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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두레'에서 신명나게 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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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두레'에서 신명나게 놀다 1

[탈춤과 나] 마승락의 탈춤 ③  

앞의 글(<프레시안> 2021년 10월 4일, 7일 게재)이 탈춤을 처음 접하고 대학 탈춤패 활동을 한 86년부터 88년까지의 기억을 옮겼다면 이번 글에서는 탈춤패 출신들이 만든 ‘놀이패 한두레’에서 활동한 89년부터 93년까지의 경험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글로 ‘놀이패 한두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님을 미리 밝힌다.

1. 89년 2월, 놀이패 한두레 입단과 ‘아버지의 행군’ 공연

89년 2월에 나는 문화운동에 투신(?)했다.

‘문화운동에 투신했다’라는 표현은 몹시 거슬리는 표현이지만 초기에는 그랬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것을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했고, 그것이 민중의 부름에 답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당연한 길인 양 인식하던 때였다. 간혹 귀농(?)하여 농민운동을 하겠다는 이도 있었으나, 노동운동이 대세였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나의 문화운동으로의 투신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차마 변절자 대하듯 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운동을 한다는 것도 일부 문화패에서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가 ‘서탈 출신 문화운동 투신 1호’라고 속으로 꽤 으스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민망한 의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버리게 되었다. 문화운동이라 하는 것도 거창한데, 거기에 투신이라니? 내가 무슨 노동자 계급을 위해 헌신한다고? 아마도 92년 이후로는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였고, 딴따라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그것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딴따라로 살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지만, 굳이 졸업할 필요도 못 느꼈었고, 문화운동을 하고자 결심했기에, 탈춤패 출신이 모여있는 ‘놀이패 한두레’가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전년도에 학생 연출가로 나름의 입지(?)를 굳힌 터라 이제 더 이상 학생 문화패가 아닌, 전문패에 들어가서 마당극 연출을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89년 2월 ‘놀이패 한두레’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갓 들어온 신출내기한테 누가 연출을 맡기랴? 내가 찾아간 구로 외딴 곳 허름한 건물에 있던 한두레 사무실에서는 제2회 민족극한마당에 참가할 ‘아버지의 행군’ 연습이 한창이었다. 아버지역에 남기성(중대 탈 81), 아들 역에 이종현(중대 탈 81), 아내 역에 김순희(서울대 탈 85), 그 외에 최현숙(건대 극회 79), 홍준의(서울대 탈 81), 조현모(고대 농악대 82), 김경애(서울여대 탈 84), 김찬우(서울대 탈 85)와 같은 선배들과 그 작품 연출이었던 박정곤(서울대 치대 80) 형,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뒷패 형남석(중대 탈 81) 형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조금은 어색한 첫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어지는 뒤풀이에서 나는 쉽게 한두레에 동화되었다. 연출이었던 정곤 형은 대뜸 마침 배역 한 명이 모자라던 차에 잘 되었다며, 회사 관리자 김부장 역을 맡겼다. 입단하자마자 바로 배역을 맡은 것이다. 바로 전년도만 해도 관객석에서 제1회 민족극한마당을 가슴 벅차게 관람했던 내가 제2회 민족극한마당에서는 배우로 참여하게 된다니! 감개무량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배우로 마당에 서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기 훈련을 받아보지도 않았고, 대학 탈춤패에서 겨우 한 편 출연한 경험이 전부인 나를, 그 어설프기 짝이 없던 나를, 놀이패 한두레 선배들은 끝까지 참아주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해 3월, 입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신촌 기찻길 옆에 자리한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아버지의 행군 팸플릿 사진 1, 2 – 좌측이 포스터로도 사용된 팸플릿 표지이고 우측 상단 사진 뒷줄 좌측 첫 번째가 이 공연을 대표 연출한 박정곤 형이다. ⓒ마승락

제2회 민족극한마당도 성황리에 치러졌다. 객석은 연일 만석이었고, 환호와 박수 소리가 넘쳐났다. 전년도에 종로 피맛골에서 학생 문화패와 기울였던 술자리가 이제는 전국에서 올라온 딴따라 선배들과 술잔을 부딪치게 되었으니, 1년 만에 엄청나게 출세(?)한 거다. 연일 이어지는 전국의 딴따라 선배들과의 뒤풀이는 내게 새로운 학습의 장이자, 친교의 자리였고, 한두레 신입 단원 마승락의 신고식이었다.

▲아버지의 행군 공연 사진 1 – 공연 첫머리에 춘 파업춤이다. 한두레는 노동극을 하면서도 그 첫머리에 그 공연을 드러내는 창작춤을 만들었다. 해마다 서탈협 여름 전수에 마당극 수업과 함께 창작춤 전수도 진행했다. ⓒ마승락
▲아버지의 행군 공연 사진 2 좌측부터 경찰역에 김찬우(서울대 탈 85), 사장 부인역에 이진숙, 사장역에 이바우, 김부장 역에 필자, 노동부 역에 조현모 형이 대책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마승락
▲아버지의 행군 공연 사진 3 – 좌측이 종갑역을 맡은 당시 한두레 대표 이종현(중대 탈 81) 형이고, 우측이 아버지역 남기 성(중대 탈 81)형이 아들의 파업을 만류하고 있다. ⓒ마승락

신촌 예술극장 한마당에서의 공연보다 더 가슴 떨리는 경험은 따로 있었다. 파업 현장에서의 공연이 그것이었는데, 구로 일대 수도권뿐 아니라 창원, 마산까지 찾아가 공연을 했다. 경찰이 봉쇄한 현장은 담을 넘어가 공연하기도 했다. 극장에서의 공연 횟수보다 파업 현장 공연이 더 많았다. 파업 현장에서의 공연은 극장에서의 공연과 사뭇 달랐다. 우선 관객이 달랐고, 공연 장소가 달랐고, 공연을 보는 상황이 달랐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관객은 극장의 관객보다 더 절박했고, 뜨거웠다. 아무런 조명도 없고 등,퇴장로가 따로 없으니 객석에서 관객과 같이 공연을 보는 관객이었다가 등장하기도 했고, 언제 경찰이나 구사대가 진압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더 몰입하여 공연을 관람(?), 아니 공연에 참여했다. 회사 관리자 역을 맡은 나는 극장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높은 강도의 온갖 야유와 항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해 5월, 내가 방위로 입대하면서 부득이 한두레 활동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파업 현장에서의 공연 경험은 한동안 내가 노동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 아쉽지만 파업 현장 공연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일터의 함성 팸플릿 사진 1, 2 – 좌측이 포스터로도 사용된 팸플릿 표지이고 우측 사진은 만든이들 페이지이다. ⓒ마승락

내가 방위 생활을 하던 89년 10월에 한두레는 한두레의 장점인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살린 노동극 ‘일터의 함성’을 박정곤 형의 연출로 공연하였다. 방위 복무 중이던 난 이 공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공연은 특별히 한두레 창립 15주년 작품으로, 87년 어떤 생일날, 88년 우리 공장이야기, 89년 아버지의 행군 등 일련의 노동극을 공연하면서 축적된 한두레 단원들의 고민과 노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첫째 마당 연대의 춤과 마지막 마당의 사슬춤, 나리 마당의 나리춤 등 창작춤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다져진 단원들의 농익은 연기와 춤으로 공연 내내 마당은 흥청거렸고, 객석은 긴장과 웃음, 감동으로 출렁였다.

(중략) 특히 마지막의 ‘쇠사슬춤’ 이후는 작품 전체에서 양적으로도 큰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결단과 치열한 대결, 패배, 끌려감, 다시 일어섬 등이 매우 구체적이며 강렬한 춤으로 형상화되었다 (중략)- <민족극 대본선 3 노동연극 편>, 민족극연구회 엮음, 풀빛, 1991

▲일터의 함성 공연 사진 1 – 좌측부터 홍준의(서울대 탈 81, 현 서원대 교수), 이종현(중대 탈 81, 양봉업), 박은하, 남기성(중대 탈 81, 현 연희단 사이 대표), 김경애(상명여대 탈 84) ⓒ마승락
▲일터의 함성 공연 사진 2 – 파업 중이라 집에 못 가고 지역 노동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한가위 대동굿을 하며 흥겹게 연대를 다지는 장면 ⓒ마승락
▲일터의 함성 공연 사진 3 – 나리 마당. 좌측부터 김찬우(서울대 탈 85), 조현모(고대 농악대 82), 신영식(경희대 탈 84), 노조 탄압 세력의 공권력을 풍자해 섬뜩하게 형상화했다.ⓒ마승락

이 ‘일터의 함성’에서의 창작춤은 그해부터 시작된 ‘노래판굿 꽃다지’의 주요 근간이 되었다. 89년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노래극으로 연출한 바 있던, 박인배 선생(극단 현장 대표, 서노문협 대표, 세종문화회관 사장 역임,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이 연출한 이 ‘노래판굿 꽃다지’는 그 이후로도 수년간 서노문협(서울지역 노동 문화예술단체 협의회- 놀이패 한두레, 극단 현장, 노패패 꽃다지, 민요연구회, 풍물패 터울림 등 참가)의 대표 공연으로 자리매김한 공연이다. ‘노래판굿 꽃다지’는 해마다 서노문협 소속 단체의 주요 공연을 짜깁기로 구성하여 수년간 공연되었는데, ‘일터의 함성’에서 선보였던 각종 창작춤을 근간으로 삼아 해마다 업그레이드되어 군무로 펼쳐졌다.

▲노래판굿 꽃다지 4(1992년) 공연 사진 1 – 뒷 열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노래패 꽃다지이고, 그 앞 중앙에서 필자가 춤추고 있다. ⓒ마승락
▲노래판굿 꽃다지 4(1992년) 공연 사진2 – 노래패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춤패의 창작춤이 그 빈 무대를 채웠는데 이러한 창작춤은 거의 한두레에서 이미 창작된 춤에 기반하여 약간의 변화와 안무를 통해 형상화했다. ⓒ마승락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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