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 '마산방어전투'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최형두 의원(경남 창원시마산합포구)이 23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마산방어전투의 의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최 의원은 "가장 먼저 휴전선을 넘어 남침했던 김일성 근위 6사단(일명 방호산 부대)은 단숨에 전남 여수와 순천까지 내려왔다"며 "경남 하동에서는 당시 영남편성 관구사령관이었던 채병덕 장군(육군 소장)을 무너뜨린 뒤 진주를 거쳐 그 해 8월, 마산 진북면 서북산(西北山 738m)까지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마산 서북산은 당시 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데서 ‘갓데미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한 곳이다"고 하는최 의원은 "이곳에서 그 해 8월부터 9월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서북산은 한미연합군 1000여 명과 북한군 4000여 명이 전사했고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던 치열한 전투였다는 것"이라며 "마산방어전투는 6·25 한국전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전투였으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 마산방어전투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미연합군이 패배했다면, 불과 40~50km 떨어진 임시수도 부산과 UN군 하역항만이 모조리 인민군 손아귀에 넘어가 전세(戰勢)는 돌이 킬 수 없는 참담한 결과를 맞아야 했을지 모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의원은 "당시 인민군 6사단에 배속돼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평양 출신 작가 김사량은 서북산 참호에서 마산 창포만을 내려다보며 섣부른 승리감에 도취되어 이런 진중기사를 쓰기도 했다"고 이렇게 소개했다.
"바다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 진해만을 발아래 굽어가며 마산을 지척에 둔 남쪽 하늘 한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00m고지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 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 바윗돌을 파내고 솔가지를 덮은 은폐호에서, 저 멀리 서남쪽 통영반도의 산줄기가 굼실굼실 내다보이며, 정면에 활짝 트인 바다 한가운데 거제도가 보인다..."
하지만 최 의원은 "거침없이 남하했던 북한 인민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다"고 하면서 "연합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마산방어전투에서 국군·미군·지역주민 등이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덕분에 구천직하(九天直下)하던 인민군의 발목을 완벽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마산방어전투에서 처절하게 버텨낸 덕분에 국군과 UN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완벽한 반전의 기회를 갖게 됐다"고 밝혔다.
최형두 의원은 "그 동안 마산방어전투가 한국전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며 "지금도 많이 늦었습니다만 오늘 토론회를 계기로 국가 흥망이 걸렸던 마산방어 전투가 제대로 재조명받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