺) 표석만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두흠선생과 같은 시기에 곡성에서 순절한 정재건(鄭在楗:1843∼1910)은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제에서 순절한 장태수(張泰秀:1841~1910)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한말의 순국지사는 대부분1962~1963년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아직까지 운암 정두흠선생이 구한말 순국지사로 소개된 연구업적은 없었다.
홍순석 교수는 지난 11월 25일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순국지사 운암 정두흠의 생애와 <손명사>」란 주제로 발표한 바 있으며,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은 12월 2~3일 회은 위원량선생의 망곡서 암각문과 운암 정두흠선생의 망화대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탐방하며,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를 참배한 바 있다.
독립기념관 김건실 연구원은 운암 정두흠선생의 행적을 지난 11월 25~26일 현장조사하고 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하였다. 김건실 연구원에 의하면 금년도 8.15 광복절에 추서될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이에 장흥군(정종순 군수)과 특히 고향인 유치면에서 정두흠선생 선양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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