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라면 단체 수용시설에서 거의 평생을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장애인도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탈시설 정책 도입'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장애인 인권단체들은 19일 탈시설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탈시설 정책을 적극 추진하라"고 주장하며 한국이 유보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비준을 촉구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2006년 채택돼 2008년 발효되어 2021년 6월 기준 182개국이 비준했다. 한국도 2008년 국회 비준을 마쳤으나 생명권에 관한 선택의정서는 보류하는 등 협약 이행은 지지부진하다. 선택의정서 관련해서는 유엔 자유권위원회 등에서 수차례 비준을 권고해왔다.
선택의정서가 비준되면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탈시설 정책에 힘을 실을 수 있다.
앞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요양병원 등의 시설에서 집단감염 사태, 또 코호트 격리로 취약계층을 사실상 방치됐다는 문제가 드러나며 시설 수용에 대한 문제가 지적됐다. 이때문에 '탈시설' 정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탈시설'이란 시설 밖에 사는 것을 말한다.
장애인 수용시설에 대해서는 '보호시설'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상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용되는 등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시설 특성상 사회에서 분리·고립됨에 따라 각종 인권침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한편, 이러한 사회로부터의 분리가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때문에 '탈시설'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 왔다.
탈시설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국제사회에서도 탈시설의 중요성에 관한 공감대가 확산함에 따라 시설폐쇄 및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
탈시설 정책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탈시설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다. 탈시설 로드맵에 따르면 2025년까지 연간 740명의 시설거주 장애인을 지역사회에 거주 및 정착할 수 있게 지원하고 2041년까지 지역사회 거주로의 전환을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다.
한국의 '탈시설 로드맵'의 현 주소는?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날 포럼에서 김기룡 중부대 교수는 "탈시설은 2000년대부터 제안된 개념"이라며 "26년간의 단계별 추진 계획은 또 다른 희망고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미 지역별로 다양한 시범사업이 진행되며 운영 경험이 축적됐다"며 "현 로드맵에서의 '3년 실시계획'은 사실상 '시간벌기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 교수는 현 탈시설 로드맵의 탈시설 지원 계획에도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 로드맵은 장애인 본인의 자립 희망 의사를 확인한 후 탈시설 및 지역사회 거주를 지원하겠다는 방식"이라며 "시설 퇴소에 따라 지역사회 정착에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거주지라는 물리적 공간도 중요하지만 정착과 자립, 활동지원 등 전반적인 주거복지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탈시설에 대해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고, 자립과 사회참여를 선택할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지역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의미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세상'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장애가 자연스럽고 흔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탈시설 정책으로 전환한 국가에서도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고든 카일 온타리오 커뮤니티리딩 전 정책국장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사례를 들었다. 카일 전 국장은 "캐나다의 경우 시설 노동자들은 시설 폐쇄 시 노동자 재배치 문제에 대해, 또 시설에 입소 중인 장애인의 부모들은 퇴소 시 위험에 방치돼 더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등의 우려로 반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카일 국장은 "탈시설 정책 추진 후 우려와 달리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고 강조했다. 카일 국장이 제시한 탈시설 정책 추진 후 2012년 이뤄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응답가족의 91%가 "시설을 떠나 지역사회에 편입한 것에 대해 상태가 개선되거나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87%는 "지역사회 거주하는 장애인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질이 우수하거나 매우 높다"고 응답했으며 "93%가 장애인 가족 구성원의 지역사회 편입에 만족한다", 81%가 "장애인 가족 구성원이 시설에 있을 때보다 지역사회에 편입한 현재 더욱 자주 만나고 있다"고 응답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주요 국가들이 탈시설 정책 전환에 성공한 데 반해 우리나라는 탈시설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하다"며 "탈시설이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등 인식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박 대표는 "정부에서는 예산을 이유로 정책 추진에 소극적"이라면서도 "시설에 지원되는 예산을 탈시설 정책 추진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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