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9년에 평화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핵'이라는 물리학의 결정체와 맞닥뜨렸다. 북핵이든, 미국 핵이든, 핵문제를 풀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는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오랫동안 핵'무기'와 핵'발전'을 구분해서 바라봤었다. 핵무기는 마땅히 없어져야 하지만, 핵발전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근대문명이 다량의 에너지 소비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리고 북핵 문제를 풀려면 경수로 제공이 불가피하다고 봤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때 접한 김종철 선생님의 글은 내 의식을 흔들었다. 선생님의 글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다량의 에너지 소비에 의존하는 근대문명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던가?' '북핵 문제를 다른 핵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지만 현실론에 사로잡힌 내 의식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짜 현실을 봤다.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핵'무기'와 핵'발전'을 나누었던 내 의식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핵무기 폭발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바라보던 육안(肉眼)뿐만 아니라, 핵발전 사고로 뿜어져 나오는, 그러나 보이지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방사능을 바라볼 수 있는 심안(心眼)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또 있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다. 그러나 버섯구름이 없었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언제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핵발전소가 품고 있던 방사능 물질이 핵폭탄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에 대한 망각은 후쿠시마 참사를 잉태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가 일어나면서 탈핵의 비전은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저변에도 퍼져가는 듯했다. 김종철 선생님도 후쿠시마 참사가 또다시 인류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며 강연과 글을 통해 탈핵의 윤리와 상상력을 갖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 위기가 성큼 다가오면서 핵발전이 마치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라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을 읽다가 시선이 멈춘 곳도 바로 기후 위기와 핵발전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환경론자나 환경운동가들 중에도 원자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대표적인 인물로 제임스 러브록을 들었다. 세계적인 환경·생태주의자인 러브록도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량이 거의 없는 원자력 발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김종철 선생님도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급격히 증가된 인구와 높아진 생활수준을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모두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며 러브록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영국 <가디언>의 환경전문 칼럼리스트인 조지 몬비옷과 세계적인 반핵평화운동가 헬렌 칼디콧의 논쟁을 소개했다. 논쟁의 핵심은 핵발전이 기후 위기 극복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이 논쟁을 소개하면서 '원자력으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려면 몇 개의 원전을 더 지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2020년 세계 에너지 생산 총량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61.3%, 원자력이 10.1%였다. 이에 따라 원자력으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려면 원자력의 비중을 최소한 2~3배 정도 끌어올려야 한다.
2021년 현재 전 세계에 443개의 원전이 가동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에너지 생산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20%로 끌어올리려면 400개 가량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 폐로가 예정된 노후 원전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대량으로 원전을 짓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우선 원전 자체는 탄소 배출이 별로 없지만, 원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탄소 배출이 일어난다. 또 대량의 원전 건설은 단시일 내에 이뤄질 수 없고 원전이 늘어날수록 아직 인류 사회가 해법을 찾지 못한 사용후 핵연료도 세계 곳곳에 쌓이게 된다. 이는 핵비확산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원전이 많아질수록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김종철 선생님이 원전으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주장이 "말이 되느냐"고 되묻는 까닭이다.
이처럼 인류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복잡하다. 찬핵과 탈핵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김종철 선생님이 강조한 것이 '숙의 민주주의'이다. "좁게는 원자력시스템에서 벗어나고, 넓게는 지금과 같은 지속 불가능한 문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정당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믿고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며 시민주권에 걸맞은 숙의 민주주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봤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덴마크에서 운영되어온 '시민합의회의'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 제도는 어떤 주제에 대해 시민합의회의를 구성한다고 알리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고 '제비뽑기'로 회의 구성원을 선발해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핵발전 문제를 일반 시민들이 모여 결정하자는 것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핵 전문가들은 이권과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제비뽑기로 뽑힌 시민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다고 전문가 의견이 아예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숙의의 과정은 전문가 의견 청취, 자료와 정보 검토, 자유로운 토론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우리에겐 대소 봉쇄정책의 설계자 정도로만 알려진 조지 케넌은 "우리의 도덕적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자연으로부터 뽑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통찰한 바 있다. 그의 통찰처럼 핵은 안보 문제든 에너지 문제든 여러 가지 딜레마를 품고 있다. 이 딜레마를 김종철 선생님이 제안한 시민합의회의에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신의 불'이라고 불리는 핵을 시민들의 도덕적 지혜로 다스리는 여정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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