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양산의 아들 독립운동가 우산 윤현진 선생에 대한 추도가가 재현됐다.
이는 윤현진 선생에 대한 최초의 선양사업으로 1959년 6월 세워졌던 기념비 제막에 불렸던 63년만이다.
당시 추도가는 김만석 작사, 신상호 작곡으로 우산 윤현진의 의로운 죽음과 나라를 위한 충혼정신을 담았다.
하지만 곡은 사라지고 가사만 남아 있던 것을 양산시립합창단 작곡가인 천득우씨가 곡을 붙여 윤현진 서거 100주년 추모기념 특별전에서 재현됐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은 “63년전 양산시민이 윤현진 선생을 생각하며 불렀던 노래가 재현돼 기쁘다”며 “이 노래가 시민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현진 선생님의 추도가가는 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다운로드 할 수있다.
양산출신인 윤현진(1892∼1921)은 자는 명구 호는 우산 이며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임정)에서 내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7세때 만성제서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15세 때 구포의 사립학교인 구명학교을 졸업 후 1914년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김성수, 신익히, 송진우 등과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항일눈동에 앞장섰다.
그후 그는 1916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와 대동청년단을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1917년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사재를 털어 경남은행을 창립해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윤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에서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3월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 안창호, 이시영, 이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승만 등과함께 대한 임정을 조직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됐다. 재무차장에 선임된 그는 임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고향의 사재 30만원(현재 300억)을 헌납했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해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결의 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국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윤현진은 상하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일본아사히신문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정패망이라고 논평했다.
임정부는 윤현진 공로를 높이 평가해 국장으로 치루고 상하이 정안사의 묘지에 안장했다. 양산에서는 1959년 국민의 이름으로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해 추모했으며, 그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됐다. 유해는 1995년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됐다.
우산 윤현진 선생의 추도가
선열의 피로 엉긴 땅을 밟고서 답 없는 우산님을 불러 보노라
나라에 바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국 땅에 고이 잠든다
그 님은 어제에도 겨레의 사도, 그 님은 오늘에도 수호신으로
생사의 구별없는 위국충혼은 조국의 하늘 아래 고이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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