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와 농성에서 예감한 '마당극'
1971년 3학년이 되자 나는 문리대 연극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번 학기에 문리대 연극회가 선택한 작품은 김지하 선배가 직접 쓴 두 개의 단막극 ‘구리 이순신’과 ‘나폴레옹 꼬냑’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김지하 선배가 직접 연출까지 맡아주기로 약조되었다.
‘구리 이순신’은 2인극이다. 등장인물은 광화문 네거리에 서있는 이순신 동상과 그 곳을 지나던 엿장수이다. 독재자 박정희는 친일 전력이 있는 자신의 약점을 무마하고자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드는 상징조작을 기도하였고, 이를 간파한 시인 김지하가 엿장수를 통해 독재의 우상을 벗겨내고 참된 지도자상을 드러내고자 의도한 작품이다. ‘나폴레옹 꼬냑’은 오적(五賊-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고급공무원, 장성)의 부인들이 등장하는 수다스런 희극(喜劇)으로, 각자 허영을 자랑하며 교만을 떠는 중에 저절로 권력자 남편들의 무능과 부패가 폭로되는 풍자극이다.
두 작품은 단막 규모로서 완성도에서는 미흡하지만, 대단히 정치성 강한 작품이면서 형식상으로는 자연주의 양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김지하의 작품은 끝내 공식 공연되지 못했다. 대학 당국이 예산을 철회하고 시청각관의 공연장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대학가는 어차피 삼선개헌 장기집권 반대와 교련 반대(학원 병영화 반대), 거기에 3과(철학과, 미학과, 종교학과) 폐합 반대 이슈까지 겹쳐서 어수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 중 가장 큰 본관 4층 강의실에서 농성이 벌어지자 ‘나폴레옹 꼬냑’에 출연하고 있는 여학생들 모두가 자연스레 농성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시위 때 부르는 이른바 투쟁가요나 민중가요가 몇 곡 되지 않은지라 다들 무료한 분위기였는데, 설상가상 교수님 몇 분이 올라오시더니 여학생들만 골라 귀가를 종용하는 것 아닌가? 다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거날, 보다못한 내가 별 수 없이 나섰다. “자, 교수님들도 동참하셨으니 함께 따라서 구호를 외쳐봅시다. ‘남북분단 서러운데...’” 그러자 모두들 따라 외쳤다. “남북 분단 서러운데...” 분위기가 제법 집중되기에 나는 이어서 외쳤다. “남녀 분열 웬말이냐?” 모두들 폭소하며 따라 외치자 여학생들은 교수님의 권유를 뿌리칠 계기를 얻었고, 교수님들은 민망했던지 피식 웃으며 슬며시 나가주셨다.
그 날 문화사적으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농성이 길어져 통금시간을 넘기자 누군가가 “야, 그 연극회 공연도 못하게 됐다는데, 여기서 한번 해보지.”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 아닌가? 여러 남학생들이 솔깃해져서 동의·독려를 하자 우쭐해진 여학생 출연자들 몇몇이 마치 연습하듯이 대사들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어랍쇼, 관중의 호응이 열화같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배우와 관객이 서로 아는 처지라, 관객이 가만있지 않고 배우에게 농을 걸면 배우도 가만있지 않고 즉흥으로 대응하거날, 어, 이게 뭐지? 오호라, 닫혀있던 연극이 ‘열린 연극’으로 바뀐 것! 배우가 틀에 박힌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탈(逸脫)한 분위기 속에서 틀을 깨고 관객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열린 연극’이 전개된 것이다.
이 날 뜻하지 않았던 농성장에서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즉흥공연이 후에 ‘마당극’이라 불리는 새로운 연극의 발상에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1971년 봄학기는 내내 시위의 연속이었다. 농성과 시위가 계속되면서 총학생회장 이호웅 동지나 손예철 대의원회 의장은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였고, 배후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핵심들은 여간해선 표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력의 부재랄까, 시위의 동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 날도 문리대 정문 앞 큰 길에는 시위 학생 수십명이 집결하여 가두진출을 꾀하고 있었고, 종로5가 시내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위대만한 숫자의 경찰들이 방패를 세워놓고 막고 있었다. 시내로의 진출을 놓고 지리한 대기상태가 지속되자 참가자들도 점점 지쳐가는데, 앞에 나서 구호를 외치는 주동자의 언변이 영 신통치 않아 보였다.
답답하게 지켜보던 내가 나서볼 요량으로 배후 주동자 유인태 형(전 국회의원으로 청와대 비서관시절 ‘엽기수석’이라는 별명을 얻음.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의 허락을 받아 시위대 앞으로 나가보니 저만치 경찰기동대가 가로막고 서있거날, 물리적으로 그들을 제치고 시내로 진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망해보였다. 어떻게 이 난관을 뚫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일단 기선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물러가라.”
얼굴이 알려진 연극배우인데다 앞서 외치던 주동자와는 목청부터 다른바, 모두들 일신(一新)하여 따라 외쳤다. “경찰은 물러가라.”
제법 반응이 옴을 느끼면서 나는 좀더 기세를 올려 외쳤다.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참가자들도 기세가 오르는지 따라 외쳤다.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그런데 아뿔사! 그래놓고 나니 그 다음 구호가 마땅히 떠오르지를 않는다. 물러가지 않으면 쳐들어간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위를 마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한데, 구호의 선창은 리듬이 생명인지라, 리듬이 깨어지면 낭패가 될 듯싶어 별 수 없이 다음 구호를 내질렀다.
“조금 있다 물러가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뜻밖의 구호에 잠시 벙벙하던 시위대들이 폭소를 터뜨리면서 산발적으로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 물러가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나도 그렇게 간주하겠다.” 경찰쪽을 바라보니 그들도 어이가 없는지 킥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이 재담 구호는 이를테면 경찰의 봉쇄를 뚫고 시내로 진출하려고 하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자기폭로한 셈인데, 도리어 꽉 막힌 시위판을 명랑하게 바꿔놓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투적인 책임감 또는 무모한 강박감에서 벗어난 시위대는 한참동안 맘껏 떠들고 외치며 자기신명을 북돋울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1971년 봄 문리대 정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 중 내가 앞에 나서서 그런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30년쯤 지나고서야 그 장면이 누군가의 발설로 주변에 회자(膾炙)되고 있음을 알았다. 발설자가 누구인지 추적해보니 한 사람은 문리대 시위의 배후 주동자인 유인태 형이었고, 또 한 사람은 문리대 연극회 소속의 목격자 김석만(후에 연우무대 활동 및 한예종 연극과 교수로 한국연극계의 대표연출가로 자리잡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퍼뜨린 재담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유인태 형은 내가 외친 구호를 “경찰은 물러가라.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안 물러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로 기억하고 있었고, 김석만은 “경찰은 물러가라.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우리가 물러가겠다.”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기억의 차이는 그 후 두 사람의 처지가 확연히 달라짐으로써 생겨난 결과였다. 인태 형은 몇 해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붙잡혀가서 남들보다 훨씬 오래 5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그러니 ‘안 물러나는’ 것으로 기억이 꽂혔을 수 있다. 김석만은 그 후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서 생활하다 수 년만에 돌아왔다. 그러니 ‘우리가 물러가는’ 것으로 기억이 정착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외친 구호는 분명 “경찰은 물러가라.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조금 있다’ 물러가는 것으로 간주하겠다.”였다. 운율이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수준이 다름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어떻든 두 사람의 기억이 다른 것은 기억력의 문제라기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 체험의 차이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기꺼이 이해하고 있다.
탈춤반의 태동과 탈춤운동의 전개
1970년대에 전개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적 사건은 단연 민속극부흥운동 즉 탈춤운동이다. 탈춤운동은 3수·재수생 70학번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 선두에는 채희완(70학번 미학과 학생으로 후에 대학 탈반의 ‘교주’로 불리움)이라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있었다.
971년 초가을 밤, 동숭동 문리대 교정 한편에서 봉산탈춤 가면극 전판이 벌어진바, 횃불을 밝히고 펼친 이 한판의 공연이야말로 1970년대에 전개된 ‘우리것 찾기운동’의 효시(嚆矢)라 할만하다. 이후 수년동안 전국의 대학에는 ‘민속극(가면극)연구회’ 혹은 ‘탈춤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문화를 찾는 동아리(서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단연 청년문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대학가 탈춤운동이 갖는 의미는 명맥이 끊긴 우리문화의 전통이 무형문화재라는 보호제도에 기대어 근근히 연명(延命)하고 있을 때, 관(官)의 보호와는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현재의 문화로 부활했다는 데 있다. 거기에 더 진전된 의미는 탈춤이라는 전통양식이 민중예술의 자발성과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각성시키고,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한 반독재 저항의 주체를 형성시켰다는 데 있다.
1971년 봄학기, 문리대 연극회가 수행하려던 김지하 작(作) 정치 단막극은 끝내 공연이 불발되었고, 나는 학교당국의 지침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런 정황에서 서울대학교 가면극연구회는 봉산탈춤을 공연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당시 학생과장이었던 안상진 교수가 임진택에 대한 외부의 징계 압력을 어떻게든 무마해보려고 조용히 나를 호출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야단치던 장면은 아직도 나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임군, 대학생이면 대학생다운 활동을 해야지, 굳이 문제작가의 문제작품을 끌고들어와 고집할 필요가 뭐가 있나? 저 가면극연구회를 봐라. 얼마나 멋지나? 저런 활동은 학교에서 얼마든지 보장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말이다. 연극회도 세계 명작들 가져다 수준높은 공연을 추구해야지, 왜 예술에다 정치를 끌어들이나?”
앞서 잠시 언급했듯,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은 본래 언론의 기능을 담지해 왔으며, 모든 예술작품은 정치성을 직접 드러내든 안 드러내든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역설을 여기서 더 주장할 필요는 없겠다. 이후 각 대학 탈춤반에 그보다 훨씬 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가을, 서울의 9개 대학에 위수령이 내리면서 운동권 학생들이 몽땅 강제징집 당하고 전국 각 대학의 사회과학 서클들이 강제 해산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바, 그 사회과학 저항세력의 빈 자리를 각 대학의 탈춤반들이 채우게 된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대학 당국이 활동을 얼마든지 보장해주겠다고 공언한 전국의 탈춤패들이 197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최대 저항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벽두에 전태일의 분신이 있은 후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노학연대’라는 활동개념이 생겨났고, 탈춤패 · 연극패(마당극패) · 풍물패(농악패) 등 선구적인 문화패들이 있어 ‘노동자 문화운동’이라는 또다른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청계피복 ‧ 동일방직 · 원풍모방 · YH무역 등의 여성노동자들(미싱타는 여자들, 옷 만드는 여자들, 가발 맹기는 여자들)이 1979년 그 견고하던 박정희 유신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폐쇄된 도시에 떨어진 강력한 위수령(衛戍令)
1971년 가을학기가 시작될 무렵, 거의 매일 함께 지내던 홍세화 형이 색다른 구상을 꺼냈다.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정치학과 김재홍 학우가 보선되었는데, 문리대가 독자적으로 언론매체를 하나 창간하기로 논의했다는 것이다. 내가 세화형과 ‘거의 매일 함께 지냈다’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고 사실이다. 우선 세화형은 나와는 외교학과 동기생(?)으로, 나는 그가 늘 파묻혀 지내던 음악감상실(학교앞 ‘학림’과 명동의 ‘티롤’)에 따라나서 서양 클래식음악을 공유하였고, 그는 내가 책임을 맡은 연극회에 어슬렁 나타나 극작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을학기에는 문리대 연극회가 세화형이 쓴 ‘폐쇄된 도시’라는 작품을 공연하기로 하고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폐쇄된 도시’는 한반도의 분단된 상황을 은유(隱喩)한 발상으로, 독재자가 판치는 고립된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젊은이들이 결국 탈출을 포기하고 독재자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 역시 대학당국의 사전 심의(검열)에 걸려 공연이 불허된지라, 또한번의 난관이 예고되고 있던 터였다.
1971년 가을학기, 대학가에 위수령(衛戍令)이 떨어졌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종신집권을 향한 폭압적 야욕이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전국 각 대학의 학생회장단과 간부들, 사회과학 서클의 수장들이 무더기로 징집되어 군대로 끌려갔다.
나도 징집 명단에 포함되어 어느 날 오후 용산역에 집합, 한밤중에 열차로 고향인 김제에 도착해서 어느 육군 병영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징집 연기’ 무종(無種) 판결을 받았다. 의학명(名)으로는 ‘헤르니아’라고 한다는데, 나는 내가 ‘탈장’이라는 신체결함을 갖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내왔던 것이다.
무슨 통증을 느끼는 것도 아니어서 그대로 버티다 다음 해에 또다시 무종 판결을 받고 공군 보충역으로 차출된 바, 이번에는 신원조회에 문제가 있어서(무슨 연좌제에 해당되었던가 보더라) 도로 귀가조처를 받았는데, 이건 또 뭔 일? ‘보충역 대기인원 과잉’으로 면제 통보를 받음으로써,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금관의 예수’와 ‘二都物語’의 합동공연
1972년, 대학 4년차이지만 무기정학에 휴학 등이 겹쳐 나는 한 학년 뒤로 처져있었다. 외교학과의 다른 친구들은 벌써 4학년이 되어 졸업 후의 장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스무명 동기생 중에 외무고시에 바짝 열중하고 있던 친구들이 다수였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친구가 한두명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서 예외가 홍세화 형과 나였다. 그러한 때 문리대 연극회는 계속 공연 불허에 아예 예산 자체가 배정되지 않는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원주에 기거하던 김지하 선배가 긴급히 연극회 후배들을 소집했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을 모시고 민주화운동을 추진하던 김 시인이 그리스챤(가톨릭)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카톨릭 교구 순회공연을 계획한 것. 준비한 작품은 ‘금관의 예수’로, 한국 교회의 부패·통속화를 풍자·비판하고 교회의 정화(淨化)·성화(聖化)를 모색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금관을 쓴 예수상이 등장하는 바, 돈과 권력으로 분칠된 조각상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발상은 전작 ‘구리 이순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시인은 이 연극에 노래가 필요하다며 특별히 김민기(‘아침이슬’의 작곡자로 나하고는 중고등학교부터 동창인데, 벌써부터 정보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던 천재)를 불러 앞장서도록 독려했다.
그리하여 모인 사람들 면면을 열거해보면, 외교관으로 재직중이던 이동진 선배가 협력작가로 나섰고, 서울미대 출신 최종률 선배가 연출을 맡기로 하고, 문리대 70학번 연극회 김석만이 무대감독을 맡고, 예수 역은 문리대 연극회 유우근(후에 대우그룹 해외 임원으로 재직 중 의문사한 인물)이 맡고, 신부 역은 초면의 섬유공학도 송지헌(후에 아나운서로 시사프로그램 명사회자로 활약한 인물)이 맡고, 순경 역은 70학번 문리대 연극회 이상우(후에 극단 ‘차이무’ 활동과 한예종 연극과 교수를 지낸 한국연극계의 대표연출가)가 맡고, 69학번 나는 탐욕스런 배불뚝이 사장 역을 맡았다.
‘금관의 예수’ 순회 공연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의 대교구를 거쳐 서울로 입성하는 수순을 취했는데, 천주교 성당 안에 마땅한 공연장이 없는지라, 강당이 있으면 강당을 사용하고 강당이 없으면 성당 입구 로비공간을 활용해서 공연을 펼치는 등 일종의 유격전(遊擊戰)이었다. 그럼에도 이 파격(破格)적인 내용의 파격적인 유격공연은 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특히 김민기가 작곡한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하는 주제곡은 지켜본 이들로 하여금 대단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지방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급히 논의된 아주 특별한 계획을 알게 되었다. 원래 우리의 마지막 공연은 카톨릭 계통 대학인 서강대학교 강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본 전위 연극단체인 ‘상황극단’ 가라주로(唐十郞)라는 이가 김지하를 만나러 단원들을 데리고 예고없이 급거 서울에 도착해서 자기네들과 합동공연을 하자고 제안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규 극장위주의 공연단체가 아니라 천막극장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시도하는 집단으로 이번 만남을 위해 대형 천막까지 운반을 해왔으나 부산항에서 압류를 당했으며, 자기네들은 그냥 야외에서 공연을 하면 된다고 떠벌린다는 것이었다. 가지고 온 작품은 ‘二都物語 - 두 도시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는 급히 계획을 바꾸어 서강대 강당이 아닌 야외공간을 찾아 보았는데, 지하 형은 서강대 정문에서 본부 건물로 올라가는 산등성이 테니스코트 공간을 공연장소로 지정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소수의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서강대 야외공간에서 김지하와 가라주로의 합동공연이 이루어진바, 그 광경을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금관의 예수’ 공연이 행해졌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삼삼오오 산등성이에 앉았고, 우리 배우들은 테니스코트 평지를 무대로 산등성이 쪽을 바라보며 공연을 진행했다. 이 말은 즉 우리 공연은 외양상으로는 야외에서 공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장무대에서의 공연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고백이다. 단지 야외에서 공연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야외공연으로서의 특징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극장무대에서의 효과가 감소된 산만한 공연이 될 우려가 있었다. 그 날 가랑비가 조금 왔기 때문에 관객 중에는 우산을 들고있는 이도 있었고, 젖은 산등성이는 관객들이 마음놓고 앉을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공연이 되고 만 것이다.
‘금관의 예수’가 끝나고 이어 벌어진 상황극단의 공연은 시작부터 의외(意外)였다. 한 배우가 큰소리로 누구를 찾으며 서강대 정문쪽에서부터 달려오는 것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더욱 충격인 것은 그들은 아까 관객들이 앉아있었던 산등성이를 무대로 삼았다. 어리둥절하던 관객들은 그제서야 테니스코트 쪽으로 내려와 그냥 선 채로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들의 연기는 예상 밖으로 거칠고 역동적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하는 장면은 없이, 리어카를 밀면서 뛰고 달리고 붙들고 넘어지고 부르고 외치고 노래하고 연설하고 절규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연극이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그 작품은 원래 천막극장에서 하던 것인데 천막을 압수당해서 임기응변으로 야외에서 펼친 것이라 했다. 당시 일본에는 천막을 사용하는 전위적 극단들이 있었던 바, 천막마다 색깔이 다른데, 가라주로네 천막은 검은 색이어서 구로텐트(Black Tent)로 불린다고 했다.
공연을 마치고 동숭동에 돌아와 한국과 일본 두 단체의 단원들은 어느 막걸리집에서 밤새 뒤풀이를 했다. 상황극단의 제1여배우가 마침 한국사람으로, 가라주로의 부인이며 일본에서 꽤 알려진 배우라고 했다. 김지하와 가라주로는 마침 동년배인지라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하더니, 그날 밤 술들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김지하가 가라주로에게 심회를 털어놓았다. “오늘 너희 연극을 보니 우리가 10년은 뒤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김지하는 우리 연극패의 ‘두목(頭目)’인데(당시 우리 후배들이 지하형을 그런 별명으로 불렀다), 우리 두목이 왜놈 쪽바리(?)에게 굽히고 들어간 것 같아서 자존심이 팍 상한 것이다. 엄청 취한 나는 돌연 술상 위로 뛰어올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가라주로... 형, 우리 두목이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좀 안좋은데, 우리 10년 후에 다시 만납시다. 10년 후에 그때는 우리가 당신보다 10년 앞서 있을거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가라주로가 부인의 통역을 귀담아 듣더니 왜놈 무사(武士)같은 동작과 어투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그래, 지하가 두목이면 너는 누구냐?” 미처 생각지 못한 역습이었다. 당황한 나는 그렇다고 ‘졸개’라고 답할 수도 없고 해서 우선 “에헴” 헛기침부터 해놓고는 잠깐 꾀를 내어 답했다.
“나는 두목은 못 되고 한목 되는 사람이다. 나는 한목이다.”
우리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만 포복절도(抱腹絶倒) 웃어놓니, 의아한 가라주로가 다시 부인의 통역을 귀기울여 듣더니 가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며 재차 왜놈 무사같은 동작으로 오른손바닥을 쳐들어 10년 후 다시 만나자는 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야간(夜間) 통금(通禁)이 있던 시절, 혈기와 호탕이 뒤범벅된 그 밤의 막걸리 술판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날 이후 나에게도 호(號)가 생긴 바, 내 호가 바로 한목(韓木)이 되었다. 때로는 순 우리말로 ‘한몫’이라고도 칭한 바, 각설하고... 가라주로네 구로텐트(黑色天幕)의 야외공연에서 자극을 받은 김지하와 우리 후배들은 곧바로 1년 후 우리의 전통예술 탈판과 농악에 바탕한 우리만의 독창적인 민중연극이자 민족연극인 ‘마당극’을 드디어 선보이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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