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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고요?"…'진짜 미국인'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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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고요?"…'진짜 미국인'은 누구일까

[프레시안books] 로널드 다카키, 레베카 스테포프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미국 인터넷매체 <버즈피드>는 지난 2014년 '백인들이 하는 말을 아시아인들이 한다면?'이라는 동영상을 올려 화제가 됐었다. 미국 사회에 아직도 만연한 인종차별을 재기발랄하게 비꼰 이 영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시아인 남성 : 너, 어디서 왔다 그랬지? (Where are you from, again?)

백인 남성 : 테네시.

아시아인 :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고? (No, where are you REALLY from?)

백인 : ……?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미러링'은 다음과 같은 질문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너 영어 진짜 잘한다. 혹시 입양아니?", "넌 '보통 이름'도 있어? 아니면 그냥 '백인 이름'뿐이야?"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이던 시절이었다.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로널드 다카키, 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는 이처럼 '진짜 미국인'을 자처하던 백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수퍼맨과 캡틴 아메리카, 람보,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이들 백인 남성(WASP)들을 '진짜 미국인'으로 무심코 여겨온 한국인들과 더불어.

책의 저자인 고(故) 로널드 다카키 UCLA 교수는, 그 이름에서 짐작하듯 일본계 이민 3세이다. 저자야말로 위의 <버즈피드> 동영상 도입부에 채택된 그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1957년 오하이오주 우스터대에 입학한 그에게 또래 학생들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었니?", "영어를 어디서 배웠니?"라고, 택시 기사는 "우리나라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물었다.

사실 이 책은 다카키 교수의 지난 1993년 저서 <또다른 거울 : 다문화 미국사(A Different Mirror: A History Of Multicultural America)>를 청소년용 도서로 다시 쓴 책이다. 다카키 교수가 작고한 지 3년 후인 2012년, 청소년 도서 작가인 레베카 스테포프가 440쪽이 넘는 원저를 280쪽 정도로 정리해 <청소년을 위한 또다른 거울(A Different Mirror For Young People)> 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펴냈다.

스테포프는 '청소년을 위한'(For Young People) 시리즈 전체의 저자로, 이 시리즈 목록에는 미국 유명 사학자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저항사>도 포함돼 있다. 진의 책은 물론 원저도(심지어 개역판도) 국내에 출간돼 있지만, 한국어로 된 다카키의 책은 스테포프의 손을 거친 청소년판이 유일하다.

때문에 책에서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나 구체적 사례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사에 대한 이해가 미국 고등학생보다 특별히 낫다고 자부할 수 없는, 기자를 포함한 보통의 한국인들에게는 갖가지 사례를 빽빽하게 나열한 원저보다 교양서 판이 오히려 접근성 면에서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인'들이 괴롭힌 인디언·흑인·동양인…과연 미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했나

책은 일명 '인디언'으로 불린 미대륙의 터줏대감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 대륙으로 '수입'된 흑인·중국인·일본인, 정치적 박해나 경제적 궁핍을 피해 도미한 동유럽계 유대인과 아일랜드인, 식량과 일자리를 찾아 '도강'해온 멕시코인 등 미국의 소수 인구 집단들을 일별하며 이들이 기존의 미국 사회(즉 백인들)로부터 어떻게 차별받고 인정받았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핀다.

한국인 독자들이라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가 돼 이주한 일본인들이 하와이·캘리포니아에서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 2차 대전 기간 이들이 수용소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볼 것이다.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악한 음모를 묘사한 대목은, 만약 미국에도 국가보안법이 있었다면 '미합중국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저자가 기소라도 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내용이다.

미국 독립혁명은 유럽의 구시대상, 야만, 봉건주의에 맞선 근대적 자유와 평등의 기획으로 칭송받아 왔다. 그러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자신들부터가, 자신들의 손으로 쓴 독립선언서의 진의를 의심받게 하는 언행을 보였다는 점을 저자는 담담하게 지적한다.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말로 시작하는 그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이 '인디언'들을 두고 했다는 말은 충격을 안긴다.

"저치들 나라 한가운데를 전장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저 미천한 자들을 제거할 방법은 없다. 세상에 저들 중 한 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저들이 전쟁으로 고통받게 해야 한다." (제퍼슨이 친구에게 한 말. 책 43쪽)

제퍼슨은 노예제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기는 했으나, 노예 신세에서 해방된 흑인과 백인이 미국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그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고 다카키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제퍼슨은 "풀려난 노예들은 미국 사회에서 나가야 할 것"이고 "아이티 같은 곳으로 배를 태워 내보내면 흑인 인구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카키는 "미국사의 '거대 서사'대로라면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유럽 이민자들이며 미국인은 곧 백인"이라고 꼬집는다. 이는 1893년 프레데릭 잭슨 터너가 <미국사에서 변경(프런티어)의 의의>를 통해 주창한 프런티어 사관에서부터, 1960년대 민권운동에 기여한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 오스카 핸들린 하버드대 교수의 <뿌리뽑힌 자들>에 이르기까지 주류 사학계의, 그리고 사회적 무의식의 근간을 이룬 고정관념이다.

다카키는 핸들린의 <뿌리뽑힌 자들>에 바쳐진 "오늘의 미국인을 있게 한 위대한 이주민들의 서사시"라는 찬사를 언급하면서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물론 (설마 이들은 백인들이 보호구역으로 쫓아내기 전까지는 '이주민'이 아니어서?) 아프리카·아시아·남미에서 온 이민자들은 왜 그의 연구 대상에서 빠졌느냐고 지적한다.

미국사를 프런티어, 곧 "문명과 야만의 접점"인 '변경'의 전진으로 정의한 터너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터너에게 변경 너머의 '야만'은 단지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변경의 끝에서 태평양을 건너면 동양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관련 기사 : 미국, '제2의 서부' 동아시아로 진격하다)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로널드 다카키, 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오필선 옮김) ⓒ갈라파고스

이런 관점에서 책을 읽다 보면, '네이티브 아메리칸(아메리카 원주민)'은 전쟁으로 죽이고 '아프리칸 아메리칸(흑인)'은 카리브해의 섬나라로 쫓아보내야 한다는 사람이나, 미국은 세계를 정복할 '명백한 운명'을 타고났으니 변경을 넘어 팽창하고 식민할 것을 주장한 이들이 과연 식민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나라, 만인의 평등을 약속한 독립선언서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 미국인들인지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들 백인들보다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전 노예의 아들들과 전 노예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꿨던 흑인 목사가 '미국의 정신'에 더 깊게 뿌리박인 사람임은 분명하다. 마틴 루터 킹의 저 유명한 1963년 연설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됐음이 자명한 진실이라고 믿는다"는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이 인용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 미국에서도, 미국의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한 미국인 중 한 명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철학적 정치인 중 하나로 불린 버락 오바마였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던 그의 출신지 논란은 이미 정리됐지만, 설사 그가 케냐나 하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다 한들 그의 연설은 부정할 수 없는 미국의 정신 그 자체를 담고 있었다.

반면 1814년 영국군 이래 200년여 만에 미 의회 의사당을 공격하는 등 가장 앞장서서 미국의 가치를 파괴한 이들이 '진짜 미국인'을 참칭했던, 금발 벽안의 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WASP)를 따르는 이들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이처럼 '진짜 미국인'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신화이거나 허구에 기인하기도 한다. '가장 미국적인 남성상'을 대표하는, 미 서부영화 속의 카우보이의 기원은 의외로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멕시코인은 목축업과 농업 다방면에서 고용됐다. 바케로(vaquero)는 앵글로 카우보이와 목장주에게 밧줄 다루기, 낙인찍기, 소떼몰이 등의 기술을 전수했다." (책 125쪽)

아일랜드인, 중국인, 유대인…이들도, 아니 이들이야말로 '진짜 미국인'

오바마는 그의 퇴임 연설에서 "소수자 그룹이 불만을 표현하며 평화 시위를 할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우리 건국자들이 약속한 평등한 대우"라며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이민자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은, 과거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미국의 근본 정체성을 파괴할 것'이라던 주장을 상기시킨다. 지금 증명됐듯, 미국은 신참자들의 존재로 인해 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해졌다"고 강조했다. 이 책의 주제의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연설이었다.

오바마가 연설에서 언급한 아일랜드인들의 도미행은 영화 <타이타닉>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3등 선실 승객의 상당수가 아일랜드계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고, 젊은 날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주인공 이름은 '잭 도슨'으로 성도 이름도 아일랜드에 흔한 이름이다. (다만 영화 속의 잭 도슨은 미 본토 위스콘신주 위소타 호수 인근 출신이다.)

대기근을 피해 온 아일랜드인들과 반유대주의의 위협에서 탈출한 동유럽 유대인들은 미국 동부의 의류 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했다. 아일랜드인이라고 갱단을 만들거나, 유대인들이라고 돈놀이만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그래도 백인이어서 '유색 인종'인 다른 인종 집단에 비해서는 국적을 얻는 등 정치적 권리 면에서는 한결 나았다고는 한다.

동양인, 그중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은 노골적인 적의에 시달렸다. 러더퍼드 헤이스 미국 대통령은(트럼프가 아니라) 1879년 "열등한 종족, 즉 흑인과 인디언을 상대해온 우리의 경험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인이 우리 땅에 오는 것을 저지하기에 적절한 조치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전, 미국의 유대인들이 마주한 반유대주의 현실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1923년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월은 유대인 학생 수를 최저로 유지해야 반유대주의 정서를 방지할 수 있다며 사실상 유대계 학생의 입학에 제동을 걸고 나섰고, 이듬해 미 의회는 사실상 동유럽계 유대인을 겨냥한 이민 제한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다카키 교수는 2차 대전 전후 시기에 대한 서술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인종차별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위세를 떨치는 이 반동적인 사상에 미국이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미국이야말로 인종차별주의가 활개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책 239쪽)라고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결코 미국에 대한 비판, 혹은 '반미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아직도 인종차별('인종 갈등'이나 '흑백 갈등'이 아니라!)이 만연한 미국이지만 일찍이 흑인 시인 랭스텅 휴스는 자신이 "아프리카에 속하는지, 시카고와 캔자스시티, 브로드웨이외 할렘"에 속하는지 물으며 '블랙 프라이드'를 이끌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인 동시에 미국인인 자아'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이는 현재 미국인의 한 전형을 이룬다.

이미 앞서 살펴봤듯, 담배와 목화에 노동력을 공급할 '계약 하인'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가 버지니아 농장주들의 반동적 결의로 '살아 있는 재산' 신분이 된, 그러나 끝내 자유로워진 흑인들이 영국계 청교도인들의 후손보다 더 열렬한 '미국의 정신'의 수호자가 된 현실도 이 책으로부터 연장된 논의의 결론과 다르지 않다.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들 가운데도 명문 귀족가가 아닌 지방 출신의 신흥 귀족이 많았고, 제정 로마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것은 황족인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아니라 평민 출신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을 천대했던 국가에서 기회를 쟁취했고, 이후에는 그 국가를 타도하고 전복하기는커녕 자진해서 그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이렇게 책의 핵심 문제 의식은 '다양한 소수 집단의 정체성 그 자체가 미국'이라는 것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머라이어 캐리 등장 이전에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어빙 벌린이 작곡한 곡이었다. 흑인, 중국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2차 대전에서 자진 입대해 미국을 위해 싸웠다. 1960년대 워싱턴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이, 1920년대 하와이에서는 일본계와 필리핀계가 손을 잡고 차별과 착취에 맞선 연대 투쟁을 벌였다.

다카키는 1997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해 인종 문제 관련 연설에 대해 한 조언에서 '21세기 어느 시점이 오면 백인도 미국 인구 분포에서 소수 집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클린턴이 며칠 후 UC 샌디에이고 졸업식 연설에서 한 말은 이랬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후, 여러분의 손자손녀들이 대학생일 즈음이면 미국에 '다수 인종'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카키 교수는 비록 투병 끝에 행복하지 못한 임종을 맞았지만, 정치적 신념의 차원에서만 보면 새로운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희망을 안고 편히 눈을 감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망은 오바마 행정부 집권 2년차에 있었던 일이다. 인종주의적 차별의 선동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의 등장을 그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책이 한국에서 처음 번역돼 출간된 2022년 초, 한국에서는 20대 대선 선거전이 한창이다. '차별의 선동은 표가 된다'는 트럼프의 교훈은 일부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듯 보인다. 동료 시민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차별의 역사에 눈을 돌리지 말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민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저자의 제안이 단지 남의 나라, 미국의 얘기만은 아닌 이유다. 

▲미국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얼굴을 등에 새긴 모델이 전위적 화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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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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