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지난 8일 고시를 통해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에서 정읍시로 이어지는 고갯길인 ‘삼남대로 갈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공식 지정했다. 장성군에서는 백양사 백학봉에 이은 두 번째 명승 지정이다.
갈재는 충청·전라·경상도를 뜻하는 삼남지방과 서울을 잇는 ‘삼남대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돌길과 흙길의 원형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진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다.
갈재(葛岾)는 문헌기록에 노령(蘆嶺), 위령(葦嶺), 적령(荻嶺) 등으로 표기되어 있고 갈대가 많은 고갯길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갈재 주변에는 갈대가 자라지 않는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남유록(南遊錄)’에서 ‘노(蘆, 갈대)’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의 일화로 인해 노령(갈재)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생은 북이면 원덕리 ‘갈애바위’ 전설의 주인공이다.
갈재가 있는 북이면 원덕리에는 한 쪽 눈을 다친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한 갈애바위가 있는데 기생 ‘갈애’가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과 주변의 관리들을 현혹해 나라에서 엄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상처 입은 갈애의 얼굴처럼 변한 갈애바위에 위령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한양과 통하는 길인 만큼 역사에 남은 중요한 사건들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망감)할 때 갈재를 이용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건넜던 고개가 갈재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한 다음 전주로 향하며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목을 끄는 기록도 다수다. 갈재에는 숙박시설이 없어 나그네들이 하룻밤을 묵기 위해 역원(驛院, 조선시대 여관)을 찾았는데 장성 쪽에는 지금의 장성호 일원에 청암역(靑巖驛)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청암역은 12개 동의 건물에 500여 명이 근무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삼남대로 갈재의 왕래가 실제로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장성호 수변길 역시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유두석 장성군수는 “삼남대로 갈재의 명승 지정으로 장성은 총 13건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면서 “갈재가 지니고 있는 역사·인문학적인 가치와 수려한 경관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정비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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