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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두레'에서 신명나게 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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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두레'에서 신명나게 놀다 2

[탈춤과 나] 마승락의 탈춤 ④  

2. 87년 ‘어떤 생일날’과 88년 ‘우리 공장 이야기’

내가 한두레 입단하기 전 공연이라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89년 ‘아버지의 행군, ’일터의 함성‘은 87년 ‘어떤 생일날’에 이어 88년 ‘우리 공장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고 한두레의 노동극 史에도 의미가 큰 만큼 짧게라도 소개할 가치가 있다.

87년 ‘어떤 생일날’은 그해 5월부터 노동 현장 순회공연(6회)을 하여, 7월 여성백인회관에서 ‘민중예술한마당’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애초에 극장공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파업 현장을 순회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공연 관련 포스터나, 전단, 팜플렛도, 사진도 없다. 구재연, 서환옥, 김영희, 남기성, 이종현, 나 운 선배가 출연했고, 대표연출/구재연, 기획/김영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쉽지만 아래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떤 생일날’에 대한 소개를 갈음한다.

1987년 여름 대림동의 문화공간인 살림마당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구로공단 주변의 문화공간과 노조수련회 등에서 공연되었다. (중략) 이 연극은 각 개인과의 갈등, 집안에서의 갈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단지 이야기의 전개뿐 아니라 놀이적 장치(프레스 놀이)를 통한 극중극의 삽입 등으로 현실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이 작품뿐 아니라 이후 전문 연행집단에서 생산되는 노동연극은 그 이전의 노동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의 대부분이 지식인, 학생을 주요한 관객층으로 삼았던 것에 비해, 노동자 대중을 관객 대상으로 삼으면서 노동운동의 구체적 발전에 실천적으로 기여함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지게 된다. - <민족극 대본선 3 ; 노동연극 편>, 민족극연구회 엮음, 풀빛, 1991

88년 ‘우리 공장 이야기’는 그해 7월, 한두레 사무실에서 시연회를 시작으로 파업 현장과 대학 등 40회 정도의 순회공연, 9월 6일부터 8일까지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공연하였고, 11월, 부산 자갈치 소극장에서 이틀간 공연을 했다.

▲우리 공장 이야기 팸플릿 사진 1, 2, 3 – 우측 하단에 순회공연 일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료는 부산 자갈치 소극장 공연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마승락

작품의 객관적 평가를 한 아래의 글을 인용한다.

(중략) 사실주의 연극과 같은 유기적 갈등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으나, 연기나 판의 쓰임새에서 드러나는 드라마투루기는 다분히 마당극 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짜임새 있는 갈등의 축적(명진과 현장 동료들, 명진과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오계장)과 노동자적 낙관성을 드러내는 명진이라는 인물의 민중적 전형의 형상화가 돋보인다. (중략)<민족극 대본선 3 ; 노동연극 편>, 민족극연구회 엮음, 풀빛, 1991

▲우리 공장 이야기 공연 사진 1 - 88년 8월 1일 춘장대 해수욕장에서 ‘안양지역 민주 노조 수련회’에서 공연한 사진으로 보인다. ⓒ마승락
▲우리 공장 이야기 공연 사진 2- 위 사진과 같은 공연 사진이다. 야간이라 횃불을 밝히고 남기성, 이종현 형이 연기하고 있다. ⓒ마승락

3. 90년 10월, 한두레에 복귀와 ‘불꽃으로 살아’

90년 10월 초, 방위 복무를 마치자마자 나는 한두레에 복귀했다. 당시 한두레는 북아현동 꼭대기 버스 종점 앞 허름한 건물 지하 연습실에서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 공연 ‘불꽃으로 살아’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방위 복무하는 동안 한두레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일터의 함성’을 끝으로 박정곤 형, 남기성 형, 조현모 형, 김경애 선배, 김찬우가 취업 등의 이유로 활동을 정리하였고, 류정서, 구정민, 오영희, 최상철이 새로 합류하였다.

▲불꽃으로 살아 팜플렛 사진 1, 2- 작품의 중압감도 있었지만, 너무도 힘겹게 공연을 올린 터라 이전 작품 이미지에 비해 아무런 디자인 없이 팜플렛을 제작하였다. ⓒ마승락

87년 ‘어떤 생일날’, 88년 ‘우리 공장이 야기’ , 89년‘아버지의 행군’, ‘일터의 함성’을 하며 다져진 출중한 역량을 보유한 단원들 상당수가 활동을 정리했으니 당시 대표였던 이종현 형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불문가지였다. 거의 신출내기 단원들과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불꽃으로 살아’ 공연을 대학로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이종현 형이 대표이면서 연출, 주연까지 맡은 이 공연을 끝으로 이종현 형, 홍준의 형, 김순희도 결혼과 취업 등의 이유로 활동을 접게 된다. 공연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4. 91년, 놀이패 한두레의 대표, 그리고 거리춤.

‘불꽃으로 살아’와 그 해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을 끝으로, 대표였던 이종현 형이 결혼을 앞두고 91년 초에 활동을 정리하게 되었다. 공석이 된 대표 자리를 입단한 지 햇수로 3년차인 내가 맡게 되었다. 사회 경험도, 공연 경험도 부족했던 20대 중반에 대표라니? 나 아직 입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 말고는 대표를 맡을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연습실도 목동으로 이전하여 민족춤패 디딤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창작마당극 공연을 이어가야 했다. 그나마 대학 탈춤패에서 연출 경험이 있었고, 연출에 전망을 둔 내가 연출을 맡기로 하였지만 무슨 공연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공연을 준비하려는데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하여 창원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대학 선배의 도움을 받아 노동 현장 취재를 떠났다. 약 보름 정도의 노동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우리 한 걸음으로’를 쓸 수 있었다. 세종대 연극반 출신 김영환과 이승아, 이대 풍물패 출신 서지현이 새로 합류하였다. 남자 배우가 모자라 놀이패 울력의 이영식 선배도 합류하였다. 박정곤 형과 남기성 형이 틈만 나면 달려와 작품에 힘을 실어주어 그나마 덜 부끄럽게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대표가 기획도 하고, 대본 쓰고, 연출하고, 주연하고. 이제 까지의 한두레 공연 역사상 가장 어설픈 작품이 만들어졌다. 공연 사진은 남아 있지 않고, 아래의 팜플렛만 남아 있다.

▲우리 한 걸음으로 팜플렛 사진 1, 2- 재정도 열악했고, 인력도 부족해 얼마나 힘겹게 공연을 올렸는지 이렇게 공연 팜플렛도 엉성하다. ⓒ마승락

4월 27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노문협은 대표였던 박인배 선생이 ‘노래판굿 꽃다지’ 연출로는 차마 시비 걸지 못하고, ‘불법 음반 유통’이라는 다소 유치한(?) 혐의로 구속되어 그 후임으로 김경란 선생이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서노문협 차원에서 열사의 장례굿을 준비하게 되었다. 노제 전날 우리 한두레와 극단 현장, 풍물패 터울림, 명지대 탈패, 대학 풍물패 등이 모여 거리굿을 준비하였다. 명지대에서 시청까지 운구 행렬 선두에서 거리춤을 추기로 하였다. 일단 터울림의 박희정(시립대 탈 80) 형이 연합 상쇠를 맡고 풍물패를 이끌기로 했고 춤패는 내가 지도하기로 했다. 

춤패는 한두레 일부와 극단 현장 단원, 명지대 탈반 등 약 30여 명이 모였다. 극단 현장도 마당극을 하는 단체라 탈춤은 기본으로 익혔고, 대학생 탈패도 탈춤의 기본은 어느 정도 출 줄 아는 상태였지만, 굿거리나 타령 장단에 춤을 춰본 경험이 전부인데, 노제 행렬에서 굿거리나 타령 장단으로 행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선 풍물패는 자진모리장단, 오방진, 길군악, 진 오방진 등을 기본으로 연습하도록 하고, 춤패는 그 장단에 맞는 거리춤을 만들기로 했다. 봉산의 깨기, 송파의 여닫이, 고성오광대의 깨끼 등을 약간 변형하고, 그간 한두레 공연에서 만든 창작춤을 토대로 8가지 춤사위를 추려 밤새 연습하였다. 

이윽고 노제 당일, 풍물패 100여 명이 좌우로 늘어섰고, 춤패 30여 명이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거리춤패와 풍물패가 운구 행렬 선두에 섰다. 수천 명의 운구 행렬이 명지대에서 출발하여 신촌 로터리를 거쳐 시청 앞에 이르기까지 장장 5시간이 넘는 동안 풍물 소리와 거리춤이 이어졌다. 거리엔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열사가 가는 길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적셨고, 폭력 정권을 규탄하며 함께 애도했다. 이후에도 애석한 죽음이 이어져 성대 김귀정 열사, 인천에서 박창수 열사, 서강대 김기설 열사의 추모제에도 그렇게 모였고, 거리춤을 춰 드렸다. 상반기를 그렇게 열사 추모로 보낸 뒤 춤패 디딤과 합동으로 열사 진혼 춤 공연을 만들어 몇 개 대학에서 더 공연하였다. 이와 관련된 사진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진은 없다.

5. 92년 우리 사는 이야기

그사이 류정서, 구정민 단원이 가사를 돌봐야 해서 활동을 정리하였고, 잠시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하던 남기성 형이 돌아왔다. 그리고 풍물을 맛나게 치는 서상규(명지대 탈 82)형과 재간둥이 김옥희(경희대 탈 88), 고주연(이대 탈 88)이 신입 단원으로 들어왔다. 나는 대표로서 극단의 살림살이를 이어가야 했다. 틈틈이 탈춤 강습도 하고, 유치원 국악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단원들을 강사로 파견하여 많지 않은 돈이지만 약간의 월급도 주기 시작했고, 연습실 월세를 선배들의 후원금 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사는 이야기 팜플렛 사진 1, 2 - 김 우선 화백께서 그림을 그려 주셔서 포스터와 팜플렛 표지로 썼다. 이시은 님이 편집디자인을 하였고, 다시 돌아온 남기성(중앙대 탈 81)형이 대표연출 했다. ⓒ마승락

92년에 공연한 ‘우리 사는 이야기’는 이전 한두레 공연과는 다른 점들이 있다. 물론 그간 87년 ‘어떤 생일날’부터 90년 ‘불꽃으로 살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한두레의 노동극에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고민과 갈등을 겪는 인물이 그 갈등을 해소해가는 인간적 측면을 주요하게 표현해 왔고, 그것이 한두레 작품의 주요한 차별점이기도 했다. ‘우리 사는 이야기’에서는 파업 현장을 주도하는 이가 설정은 되어 있으나 등장하지 않는다. 주된 무대도 파업 현장과는 떨어져 있다. 파업으로 구속된 남편을 둔 아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이 주 무대다. 회사의 회유를 받는 덕배와 알뜰하게 살림하는 아내가 살고 있으며, 야박한 것 같지만, 인심 좋은 주인집 아주머니 등 세 세대가 사는 집이 주 무대고 거기서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이다. 4월 16일부터 5일간 초연 후, 6월 21일부터 보름간 재공연을 했다. 물론 대학과 노조에 초청공연을 다니기도 했지만, 이전만큼 노동 현장에서의 수요가 줄어들었다. 나는 전년도의 부담을 덜고 기획과 배우로 참여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내가 공연기획에 눈을 뜬 것 같다. 공연 포스터나 팜플렛도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디자인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우리 사는 이야기 공연 사진 - 예술극장 한마당에서의 공연 장면 좌측이 혜자 역의 고주연(이대 타 88), 가운데 익살스러운 연기를 하는 여수댁 김옥희(경희대 탈 88), 우측이 서지현(이대 풍물패 86)이다. ⓒ마승락
▲우리 사는 이야기 연습 사진 - 목동 연습실에서 연습 중 이미지 컷을 찍었다. 좌측부터 김옥희, 극단 현장의 최재모 형, 서지현, 필자, 고주연이다.ⓒ마승락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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